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영상수필 - 성 소피아성당 - 1
[ 성소피아 성당 ]
아야 소피아 또는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 Αγία Σοφία 고대: 하기아 소피아, 현대: 아야 소피아[*], 라틴어: Sancta Sophia 상크타 소피아, 터키어 Ayasofya 아야소퍄[*],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는 이스탄불에 있는 정교회 대성당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비록, 겉 보기에는 가톨릭성당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대식으로 보자면 이슬람교와 관련이 크다. 실제로는 이슬람교신자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
하기아 소피아는 원래 정교회 대성당이며, 교회는 360년 이스탄불이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을 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이 정교회 대성당이 이때부터 하기아 소피아로 불리게 되었는지, 훗날의 재건 때부터 하기아 소피아로 명명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최초의 정교회 대성당은 목조 지붕을 가진 바실리카였던 것 같지만, 오늘날에는 그 위치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40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성 크리스소톰)를 추방시키는데 수반된 난동으로 교회가 소실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재건,415년에 축성되었다. 이 대성당도 현재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바실리카이며, 현재에도 일렬의 원주와 주기, 장식된 대들보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정교회 대성당도 532년 1월 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났던 대화재로, 황궁의 일부나 성 이레네 성당과 함께 다시 소실해 버린다.
두 번의 소실을 겪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후 소피아 정교회 성당의 재건을 결정하여, 그 설계를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로스에게 맡겼다. 공사는 5년 11개월이라고 하는 단기간에 종료되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맞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메나스 총대주교에 의한 헌당식을 거행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왕 솔로몬의 신전을 능가하는 교회를 세웠다는 생각을 하여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 라고 외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서 재건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의 소재지로서 동방정교회 제일의 격식을 자랑하였으며, 또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사당으로서 이용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러시아인 스몰렌스크의 이그나티오스의 기록에서는, 대성당 내부에는 많은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으며 노아의 방주의 문이나 성 십자가 아브라함의 테이블 등 많은 성유물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또, 이 시대에는 근처에 총대주교구의 자택이 병설되어 있어, 현재는 출입구가 되어 있는 부분은 총대주교 자택으로 통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거한(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그 날 오후에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 고 외치면서 영토 확장 목적의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이 대성당을 몰수,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때에 대성당과 연결되어 있는 총대주교 자택의 통로는 파괴되고 대성당 내부는 십자가가 떼어지고 성화(이콘)는 석회칠로 덮어지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메라브가 더해졌다. 그 후, 네 개의 미나렛(첨탑)이 증축되어 교회내에는 민발로 불리는 설교 단상도 장착되었다. 아야 소피아 자미로 불리게 된 이 정교회 대성당은 토프카프 궁전 쪽에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매주 금요일 예배마다 방문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1923년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터키 정부는 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개조해 그 안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 비잔티움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에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은 제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였고 로마 황제를 직계한 황제가 다스렸다. 이 나라는 ‘로마 제국’으로 불렸으며, 제국 주민과 주변 나라 사람들은 ‘로마니아’(Ῥωμανία)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마 제국과 달리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주로 현대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갈라져나온 정확한 시점을 잡을 수는 없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로스 해협의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 혹은 ‘새로운 로마’)으로 천도한 서기 324년이 중요한 분수령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서기 306년경부터 1453년까지 천 년 넘게 존속했다. 이 나라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으며,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옛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는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아랍 등 외적의 침략을 받아 영토를 잃기도 했으나, 10세기 말 마케도니아 황조 시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동지중해의 패권국이 되어 파티마 왕조와 대결했다. 그러나 1071년 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셀주크 튀르크 세력에게 잃는다.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죽은 뒤 제국은 다시 쇠퇴기로 접어든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제국 영토가 비잔티움 그리스인과 라틴인의 각축장이 되면서 제국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1261년에 팔라이올로고스 황조가 수도를 수복하고 제국을 제건했으나, 14세기의 내전으로 비잔티움은 국력을 소진했다. 결국 15세기에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
