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제1부 - 피아골의 들국화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제1부 - 피아골의 들국화
남녀노소 귀천없이 각각자유 주셨네 그진리를 배반하고 약육강식 일삼아 귀중하신 남의자유 빼앗기가 상사라 슬프도다 애처롭다 자유없는 민족아 노예적인 그생활은 죽기만도 못하다 포악하고 무도한놈 악행 당했으므로 골속까지 맺힌병은 천명만 기다린다 피골이 상련하여 뼈만남은 손으로 위문하러 온친구를 손목잡고 하신말 나의육신 내영혼은 이세상을 떠나도 남아계신 여러분들 복스러운 생활로 하신말 다못하여 푸르러진 얼굴에 뜨거운 피눈물이 두줄기로 흐른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상징, 김형애 할머니(89)
오늘 여기있는 나를 빼놓고 역사를 바라볼 수는 없다. 역사란 결국 ‘나’라는 실존에 의하여 해석되는 것이다. 나는 현대사의 산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놀라웁게도 현대사에 무지하다. 조선왕조가 어떻게 망했는지...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우리나라를 침탈했는지... 우리 민족이 어떻게 처절하고도 찬란한 저항을 전개했는지..., 왜 우리나라가 해방과 동시에 두 동강이 나 버렸는지... 그리고 해방 후에도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희생되어야 했는지... “민주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했는데, 얼마나 더 피를 흘려야 할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하여 나는 석연한 대답을 해 드릴 수가 없었다. 내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무지가 대부분 은폐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남북의 분단이 이렇게 엄청난 역사의 은폐를 초래할 줄이야... 독립운동만 해도 남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계열은 물론, 임시정부의 활동까지도 은폐시켰다. 이승만 구미에 맞지 않는 역사는 은폐되기 마련이었다. 북에서도 동북항일연군 내의 김일성이 주도한 소수부대 활약상 이외의 다양한 계파의 항일운동이나 빨치산 운동은 은폐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 국민의식 속에는 엄청난 양의 역사적 사실이 무지 속으로 덮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지의 장본인이 바로 나 도올 김용옥이다. 나는 나의 무지를 깨는 작업을 감행키로 마음먹었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민족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무지로부터 해방되었으면 하는 희망과 함께...
들불이 저 풀을 다 사르지 못한다. 봄바람이 불면 꼭 다시 살아난다. 이것이 내가 우리나라가 반드시 광복하는 날이 있다고 믿는 이유다. -백암 박문식
대한이 망했어도 우리의 마음이 죽어버리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한국혼(韓國魂)이다. - 예관 신규식
내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피아골. 어려서부터 빨치산 소굴이라고 해서 등골이 오싹하게만 느껴졌던 피아골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피를 많이 흘려 생긴 이름이라고도 하고, 이 동네 화전민이 피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남부군의 거점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 피눈물의 역사는 동학과 한말 의병으로까지 소급된다. 피아골은 생각보다 골이 깊다. 골이 깊어 피신이 용이하고 광대한 지리산 산악지대로 연결된다. 그리고 빠져나오면 섬진강변을 타고, 하동과 구례쪽으로 진격이 가능하다. ‘인후지지’라 부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현상이 이곳으로 거점을 옮길 때, 이미 그는 구한말 의병들의 체험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 피아골의 한가운데에 한말 의병의 한이 서린 연곡사가 자리잡고 있다. 연곡사는 통일신라 때 연기조사가 창건한 수선도량으로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아름다운 부도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한구석에 아무 표지도 없이 쓸쓸하게 의병장 고광순의 순절비가 서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고광순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의 둘째아들 고인후의 12대 종손이다. 1905년에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일어난 호남의 중기의병은 1906년 태인 무송서원에서 궐기한 거유 최익현의 거병을 필두로 시작되었다. 1907년초 장성의 기유만, 남원의 양한규, 광양의 백낙구, 창평의 고광순 등이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모두 좌절되었고, 고광순 의병만이 마지막까지 버티었다. 그는 이곳에서 축예지계 즉, 장기항전을 대비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포수들을 모아 강력한 빨치산 의병을 만들어 일제의 군경과 여기서 맞설 생각이었다. 1907년 9월 11일 새벽, 광주에 주둔한 일본군 키노 중대와 진해의 도꼬노 중대는 연합전선을 펴서 연곡사를 습격한다. 창평 고씨 명문양반가의 종손이었던 고광순은 당시 60노구의 할아버지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 걸고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은 당대의 명문거족 양반종손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식민지 사관으로 왜곡된 당쟁역사에서 잘못 배웠듯이 양반은 그렇게 타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창평 의병은 전주이씨 제각에 본부를 뒀다. 창평 의병의 활약은 일본군의 이른바 조선폭도토벌지에도 특별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은 창평 고씨 종가집 고광순의 집을 불태웠다. 고광순의 집이 불타던 날 그의 벙어리 아들이 왜군에 항거하자 왜병은 창과 칼로 마구 찔러댔다.
