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호남사람의 이야기 - 고 경 명

高 山 芝 2011. 5. 31. 10:00

남성숙 광주매일 주간의 ‘호남사람 이야기-고경명
젊은 의병 피끓게 한 구국 출사표, 제봉 고경명 霽峯 高敬命

國亂맞은 시인, 과감히 칼을 들다 그 기나긴 호남 저항의 기질을 파내려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사람 중 한 사람 고경명. 국난을 당하여 과감히 칼을 든 시인이다. 아름다운 시문으로 일찍이 문장력을 인정받은 60세의 노선비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에 즈음해 농민과 함께 힘차게 북을 울리고 의기를 휘날려 왜적에 대항하자 그를 따르는 젊은 의병들의 피는 더욱 뜨겁게 요동쳤다. 광주시 광산구 압보촌에서 난 고경명은 스무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벼슬에 나가 영암군수·홍문관 교리·서산군수·춘추관 편수관 등 관직을 두루 거친 후 59세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고향에 내려왔다. 그는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했다. 관료로서 소명과 제소를 반복하는 역겨운 파란을 넘겨야 했는가 하면 때로는 산바람 강줄기에 온몸을 맡기고 어려운 정치와 사회를 지켜보던 60년 세월을 되짚어 보았다. 회갑을 앞에 두고 고향을 위해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제 내 인생에 화룡정점을 할 때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한 제봉은 마음을 수습하고 정세변화를 보았다. 왜적의 진출은 속도가 빨라 4월 14일 부산진을 상륙해 5월에는 서울에 입성하니 위기였다. 게다가 이 어인 오판인가. 아니면 비겁한 체념인가. 정부는 경성 함락 소식을 듣고 관군을 해체하는 우를 범하니 정치는 사분오열이었다. 나서자, 내가 나서야 한다. 호남이 나서야 한다. 나라가 위험에 휩싸이자 고경명은 아들 종후·인후를 시켜 본주까지 도망쳐와 있는 군사를 이끌고 수원에 이르러 본주 목사 정윤우에게 붙여주고 돌아오도록 했다. 당시는 관군이 후퇴해 흩어지고 수도 서울이 함락돼 선조가 의주로 파천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민심이 흉흉한데가 의병군과 관군간의 갈등이 심화된 상황이어서 의병 모집이 정말 어려웠다. 고경명은 두 아들을 앞세우고 30일만에 6천명을 운집시켰다. 곧장 의병군 편대를 정비해 담양을 출발해 전주에 도착, 각 도의 수령과 민중에게 격문을 보냈다. ‘국운이 비색하여 섬나라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는데 수령이나 관군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도망치기 일쑤니 어찌된 일인가. 신하로서 왕을 잔학한 왜적 앞에 내버려둔단 말인가. 각 읍의 관군, 수령, 민중들이여, 무기를 들고 군량을 모으며 모두 분연히 일어설 때다. 구국을 위해 다 함께 목숨을 걸고 앞을 다투어 나설 줄로 믿는다.’ 폐부를 찌르고 간담을 울리며 용기를 불어넣은 이 간절한 호소에 호응한 의병들은 담양을 출발해 태인을 거쳐 전주에 도착, 금산으로 향한다. 고경명 주력부대가 은진까지 진군했을 때 항간에는 적이 금산을 넘어 전주까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밀려왔다. “전주는 호남의 근본인데 먼저 흔들리면 적을 제압하기 어려우니 먼저 본도부터 구해야 옳다” 고경명은 당초 계획을 바꿔 금산에 방어진을 치고 유팽로에게 지시하여 호서의병장 조헌에게 전서를 보내 합세할 것을 건의했다. 첫 전투에서 고경명은 선봉대를 앞세워 공격했는데 군장 김정립의 말이 부상 당해 후퇴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적병이 잠든 후 용맹스런 30여명을 성밑에 잠복시킨 뒤 성밖의 사가를 모두 불태워 서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튿날 다시 공격을 시작 관구는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향해 쳐들어갔으나 관군이 먼저 집중공격을 받아 무너지자 의병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유팽로가 고경명에게 피할 것을 외치나 고경명은 둘째 아들 인후와 함께 몸을 감싼 채 최후를 맞았다. 고경명이 세상을 떠난 후 큰 아들 종후가 의병을 일으켰고 능주에서는 최경회가 전라우병을 보성에서는 임계영을 중심으로 해 전라좌의병을, 남원에서는 변사정을 주축으로 적기의병군을 일으켰다. 모두 고경명 휘하의 의병들이었다. 고경명의 피가 의병운동에 불을 지펴 호남과 조선 땅은 고스란히 지켜졌던 것이다. 후학들은 조선조의 도통정맥을 따지면서 기묘사림의 조광조 이후 호남사상의 맥을 이은 이로 고경명을 꼽고 있다. 조광조가 이룩하려다 실패한 인도주의는 고경명에 의해 외세침략에 대항하고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수용되었으니 민족 정통성에 대한 실체의 확인이며 참된 민족정기를 높이는 행동철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