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⑩/ 霽峯 高敬命

高 山 芝 2011. 5. 30. 17:03

시리즈> 선비정신을 찾아서…⑩/ 霽峯 高敬命
壬亂 맞아 구국 일념으로 목숨 바쳐
의병 봉기 불지핀 '행동하는 지식인'
詩書에 뛰어나 외교관으로도 이름 날려
입력시간 : 2007. 09.27. 13:36


고경명 영정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포충사에 가면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92) 선생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남쪽의 의리를 드높여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남아 있는 그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옛 선현을 박물관에 모셔둔 곰팡이 낀 사기그릇 정도로 딱딱하게 여기는 선입관을 허물고 겸허한 맘으로 그 '기개'와 '시대양심'을 알아보겠다고 나서면 무등산 근경에 흩뿌린 그의 용기가 '깨끗한 품성'에서 비롯되었음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왜적의 무리를 칼로 찔러 죽인 그 의로운 장수가 이런 시를 지었다면 믿겠는가? <추위에 못 견디어 자다가 일어나니/ 이 밤 따라 하늘엔 별도 많구나/ 절구질 소린 서리 띠고 퍼지는데/ 외로운 들불은 숲 속에서 가물댄다.…>

우리 민족의 긴 역사 속엔 점철된 피비린내 나는 외침이 많았지만, 올해로 415주년을 맞은 임진왜란은 미증유의 국난이었다. 이 국난에 즈음하여 나라 안의 고을고을에서 내 국토의 자유를 수호하자는 지사와 용사, 농민이 궐기하여 힘차게 북을 울리고 의기를 휘날려 왜적과 싸웠으니, 그 중에서도 호남에서 의를 짚고 일어선 제봉 고경명 선생은 아름다운 시문(詩文)으로 일찍이 문장력을 높이 인정받았던 선비로, 60 노구를 이끌고 흰 도포자락을 전쟁터에 휘날려 젊은 의병들의 피를 끓게 했다.
창극 ‘고경명’


1533년 지금의 광주시 압보촌. 용모가 수려한 아이가 탄생하니, 주위의 여러 어른이 '도량이 넓은 인물'이 될 것을 예견한다. 소년은 성장해 스무 살에 진사시험에 장원을 하고, 스물 한 살에 울산 김씨와 혼인해 어른이 된다. 스물 여섯에는 벼슬에 나아가 명종 가까이에서 벼슬과 시문을 즐긴다. 서른 살, 자신이 고관으로 있을 때 별시에 뽑아준 송강 정철이 승진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사택에 찾아가 창문에다 시 한 귀를 썼다. <해질 무렵 금연전에서 물러나와/ 서문 밖 옛 친구 찾아갔었지/ 술이 깨면 두려운지 번연히 알건마는/ 마음에 쌓인 소회 취중에 다했었네.> 이때 같은 광산 출신 고봉 기대승이 동호(東湖)에 있으면서 편지를 보내와 시로 화답한다. <깨끗한 동호에서 좋은 종이 펴놓고/ 술 한 잔씩 마시면서 휘두른 거야?/ 고맙게 부쳐준 편지 몇 차례 읽어보니/ 옛날에 놀던 일이 새삼스레 생각나네.> 동향 출신 두 선비는 16세기 그 어디쯤에서 술잔을 마주하며 풍류를 나눴던 듯 하다. 향리 광주 무등산 아니면 서울 근교 경치 좋은 계곡 어디쯤일 게다.

이듬해 제봉은 당로자(當路者)에게 꺼림을 받자 낙향하였다. 위운이면 위운이었는데, 홍문관 교리로 승합되었다가 가을에는 전교에 좌천되어 부산군수로 나가게 됐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향리에 불을 밝혔다. 그의 연보는 '이때 공이 시골로 돌아와서 독서와 산수에다 날을 밝혔는데, 19년 동안 꼭 집에만 있었다'고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은둔자적한 19년 동안 제봉은 기대승과 자주 왕래해 시를 주고받았고, 면앙정 송순과도 교유하면서 그의 정자를 찾아가 두 편의 율시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42살 때 광주목사와 무등산에 오른 뒤 남긴 기행문 「유서석록」(遊瑞石錄)은 그의 은거 중 최대 수확으로 꼽힌다. 이후 49세에 재기해 임란 직전인 1591년 59세로 관로를 떠나기까지 10년 간은 비교적 무난한 난숙기로 보인다. 영암군수로 임용되자마자 변무사 서장관으로 임명돼 명나라에 파견돼 진정서를 지어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돌아온 후 서산군수를 지내다 이율곡의 추천으로 다시 서장관이 되어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고 이후 한성부윤·순창군수·춘추관 등을 지내다가 59세 때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또다시 제소를 받아 하향하게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포충사


