나의 뿌리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高 山 芝
2011. 5. 25. 23:25
| |
고경명[1533∼1592 (중종28~선조25)]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의병장이다. 본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 ·태헌(苔軒)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중종 28년 광주의 압보촌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25년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l552년(명종 7) 진사가 되었으며, 26세 때인 명종 13년(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 · 정언(正言)을 거쳐 이후 사헌부 지평ㆍ홍문관 교리ㆍ순창 군수ㆍ승문원 판교 등을 거쳐 59세로 동래 부사직에서 물러나기까지 내외의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 사이 성산의 식영정 등을 무대로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며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김인후ㆍ기대승ㆍ정철 등과 사우 관계가 두터웠다고 한다. 1563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낙향하였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의 추성관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대장이 되었으며, 광주(光州)에서 모집한 의병 6,000여 명을 이끌고 태인ㆍ전주ㆍ여산ㆍ은진ㆍ연산ㆍ진산을 거쳐 금산에서 적과 싸우다 안영ㆍ유팽로ㆍ그의 아들 고인후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유고집으로 제봉집(霽峰集)ㆍ제봉속집ㆍ제봉유집ㆍ유서석록(遊瑞石錄) ㆍ정기록 등이 전한다. 고경명 선생은 고향인 장흥에 창의기병을 하였다. 더욱이 선조께서 서행파천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격분함을 참지 못한 선생은 큰 아들 종후와 여주인 김천일, 담양 부학유 유팽노 등을 찾아 창의군을 모집하여 거의 할 것을 상의하였다. 드디어 5월 29일에 북향 재배하고 의병기를 세우니 모든 사람들이 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피를 마시며 서로 맹약하였다. 금산의 왜적을 향하여 적정을 수색하는 한편 충청의병장 조헌에게 서신을 보내어 같이 평강을 건너 금산의 왜적을 칠 것을 약속하였다. 이 때 진산에 이르자 왜병이 전주로 진군하려고 진산에 오는 것을 접전 공격하니 그 기세가 용맹무쌍하고 정의로 뭉친 장졸이며 수 차례 접전 끝에 왜적은 불리함을 알고 서서히 후퇴하여 금산성으로 돌아갔다. 왜군은 금산성으로 돌아간 후 수세를 취하였다. 임진 7월 9일 새벽에 작전계획을 세우고 곽영의 군은 북문을 담당하여 공격하고 고경명군은 서문을 담당하여 공격하였다. 북문에서 승리한 왜군이 후방에서 고경명 군을 공격하니 앞뒤로 적을 대항해 싸우게 된 고경명 군은 후방의 적을 쫓아 눈벌에서 왜군에 포위 전군이 순절 하였다. 고경명 군이 거의 군으로 나섰다는 보고를 들은 선조는 공조참의라는 관직을 하사하고 초토사라는 겸관을 전지하였으며 순절한 소식을 듣고 애통하게 생각하여 사우를 광주에 세워 액호를 포충사라 하고 배향케 하고 금산의 종용사에도 배향케 하여 그 충의를 영세불망케 하였다. 조선 17대 효종 27년에 당시 군수 여필관이 순절비를 세운 것을 일제 때 없애 버렸으나 해방 후 후손들이 다시 세우고 1964년 비각을 건립했다. 충청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중종(中宗) 때 남화풍(南畵風 : 당나라 왕유를 비조로 하는 문인 화파의 화풍) 으로 호랑이 그림을 잘 그린 하천(霞川) 운(雲)의 손자(孫子)인 경명(敬命)은 부친(父親) 맹영(孟英)이 명종조(明宗朝)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가 이 양(李 樑)의 일파로 몰려 유배당하는 불운을 맞고 담양(潭陽)에 옮겨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고 병든 몸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나라 운수가 중도에 부색(否塞)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개 떼 덤비듯 한다."