벙어리 아들 재환은 하체가 피투성이 된 채 껑충껑충 뛰면서 울부짖었다. 그 하늘에 사무친 울부짖음을 고광순은 피아골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임란의병장 고경명의 아들 학봉()과 고광순이 모셔져 있는 사당 고광순의 죽음에는 슬픈 사연이 많다. 한말의 생생한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과의 일화가 그중 하나다.
고광순은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당대 명 문장가였던 황매천에게 격문을 부탁했다. 그런데 황매천은 끝내 써주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황매천이 안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거절했다. 그 거절의 순간에 느꼈을 지식인의 나약함... 그런 것을 변명할 길은 없다. 황매천은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리고 매우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고광순은 연곡사에서 남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처절한 항전을 계속했다. 그리고 불원복이라고 쓴 부대 깃발을 휘날리면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고광순의 전사소식을 듣고 제일먼저 달려간 사람은 다름 아닌 황매천이었다. 매천이 쓴 약전을 다시보자.
같은 군에 사는 박태현과 함께 연곡사로 달려가 보았다. 깨진 기왓장과 조약돌이 쌓여있는데, 불탄 재는 아직도 불기가 있었다. 공의 시신을 덮은 개미뚝만한 초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터져나와 통곡을 했다. 그 밤으로 사람을 모아 흙을 돋우어 무덤을 만들었다.
매천은 분명 집에 써두었던 격문을 들고 그 불탄 연곡사로 뛰어갔을 것이다. 그 애처럽고 안타까운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그는 바로 여기에 고광순의 무덤을 만들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던 것이다.
연곡의 천개 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한데 남김없이 목숨바쳐 싸우는 열사들은 있어도 나라는 일그러지고야 마는구나.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있고, 까마귀 떼만 나무그늘 사이로 내려와 앉는다.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끝내 뭔 짝에 쓸 것인가. 임란 때부터 의절지킨 명가문의 성세에 감히 따를 수 없다. 홀로 서풍을 마주보며 뜨거운 눈물을 튕긴다. 새로 만든 무덤은 높이 솟았으나, 옆에 핀 들국화는 누웠도다.
고광순보다 일곱 살이나 손아래인 매천 황현은 광양에서 태어났으나 구례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보통 구례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어려서부터 천재끼가 있어서 시문에 능하였고,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의 우수한 성적을 내었으나 시골사람이란 이유로 격하시키자 벼슬을 단념하고, 구례 간전면 만수동 백운산 밑에 부안실이라는 재실을 짓고, 백운서실과 인립정을 중축, 학생들을 가르치며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우리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저술중의 하나가 이루어진 그곳은 현재 황량하게 방치되어 있다. 지금도 그곳에 가보면 매화나무와 옹달샘이 있어 매천이라는 호가 그곳 만수동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차스럽게 편안함을 구한다는 구안실이라는 당호의 의미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매천은 행동으로써 구한말이라는 시대를 비극적으로 살기 보다는 그 시대를 정확하고도 비판적으로 기록해야겠다는 지식인의 사명을 가지고 살았다. 바로 이곳 구안실에서 그 유명한 매천야록을 썼다. 야록이란 야승 패사와 같이 정사가 아닌 야사라는 뜻이다. 그는 동학에 대해서도 동비 비적이니 하는 칭호를 서슴지 않고 쓰면서 매우 냉담하게 기술하였다. 동학이 지니는 개벽의 시대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유학자였다. 유학자의 가치관 속에서만 세상을 포평한 것이다. 그의 관념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그의 역사서술은 구한말의 역사에 대한 가장 정밀하고도 비판적인 글쓰기였다. 황매천은 사팔뜨기였지만 눈만은 똑바로 뜨고 살았다. 그는 리기론을 말하는 도학자의 한계를 벗어나 그가 사는 시대를 증언하려고 한 것이다. 그가 고광순의 격문쓰기를 거부했던 것과 그토록 그 거부의 사실을 통렬하게 후회했던 그 아이러니에 바로 당대 지식인들의 고뇌가 있었다. 고광순은 동비도 아니다 물론 비적도 아니다. 그는 창평 고씨 명문세가의 종손이었고, 대학자였던 것이다. 누구는 연곡사에서 죽고, 누구는 구안실에서 구차하게 연명한단 말인가. 황매천이 고광순의 격문쓰기를 거절한 바로 그곳은 구례의 월곡동에 있는 대월헌이었다.
바다와 산도 낯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도올 : 1910년에 국치를 당하시니깐 황매천 선생께서 돌아가신 곳도 이곳이란 말이죠? 홍영기 : 그렇죠. 도올 : 그 양반의 그 절명시를 보면은 추등암권회천고 가을 등잔불밑에 책을 덮고 수천년 역사를 회고하니 난작인간식자인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가 어렵구나
여기 매천의 절명시중의 ‘난작인간식자인’이라는 이 구절과 매천이 고광순의 주검 앞에서 쓴 싯구인 ‘아조문자종안용’ 즉,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끝내 뭔짝에 쓸 것인가. 이 두 구절 사이에는 동일한 주제를 전달하는 절규가 있다. 지식인의 삶의 방식, 지식인의 역사적 사명감에 대한 통렬한 도덕적 성찰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황매천은 고광순 죽음이후 3년간 번민에 찬 삶을 살았다. 그리고 결국 자기 합리화의 구차한 삶보다는 떳떳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없다.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추는구나.
