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스크랩] 전남의 누정과 시단의 형성

高 山 芝 2011. 7. 26. 15:43

전남의 누정과 시단의 형성

 

―俛仰亭, 息影亭, 瀟灑園을 중심으로―

 

 

호남과 영남지역에 걸쳐서 누정을 중심으로 한 시단의 형성은 15세기 이후 두드러진 현상이다. 기묘(1519) 을사(1545)년의 두 사화를 계기로 한 역사적 대격동으로 인해 낙향한 많은 사림들은 지방에 누정과 원림을 짓고, 각자가 경영하던 누정을 찾아 다니면서 詩라는 방편을 통하여 서로의 우의를 쌓으며, 강호의 정취를 유감없이 표현하고 사림의 기상을 발휘하였다. 그 가운데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俛仰亭, 息影亭, 瀟灑園의 문인집단을 통해 각각의 누정의 건립과 특색, 그리고 시단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俛仰亭

 

 

俛仰亭은 송순(1493~1569)이 지은 정자이다. 27세에 無比文章이라 격찬 받으며 환로에 진출하였으나, 41세에 당시 국권을 잡고 휘두르던 김안로를 논책하다가 물러나 면앙정을 짓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자신의 입지를 정하고, 스스로 자신의 호를 俛仰이라 하였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俛有地, 仰有天.

그 가운데 정자 있어, 흥취가 호연하네. 亭其中, 興浩然.

풍월을 불러오고, 산천을 끌어들여, 招風月, 挹山川

청려장에 의탁해서, 한평생을 보내려네. 扶藜杖, 送百年.

시의 내용을 보면 다시는 출사하지 않고 자연 속에 몸을 의탁하고 여생을 즐기며 살아가려는 뜻이 들어 있다. 실지로 김안로가 죽었던 1537년까지, 4년 동안 자연인이 되어 시문을 창작하며 자연을 벗삼으며 소일하였으며 77세에 벼슬에서 물러나고 난 뒤 14년 동안 俛仰亭에서 친구와 제자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학문과 창작을 하면서 여생을 평화롭게 보냈다. 위의 시는 三言 六句라는 형식도 독특하나 그 내용은 계속 확대되어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등의 〈俛仰亭三十詠〉을 비롯하여 수많은 俛仰亭을 소재로 한 시작의 계기가 되었고, 국문시가로 〈俛仰亭雜歌〉,〈俛仰亭短歌〉,〈俛仰亭歌〉의 창작을 이끌어낸 시로 보인다.

송순을 이해하는데는 그가 호로 삼은 “면앙”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더욱 분명해질 수 있다. 면앙은 곧 俯仰의 뜻으로, 孟子의 君子三樂 가운데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에서도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으며, 俛仰亭의 건립 위치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俛仰亭은 세 칸으로 이루어진 협소한 공간이지만, 企村에서 가장 빼어난 제월봉에서도 주변 경물을 완상하기에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한데다가, 사면을 확 터서 경치를 완상하기에 좋도록 지었으며, 주변에는 온실을 지어 책을 두고서 추을 때는 이 곳에서 처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대승의 〈俛仰亭記〉를 살펴보면, 俛仰亭은 단순히 놀이나 휴식을 위한 장소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쉼 없이 전개되는 생활을 항상 지켜 볼 수 있고, 사시의 경치가 이런 쉼 없는 생활과 더불어 무궁히 변화해 감을 살필 수 있었다. 우주 자연의 변화하는 모습을 인간 생활의 변화와 연결 짓는 이러한 인식이 바로 면앙의 의미이다. 俛仰亭에서 바라보이는 경치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으니, 하나는 강물이 흐르는 넓은 들판이고, 다른 하나는 그 들판의 너머에 둘러싸인 산이다. 여기에서 들판은 내려다보아야 하고(俛), 산은 치어다보아야 한다(仰). 俛仰亭의 위치는 바로 이러한 俛仰으로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를 俛仰하며, 성찰하고 반성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곧 俛仰亭은 송순에겐 자연을 벗삼으며 벗과 교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면서, 自省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심중량은 송순을 평하여,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시류에 따르지도 않으며 천지를 면앙하여 터득함이 있는 분”이라 하였다.

俛仰亭은 호남시단의 요람으로서, 그 탁월한 경관으로 인해 수많은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俛仰集》에 나타난 인물만 해도 110여 명이나 된다. 임억령, 양산보, 정철, 기대승, 고경명, 임제, 김인후 등 모두 詩的交誼관계의 인물로서 모두 호남출신이거나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이였으며, 대부분이 당대의 명류들임을 볼 때, 俛仰亭을 중심으로한 당시의 시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俛仰亭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송순을 위시한 인재들이 짝으로 이루어져서 俛仰亭시단이 형성된 것이다. 俛仰亭과 관련된 작품은 《俛仰集》에만도 210수가 있으며, 기대승이 〈俛仰亭歌〉를, 임제가 〈俛仰亭賦〉를 지었으며,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박순 등이 〈俛仰亭三十詠〉을 지어 이 곳의 뛰어난 자연 경관을 노래한 것 등이 있다. 다음에서 〈俛仰亭三十詠〉가운데, 제 3영 한 수를 살펴보자.