* 오스만제국* 오토만 제국이라고도 함. 14세기 비잔틴 제국의 쇠퇴로부터 1922년 터키 공화국이 건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던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족이 세운 제국. 비시니아의 아미르였던 오스만(아랍어로는 '⁽Uthmān')의 이름을 딴 명칭이다. 그는 1300년경 인근 지역을 정복하면서 왕조를 창건했다. 오스만 제국사의 제1기인 1300~1481년은 전쟁과 동맹, 그리고 영토의 현장 매입에 의한 거의 끊임없는 팽창의 시기였다. 오스만과 그의 계승자들인 오르한(1324~60 재위), 무라드 1세(1360~89), 바예지드 1세(1389~1402) 아래 아나톨리아의 거의 전역이 정복되었다. 비잔틴 제국 내의 여러 분파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1346년경 유럽에 발판을 마련했다. 즉 갈리폴리로부터 트라키아·마케도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 등으로 진출했다. 1389년 코소보에서 무라드는 발칸 동맹군을 무찌르고 이 지역에 대한 오스만의 지배를 확립했다. 바예지드는 오스만의 지배를 더욱 강화했고, 카이로의 칼리프에게서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오스만 세력의 급속한 성장은 타타르의 지도자 티무르의 주의를 끌게 되었고, 그는 인도를 정복하다가 서쪽 측면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1402년 앙카라에서 오스만 군대를 무찔렀다(코소보 전투) 티무르는 오자마자 곧 떠나갔지만, 여러 해가 지나서야 오스만인들은 그들의 정복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바예지드의 네 아들 가운데 메메드(무하마드) 1세는 1413년에 술탄으로 부상했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인 무라드 2세(1421~51), 메메드 2세(1451~81) 아래서 제국은 도나우 강 이남의 유럽에 대한 지배를 거듭 주장하고, 1444년 바르나에서 십자군을 패퇴시켰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고, 그뒤 몇 해 안에 모레아·트레비존드·보스니아·알바니아·크리미아 및 다른 지역들이 정복되거나 합병되었다. 오스만인들이 발전시킨 많은 독특한 군사와 행정 제도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의 하나가 발칸 지역 출신 그리스도교 젊은이들을 징집해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 평생 복무시킨 데브시르메 제도였다. 데브시르메 제도로 충원된 군대는 술탄을 호위하는 보병대인 정예병단이었는데 그 이름은 예니체리라 했다. 메메드 2세는 정부와 군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투르크족이든 발칸족이든, 이슬람교도이든 비이슬람교도이든 간에 술탄의 개인 노예의 지위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제도를 발전시켰다. 그는 이러한 조처로 전 지배계급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고, 권력의 분산을 확실하게 막기를 희망했다. 셀림 1세(1512~20) 때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 재개되었다. 1516~17년 맘루크인들을 격퇴함으로써, 그는 일격에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알제리 등을 통합해 제국의 영토를 2배로 늘렸다. 그의 아들 쉴레이만 1세(1520~66)의 통치기간은 오스만의 힘과 위엄에 있어 황금기였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헝가리를 빼앗고, 트리폴리를 병합하고 남동쪽으로 제국을 확장하여 메소포타미아에서 페르시아 만에 이르렀고, 오스만 해군은 동부 지중해에서 제해권을 확립했다. 쉴레이만의 통치가 끝나자 오스만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무라드 3세(1574~95) 때 카프카스를 정복하고 이란에서 아제르바이잔을 빼앗는 등 한동안 영토 확장이 계속되었지만 행정적·사회적 쇠퇴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쉴레이만 이후 제국의 쇠퇴는 그의 뒤를 이었던 술탄들의 무능함, 데브시르메 계급의 세력 신장, 그로 인한 지배계급 내부의 긴장, 오스만 산업의 침체, 항해술 발달에의 오스만 지배 무역로의 쇠퇴, 급작스런 인구 팽창과 그에 따른 도시 중심지의 쇠퇴 등이 그 원인이었다. 17세기에 개혁은 너무 미약하고 협소해 쇠퇴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반면 이 시기에 유럽에서 흥기한 강력한 민족국가들은 동맹을 맺어 유럽 대륙에서 오스만을 몰아내고자 했다. 18세기에 쇠퇴는 가속화하여 농촌행정조직이 소규모의 봉건국가들로 해체되어가고, 식량조달의 혼란과 광범위한 기근으로 도시에서는 불안이 증대되었다. 유럽 번영의 기초가 되었던 기술혁신은 거의 오스만 제국으로 이전되지 않았다. 18세기초에 몇몇 귀족들이 서구풍을 받아들였고(튤립 시대), 18세기 후반에 셀림 2세는 정부 조직을 근대화하려 했다. 그러나 1807년 무스타파 4세가 이끈 반동적 반란에 의해 오스만 제국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1808년 마무드 2세가 즉위했을 때 오스만 제국은 절망적인 상태였다. 제국이 영국·러시아 양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지방 정부가 공공연하게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다음 몇 십 년 동안 마무드 2세는 군대를 근대화하고, 정부를 재조직하여 어느 정도 질서를 되찾았으나 제국의 국경은 계속 줄어들었다. 마무드의 아들들인 아브뒬메지드 1세와 아브뒬하지즈는 '탄지마트라고 하는 일련의 자유주의적이고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서방 세계에서는 이것을 대체로 유럽 국가들과 우호관계를 증진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았다. 그 개혁 중에는 최초의 종합교육제도와 상법·해양법·형법전의 서구화 등이 있었다. 권력의 집중으로 황제권에 대한 모든 방해물이 제거되었지만, 1876년 아브뒬하미드 2세는 다른 어떤 이슬람 국가들보다 먼저 헌법을 두는 데 동의했다. 2년 뒤 산스테파노 조약과 베를린 회의의 협정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루마니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불가리아·키프로스 그리고 다른 영토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브뒬하미드는 유럽인들에게, 투르크인들은 자기들의 국경 내에서 제국을 보존하면서 평화를 유지할 것임을 환기시킴으로써 19세기의 남은 기간 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말년은 반란들로 점철되었는데, 특히 1908년 청년 투르크당 반란이 유명했다. 1912~13년의 발칸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파국적인 패배와 바로 이어졌던 혁명으로, 36대이자 마지막 오스만 제국 황제인 메메드 6세 와히데딘이 1922년 권좌에서 밀려나고 근대 터키가 건립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