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진해공(鎭海公) 시묘(侍墓) 지(址) 비문(碑文)

高 山 芝 2011. 6. 14. 21:58

 

진해공(鎭海公) 시묘(侍墓) 지(址) 비문(碑文)

 

공(公)의 휘(꺼릴 諱)는 석겸(碩謙) 자(字)는 덕용(德用) 호수소제(號守素齊)이시며, 충렬공(忠烈公) 제봉(霽峯)의 7대손(代孫)이시다.

고(考 : 아버지를 의미함)의 휘는 만거(萬擧)이시며 배(配)는 문화(文化)유(柳)씨(氏) 계(繼)는 진주(晋州)정(鄭)씨(氏)이시며, 슬하(膝下)에 시현(時顯) 시철(時喆) 두 아드님을 두셨다.

공(公)은 영조(英祖) 1728년(年)에 출생(出生)하시고, 1775년(年) 48세(歲)로 졸(卒)하시었다.

1751년(年) 재종(再從)형(兄) 신겸(信兼)과 무과(武科)에 동반(同伴) 급제(及第)하시었다.

이 쾌보(快報)에 접(接)하시 고(考)께서 기쁨과 또 자경(自警)하라는 뜻으로

마(馬)씨(氏) 의 계자서(戒字書)나 안(顔)씨(氏)의 가훈(家訓)에 못지 않는

언(古言)오십(五十)구(句)로 된 연자시(戀子詩)를 체경(滯京) 입사(入仕) 중이신 공(公)에게 내리시니 공(公)은 이를 품에 간직하시며 때를 가리지 않으시고 봉독(奉讀)하시며 시(詩)에 담긴 뜻에 충실(充實)하시었다.

기간(其間) 공(公)은 고비(考 아버지를 가리킴 妣 어머니를 가리킴) 양위(兩位)분(分)을 영화(榮華)로 모시지도 못한 때에 갑자기 병자(丙子)년(年) 1758년 액운(厄運)을 만나 고(考)는 2월(月) 20일(日), 비(妣)는 3월(月) 4일(日) 보름 동안에 타계(他界)하셨다는 통한(痛恨)의 비보(悲報)에 단장(斷腸)의 슬픔을 안고 천리(千里) 분환(달릴 奔 돌아올 還)하시어 양위(兩位)분(分)의 유해(遺骸)를 안양(安良) 가장(假莊)동(洞)에 안장(安葬)하시고 양분위(兩分位) 산소(山所)를 살피기 위해 막(幕)을 지어 시묘(侍墓)살이를 하시었다.

이곳은 인근(隣近) 주민(住民)들이 시체(屍體)를 가장(假裝)한 곳이며 맹수(猛獸)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몰(出沒)한 험지(險地)였다. 다행(多幸)히 공(公)의 효심(孝心)에 감동(感動)한 대호(大虎)가 비호(庇護)하여 주어 무사(無事)히 3년(年)시묘(侍墓)를 마치시었다.

기후(其後) 수차(數次)의 국난(國難)과 불행(不幸)한 사변(事變)에도 후손(後孫)들이 별(別) 사고(事故)없이 무사(無事)하였음은 오로지 공(公)의 유덕(遺德)인가 한다.

2백(百)여(余, 본문에는 余로 되어 있으나 餘가 바름)년(年)이 지난 제손(諸孫)들이 뜻을 모아 유지비(끼칠 遺 터 址 돌기둥 碑)를 세워 공(公)의 거룩한 유사(遺事)를 천추(千秋)에 빛나게 하며 오륜(五輪 : 삼강오륜) 중 백행지본(百行之本)이란 효(孝)가 사라져가는 이때에 후손(後孫)들이 자경(自警)하며 본받게 하려 함이라

1991년  10월   일

8대손(代孫) 영국(永國)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