몽선정의 푸른 솔(夢仙蒼松)

아득한 몇 겹의 산들이 비단문 앞에 있는데, 縹緲層巒綺戶前,

만 그루의 푸른 수염으로 운무를 쓸어내네. 萬柱蒼鬣拂雲烟.

인간들은 더위 식히려 어디로 가는가? 人間濯熱之何處,

누워 중천에서 떨어지는 물결소리 듣는다. 臥聽濤聲落半天.

위의 시는 사암 박순의 시로, 소나무 숲의 시원하고 탁트인 느낌을 거시적으로 드러내었다. 〈면앙정삼십영〉은 한 제목아래 5언절구가 4수로 김인후→임억령→고경명→박순의 순이며, 박순의 시만이 7언절구로 되어 있다.

면앙정이 있는 담양에서 20리 쯤 떨어진 星山에는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등의 누정이 있다. 송순은 이곳을 一洞三勝이라고 하였으며, 송강이 〈星山別曲〉을 지어 자연의 승경을 예찬함으로써 성산은 한층 유명해졌고, 그럼으로써 성산의 산자락에 위치한 息影亭은 그 앞에 건너 보이는 蒼溪 위의 환벽당과 이웃 마을에 자리잡은 소쇄원과 함께 星山洞의 勝區로 일컫어지게 된 것이다. 이 곳에 출입하던 인사들은 이 세 정자를 중심으로 두루 왕래하며 이른바 시단을 형성하였다. 이곳의 승지를 통칭하여 성산동이라 하고, 여기에서 이루어진 시단을 星山詩壇이라 이르고자 한다.

 

 

2. 息影亭

 

 

 

息影亭은 김성원(1525~1598;호는 棲霞堂 혹은 忍齊)이 지은 누정으로 1563년 그의 장인 임억령의 정계 은퇴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 준 것이다. 그리고 식영정 앞에 부모님을 즐겁게 모시려고 서하당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정철, 고경명 등과 교유하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서에 전심하였으며, 효심이 매우 지극하였는데, 73세 되던 해 왜구가 재침하였을 때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무등산을 헤매던 중 왜적에게 발각되어 노모가 해를 입자 김성원과 그의 아내가 몸소 이를 막다가 모두 함께 죽었다.

식영정과 서하당은 당시 성산시단 활동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이른바 四仙이라 자처하던 임억령, 정철, 김성원, 고경명 4인을 비롯하여, 양산보, 기대승, 유희춘, 이후백, 김윤제, 송인수, 김희년, 백광훈, 송순 등은 식영정을 무대로 하여 성산시단을 흥성시키고 이를 발전 계승하였다. 그들은 이 시단의 주역이 되어 적지 않은 詩作을 하였는데, 임억령의 星山洞題詠이 160여 수나 됨은 이곳에서의 작시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식영정 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식영정 사선이 서로 화운하며 지은〈息影亭二十詠〉으로, 이 시는 우리나라 전원 가사의 으뜸으로 손꼽히는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의 창작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식영정이십영〉은 내용에 따라 序景 2, 春景 3, 夏景 6, 秋景 6, 冬景 2, 結景1 題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음에서 제 6영 가운데서 두 수를 살펴보자.

물가 난간에서 물고기를 보면서 (水檻觀魚)

내가 마침 물가 난관에 기대었는데, 吾方憑水檻,

해오라기도 모래밭에 섰다네. 鷺亦立沙灘.

흰 터럭이 비록 서로 비슷하긴하지만, 白髮雖相似,

나는 한가로운데 해오라기는 한가롭지 못하다네. 吾閑鷺不閑.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싶어서, 欲識魚之樂,

아침 내도록 돌 위에서 굽어보네. 終朝俯石灘.

나의 한가로움을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긴하지만, 吾閑人盡羨,

여전히 물고기에 한가로움에는 미칠 수 없구나. 猶不及魚閑.

여름에 관한 첫 번째 제영으로, 두 수 가운데 위의 시는 임억령이 쓴 것이고, 아래의 것은 정철이 쓴 것이다. 〈息影亭二十詠〉은 전체적으로 임억령→정철→고경명→김성원의 순으로 각 제마다 한 수씩을 읊어 모두 4수의 시가 한 제를 이룬다. 이 시에서는 여름날의 한가로움이 해오라기와 물고기에 비겨 재치있게 표현되었다. 〈성산별곡〉에서는 낮잠에서 막 깨어나 창계의 고기를 바라보고, 오리와 갈매기가 벗을 삼은채 잠깰 줄 모르는, “이 무심하고 한가로운 모습이 주인과 비겨 어떠한고?”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3. 瀟灑園