황매천의 동생 황원도 해방을 1년 앞두고 창씨개명에 항거, 이 연못에 바위로 몸을 칭칭 감고 빠져 죽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지성인들이 20세기 일제시대사의 아픔과 더불어 살아야만했던 진실한 몸부림이었다. 이곳 구례 사람들은 이런 처절한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동네 촌로들은 “구대장 아깝다, 구대장 아깝다” 하고 항상 개탄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곧 군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연곡사 고광순의 무덤이 있던 곳에 순절비를 세운 것이다.
고광순 공께서 돌아가신지 수십년. 이 산하도 일제침략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이 제비고을의 영명한 혼들은 밤마다 밤마다 구슬피 울음소리를 내건만 지나가는 이 술한잔 올리는 이 없다. 대지와 집들이 이미 깨끗해진 지금, 구례 선비들이 생각하기를 공께서 순절하신 이곳, 이 흙과 돌이 아직도 공의 영혼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으니 어찌 표지하나 없을까보냐. 돈을 모아 큰 돌을 하나 다듬었다. 족손 두흠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하며 나에게 공의 사적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오호라 천만년을 지나도 웅장한 저 지리산은 무너지지 않는다. 저 우뚝 솟은 충의와 절개는 또 이 산과 더불어 영원히 우뚝 서리라. 1958년 무술2년 초순에 광산김씨 문옥 짓고, 김규태 쓰고 구례군민 일동 세우다.
이것이 우리가 산 한 세기의 모습이다. 피아골에서 나와 구례쪽으로 가다보면 지리산자락 너른 뜰 금환낙지의 명당터라 하는 곳에 장대한 아흔아홉칸짜리 기와집이 나온다. 엄청난 부잣집에 틀림이 없다.
운조루. 1776년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가 지은 집으로 문화유씨 명가문의 종택. 구한말의 생활사를 소상히 알려주는 운조루 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누각에 올라 구례 오미리의 너른 터를 바라보면 조선역사를 개벽하려했던 동학도들의 함성, 구한말의 피맺힌 항일의병들의 절규, 그리고 6.25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그 비극을 전후해서 일어난 빨치산 항쟁의 참상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나의 관심은 우선 이런 대저택이 어떻게 이토록 치열한 격랑 속에서도 불에 안타고, 이 모습대로 보존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이 지역의 특수성을 생각할 때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안채로 들어가면 나의 질문은 명쾌한 해답을 얻는다.
이 대가집에는 쌀독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네모난 뒤주고, 하나는 원형이다. 그런데 원형의 쌀독밑에는 타인능해라는 글씨가 붙어있다. 누구든지 와서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유씨종택 사람들은 자기네 뒤주독은 비워도 반드시 타인능해 뒤주독은 채웠다고 한다. 자기네는 보리밥을 먹어도 동네 사람들에게는 쌀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평소에 선을 쌓는 집은 반드시 남아돌아가는 경사가 있다.
운조루 일기에 보면 동학도들에게, 의병들에게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들을 도와주어야 했던 고충의 이야기들이 적혀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이집 굴뚝은 지붕위로 솟지 않고 모두 주춧돌 밑으로 깔려있다.
유종옥 : 밑으로 있는 이유는 한때 가난한 시대 아닙니까? 우리가... 지주들은 잘살고 못사는 사람들은 못살고...그먼 굴뚝이 높아불면 아침마다 밥을 하니라고 막 연기가 나잖아요? 그먼 어떤 가난한 사람은 밥을 못해묵는디, 부자들은 밥을 해묵는다 이거야... 밥을 해도 밑으로 퍼지지않습니까잉? 그럼 밥 해묵는걸 몰라요. 긍게 오미동 금환낙지 아흔아홉칸 집에서는 밥을 해묵는다...그걸 몰라. 그래 하인이 살고 있지만... 그래서 이 굴뚝이 전부 집 밑으로 있지만, 전부 집 밑에만 있지 집 우에는 없어요. 저기 보십시오만 위에는 없어요 전부 날라가부러.... 그러니까는 오미동 유가집에는 밥을 해묵는걸 몰라요.
종손 아들은 도둑놈이 들어와 물건 훔쳐가면서 쇠몽둥이로 머리를 심하게 후려쳐서 한 달 동안이나 의식불명상태로 누워있어야 했다. 이젠 더 훔쳐갈 물건도 없다. 가치가 전도된 한 세기. 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영락해버리고 친일하며 세파를 잘탄 사람들은 의리 떵떵한 권세와 부귀를 누리게 된 역사. 다시 한 번 짚어봐야 할 한 세기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여정을 재촉하였다.
출처 : http://blog.naver.com/vjshot/140016690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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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국립 순천대학교 사학과 홍영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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