로 시작되는 거의(擧擬)의 격문(檄文)을 팔도(八道)에 돌려 구국(九國)의 염원으로 일어난 의병(義兵)을 이끌고 왜병(倭兵) 고 싸우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도망가자는 참모의 말을 뿌리치고 차남 인후(因厚)와 함께 의열(義烈)로 죽음을 맞이했다. 시(時)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호남파 5대시인(湖南派五大詩人))으로 손꼽혔던 그의 맏아들 종후(從厚)도 복수군(復讐軍)을 기병(起兵)하여 "불행한 때를 만나 집안의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고(不肖孤)는 초토(草土)에 앓고 누워 아직까지 이 왜적들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아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다.(중략)"라는 통문을 돌리면서 여러 갈래로 흐트러진 의병(義兵)을 모아 영남(嶺南)으로 달려가 진주성(晉州城)을 지켰으나 성(城)이 왜병에게 함락당할 때 김천일(金千鎰) ·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세상에서는 이들을〈삼장사(三壯士))라 일컬었다. 경명(敬命)의 두딸 노씨(盧氏) 부인과 안씨(安氏)부인도 정유재란 때 왜적을 꾸짖으며 칼을 안고 엎드려 순절하였으니 이들 일가(一家)의 절의(節義)는 높이 추앙되었다. 선조(宣祖)는 경명(敬命) 일가(一家)의 죽음을 슬퍼하며 광주(光州)에 사당을 짓게하여 포충사( 忠詞)로 사액(賜額)하고 경명(敬命)에게는 충렬공(忠烈公) 종후(從厚)에게는 효열공(孝烈公), 인후(因厚)에게는 의열공(義烈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대장이던 고경명(霽峯 高敬命)이 아들 셋을 불러 말하기를, "첫째와 둘째는 나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셋째 용후(用厚)는 난리를 피해서 가문을 이어야 한다." "난리를 피해 조선 팔도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어머니를 모시고 경상도 안동 학봉(鶴峯 ) 김성일(金誠一) 선생 집으로 가거라. 그 집은 높은 의리가 있는 집이니 너희들을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16세 소년 고용후는 50여 명을 데리고 전라도 광주를 떠나 경상도 산골로 가서 학봉의 장남 김집을 만나 부친의 말을 전한다. 그때부터 두 집안이 함께 생활하게 되는데, 피란 중이라 산나물로 죽을 끓여 연명하면서도 가족처럼 지냈다. 고경명 의병대장과 아들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자, 학봉의 집안에서는 상주가 된 고용후를 예법에 맞게 성복시켜 준다. 학봉의 손자 김시권(金是權)이 고용후에게 말하기를, "자네나 나나 난리를 당하고 집안에 상(喪)까지 당했지만, 학문에 힘쓰지 아니 하면 나중에 옷 입은 짐승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함께 공부를 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고용후는 광주로 돌아갔다. 선조 38년(1605년) 과거 시험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급제를 한다. 10여 년 후, 고용후는 안동 부사로 부임을 하여 학봉의 노부인과 장남 김집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소생에게 오늘의 영광이 있는 것은 20여 년 전의 은혜 덕분입니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 하며 울면서 큰절을 올린다. 그 후로도 같은 연배의 두 집안 사람들은 친형제처럼 지냈다. -- 추월취벽(秋月翠壁) -- 추월산의 푸른 절벽금봉 박행보 그림 제봉집에 전하는 고경명의 한시 식영정이십영 중의 한 시제임.화제 본문과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鐵壁上蒼然 무쇠같은 절벽 창연도 한데, 層賞尺去天 층층의 봉우린 하늘에 가 닿을 듯. 秋風衣欲振 갈바람에 옷자락 떨치려 하니, 直待桂輪圓 둥근 달 오르기를 곧장 기다리리라. -- 학동모연(鶴洞暮煙) -- 학동에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 제봉집에 전하는 고경명의 한시 식영정이십영 중의 하나임. 시의 본문과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獨樹全迷頂 홀로 선 나무 정상을 가리우고, 遙山淡抹腰 먼 산허리에 어슴푸레 감도네. 洞門深不見 학동은 깊어서 보이지 않고, 歸鶴失危巢 돌아오는 학 제 깃조차 찾지 못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