 

 

 

瀟灑園은 본디 양산보(1503~1557)의 별서이다. 양산보는 어려서 정암 조광조(1482~1519)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당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신진사류들과 함께 정치개혁을 시도하던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남곤 등 훈구파의 대신들에 몰려 화순 능주로 유배되자 그는 귀양가는 스승을 모시고 낙향하였으며, 같은 해 겨울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뜨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아 벼슬길의 무상함을 깨닫고 세속적인 뜻을 버린채 산수경치가 뛰어난 고향에 은둔하게 되었다. 소쇄원의 정확한 조영시기는 알 수가 없으나, 30대에 초정을 짓기 시작하여 40세에 송순의 도움을 얻어 완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조성한 것인만큼 그의 사상과 취향이 깃들여 있다. 그는 평소에 주무숙과 도연명을 몹시 흠모하여, 주무숙의 〈愛蓮說〉, 도연명의 〈歸去來辭〉를 항상 가까이 하였다. 송나라 때 황정견이 주무숙을 평한 “光風霽月”을 따서 광풍각과 제월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나, 〈애련설〉에서의 “蓮花之君子者”를 본받아 소쇄원의 작은 연못에 연꽃을 재배한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소쇄원은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치 좋은 곳에 조성된 정원으로 전원생활과 문화생활을 함께 한 공간이다. 세상을 버리거나 도피하는 도교적 은둔보다 세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유교적 은일을 택하여 전원과 가족에게 돌아온 것으로 번거로운 정치나 관직을 버리고자 하였지 결코 인생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곧 도연명의 행적을 본받은 것이다.

정원의 평면적인 모습은 계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이며, 내원과 외원의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볼 때 계곡의 굴곡진 경사면들을 계단상으로 처리한 노단식 정원의 일종이지만, 구성면에서는 비대칭적인 산수원림이다. 소쇄원의 넓이는 약 1,350여 평으로, 소쇄원의 공간구조를 설명할 때는 흔히 주자의 “武夷九曲”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최근 연구에서는 소쇄원을 관찰시각의 높이에 따라 상․중․하 3단으로 나누어 가장 높은 제월당을 상단, 가장 낮은 광풍각 일대를 하단으로 나누어 보기도 하며, 공간기능의 특성에 따라 前園․溪園․內園으로 나누어, 진입로 중심의 접근공간, 광풍각과 계류 중심의 행위공간, 제월당과 원림 중심의 정적공간으로 나누기도 한다. 결국 소쇄원은 시흥과 풍류의 놀이 공간이면서 내면 성정을 성찰하는 內省적이고 이치적 자연을 궁구하는 明理적인 공간이기도 하였다.

양산보는 소쇄원이 완성되자 바깥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호를 소쇄옹이라 부르며 뜻맞는 벗들과 교유하기를 즐겼다. 당시 송순, 김인후, 임억령, 기대승, 고경명, 김성원, 정철, 백광훈, 임제 등 수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수창하였는데, 그들은 곧 전남의 누정시단을 크게 발전시킨 주역들로서, 그들이 주도한 詩運의 진작으로 말미암아 담양의 소쇄원은 단연 전남의 대표적인 누정시단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소쇄원에서 펼쳐졌던 이러한 文運은 직접적으로 후기 시단에 영향을 끼치어 이처럼 누정시풍의 흥성을 기하게 되었다 하겠다. 후기에 소쇄원을 경영한 주체는 양산보의 손자인 양천운(梁千運;1568~1637)으로 진경문, 김대기, 백진남, 김선 등이 17세기 소쇄원 시단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소쇄원과 관련된 문헌자료는 매우 많지만, 그 가운데 김인후의 〈瀟灑園四十八詠〉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시는 그의 나이 49세에 읊은 5언절구로서, 12영씩 한 단을 이루어 전체가 4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단은 序이고, 2․3단은 소쇄선경에서 한가로이 자연을 즐기고 관조하는 정경을 그렸고, 4단은 마무리 결사로 태평성세를 기원하면서 소쇄옹 가문의 번영을 축원하는 내용이다. 다음에서 제 14영을 살펴보자.

담장 구멍으로 흐르는 물(垣窺透流)

한걸음 한걸음 물결을 살펴가면서. 步步看波去,

시 읊으니 생각이 그윽해진다. 行吟思轉幽.

사람들은 물의 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眞源人未泝,

공연히 담장 뚫은 물만 보는군. 空見透墻流.

지금도 담장 밑에 도랑을 내어 예전처럼 물이 흐르고 있다. 주자의 〈觀書有感〉에서의 물의 근원 곧 源頭[심성의 근원; 〈武夷九曲〉에서는 第九曲]를 찾고자 했던 것과 일맥 상통한다. 앞서말한 〈武夷九曲〉으로 소쇄원의 공간을 이해하고자 했던 김인후의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출처 : 유니의 공부방
글쓴이 : 유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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