회갑을 앞두고 이제 여생을 어떻게 보낼까 고심하던 차에 터진 임진왜란. '국운이 비색하여 섬나라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는데, 수령이나 군관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도망치기 일쑤이니 어찌된 일인가. 신하로서 어찌 왕을 잔악한 왜적 앞에 내버려둔단 말인가. 나는 일개 백발의 민초로서 '일편단심'을 걸어 맹세하고 7천 의병을 일으켜 북으로 진군 중이다. 각 읍의 수령·관군·민중들이며, 무기를 들고 군량을 모으며 모두 분연히 일어설 때다. 구국을 위해 다함께 죽음을 걸고 앞을 다투어 나설 줄로 믿는다.' 폐부를 찌르고 간담을 울리며 용기를 불어넣는 간절한 호소…. 7월 10일 순절하기까지 40일간 쓴 격문과 편지만도 20통이 넘으니 이 원로의 행동하는 애국 열의는 가히 짐작이 간다. 이 때 백성이 믿는 것은 오직 호남뿐. 고경명 주력부대가 은진까지 진군했을 때 항간에는 적이 금산을 넘어 전주를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밀려왔다. '전주는 호남의 근본인데 먼저 흔들리면 적을 제압하기 어려우니 먼저 구해야 한다.' 제봉은 당초 계획을 바꿔 금산에 방어진을 치고 유팽로에게 지시하여 호서의병장 조헌에게 전서를 보내 합세할 것을 건의했다. 진산에서 전군을 재편성하고 일진을 현지에 두어 본진으로 삼고 군량 공급의 임무를 부여한 다음, 7월 8일 금산성을 향해 출진했다. 첫 전투에서 제봉은 선봉대를 앞세워 공격했는데, 군장 김정립의 말이 부상당해 후퇴했다. 그러나 이날 석양에 적병이 모두 잠든 틈을 이용해 용맹스런 30여 명을 성 밑에 잠복시킨 뒤 성밖의 집들을 모두 불태움과 동시에 성내의 창고들을 분탕, 환진하였다. 서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이튿날 7월 10일 제봉은 다시 공격을 시작,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향해 쳐들어갔으나 관군이 먼저 집중공격을 받고 무너지자 의병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유팽로가 제봉에게 피할 것을 외치나 제봉은 둘째아들 인후와 함께 몸을 감싼 채 최후를 맞았다.

그의 절의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전승을 얻어내진 못했지만, 국난 극복의 실천적 행동은 이후 의병운동에 큰불을 당겼다. 제봉 사후에 큰아들 종후가 의병을 일으켰고, 능주에서는 최경회·문홍헌 등이 전라 우의병을, 보성에서는 임계영을 중심으로 해 전라 좌의병을, 남원에서는 변사정을 주축으로 적기의병을 일으키니, 모두가 금산성 전투에 참전했던 고경명 휘하의 의병들이다. 따라서 "임란 극복이 가능했던 것은 호남 지방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며, 호남이 보전된 것은 활발한 의병 봉기에 있었으며, 의병활동을 촉진시킨 것은 고경명이 앞에 나섰기 때문이었다"는 후학들의 평가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전주대 오종일 교수는 조선조의 도통정맥을 따지는 데 있어 조광조 이후 인물로 바로 제봉을 꼽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조부 고운이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예로 들었다. 조광조가 이룩하려다 실패한 인도주의는 제봉에 의해 외세침략에 대항하고,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수용되었으니, 이는 '이기설'의 논쟁이나 호락(湖洛)이 분리되는 대립과 분파가 아니라, 자존한 민족 정통성에 대한 실체의 확인이며 참된 민족정기를 높이는 행동철학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인가. 선조가 제봉의 구국정신을 기려 영의정에 제수하고 최초로 사액한 사당 포충사를 안고 있는 남구 원산동 제봉산의 아름드리 소나무는 400년 넘은 지금도 여전히 맞바람을 이겨내고 우뚝 서 있다. 1만2천 평 잔디밭에 조성된 사당 안에는 서양화가 오승우씨가 그린 '금산구국혈전도'와 오승윤씨가 그린 '창의거병도'가 걸려 있어 감회를 깊게 한다. 도끼·삽·낫을 들고 왜군의 방패·칼에 맞서는 부릅뜬 의병의 눈, 다리가 잘리고 허리가 부러지면서도 왜병의 발을 붙들고 늘어지는 처참한 피흘림. 선혈을 나눠 마시고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제봉 선생이여….


고운석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