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교회
빌립보교회(상)와 사도바울의 이름이 모자이크된 교회바닥.(하)
마게도냐 동쪽의 번영했던 성읍이었는데, 오늘날은 휠리베드직(Filibedjik, `작은 빌립보'란 뜻)이라 불리우는 고지(古址)를 남기고 있는데 불과하다. 네압볼리에서 서북쪽으로 20㎞의 내륙에 있으며, 그 사이에는 숨볼론 산(Mt. Symbolon)을 넘어 달리는 에그나티아(Eghatia)가 도로로서 연결되고 있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때 일행과같이 네압볼리에서 빌립보로 간 것은 이 에그나티아 가도였다(행 16:11,12). 구릉 꼭대기부근의 오르고 내리는 몇 군데에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돌로 포장된 고대의 도로가 남아 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밟아 닦아진 흔적이 보인다. 바울 일행이 도보로 네압볼리스에서 빌립보에 가는데는 족히 하루가 걸렸을 것이다.빌립보는 팡가에우스 산(Mt. Pangaeus, 오늘날의 Pangaion Oros, 표고 1,957m)의 동북쪽에 발달한 평원의 위치하며, 강기테스 강(River Gangites)의 저지를 굽어보는 구릉에 세워져이전에는 적어도 BC 7세기 이후 크레니데스(Krenides,Krhnivde")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구릉촌 부근에 많은 샘(krhvnh)이 있었기 때문이다. BC 358년 마게도냐 왕 필립포스 Ⅱ세(Philippos Ⅱ, BC 359-336 재위)가 점령 확장하여 자기의 이름을 따라 성읍을 `빌립보'라고 불렀다. 그는 성벽을 두르고 요해를 견고히 하였는데, 그 일부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나 기타 지점에서 발견된다. 비잔틴 시대의 성벽을 포함하여전장이 3.5㎞에 달하며, 가역(街域)은 장방형이고 그 면적은 80ha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었다. 성읍 서쪽의 팡가예우스 산은 금 산지로서 유명하여(바울 시대에는 폐광) 빌립 Ⅱ세는연산 1,000달란트(34t)의 금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금화를 주조(鑄造)하였다.BC 168년, 파울루스(L. Aemillus Paullus)의 지휘하에 로마군이 마게도냐 최후의 왕 페루세우스(Perseus)를 격파하여 그의 국토를 점령하여 BC 167년 그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위하여 마게도냐를 네 지구로 분할하였다. 빌립보는 이들 네 지구(districts) 중 제 1지구에위치했으며, 그 도성은 암비볼리였다. BC 146년, 로마는 이들 네 지구를 통합하여 `속주 마게도냐'(the province of Macedonia)로 하고, 데살로니가를 그 도성으로 하였다.BC 42년, 이 부근의 평원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브루타스와 카시우스의군대를 격파하여 빌립보는 일약 유명하게 되었다. BC 31년, 옥타비아누스(아구스도)가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하여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는 앞서 거기서 거둔 승리를 생각하여 빌립보를 로마 식민시의 위계(位階)로 높이고 이에Colonia Augusta Julia Victrix Philippensium라는 칭호를 주었다. 이것은 이태리 시민권(jus Italicum)의 특권(면세와 자유 포함)을 수반하고 로마 군대의 퇴역 군인에게 호적한 식민지로 되었다. 수비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인구의 절반은 로마계이고 나머지 절반은 마게도냐계, 그리고 거기에 소수의 유대의 식민이 섞여 있었다. 빌립보는 군사상, 통상상 중요한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 지방의 도성 암비볼리를 앞질러 마게도냐의 이 지방에서 제일가는 성읍이라고 하였다(행 16:12).빌립보에는 디아스포라(Diaspora,diasporav, 유대인으로서 팔레스틴 이외의 땅에 이주한 자)의 유대인은 소수였던 듯하며, 그들은 이 땅에서는회당을 가질 정도까지는 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성읍 서쪽을 흐르는 강기테스 강가에 `기도처'를 설치하고 집회를 하였다. 바울은 안식일에 거기서 복음을 전하여 개종자를 얻었다(행16:13-15).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일로 해서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도공중 질서 문란죄로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고 투옥되었다. 이때 간수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행 16:16-40). 제 3차 전도여행 때는 오고 갈 때 바울은 빌립보를 방문하였다(행 20:1-6). 빌립보의 고지(古地)는 1914-1938년사이에 아덴의 프랑스학원('Ecole Francaise d'Athenes)이 발굴하였다. 성벽 북우(北隅)를 이루고 있던 구정(丘頂)의 일각은 아크로폴리스에게 점령되어있었다. 도성의 동쪽에 있는 네압볼리문(Neapolis Gate)에서 서쪽으로 성읍 중앙을 에그나티아 가도가 뻗어 있다. 성읍의 대략 중앙가도의 남쪽에 연하여 포람(Forum)이 설치되어 있었다. 길이 100m, 폭 50m의 광장이 있었는데, 서쪽의 곡물 점포, 동쪽의 도서관 등 여러 조영물(造營物)을 포함하면 길이 148m, 폭 70m의 광대한 지역으로 된다. 이들 조영물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2세기 말) 시대의 것인데, 그것은 이전의 더 간소한포람이 있던 장소에 틀림없다. 아마 바울은 이 본래의 간소한 포람을 실제로 보았을 것이다.포람의 북쪽에는 양쪽으로부터 4단의 단계를 거쳐 올라가게 되어 있는 법정의 좌(座,Bh'ma)가 있었다. 이 법정의 좌는 조기(早期) 포람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것인데, 바울과 실라는 여기서 재판을 받았을 것이다(행 16:19-).포람의 남쪽에 접하여 체육장(palaestra, 73×57m)이 있고, 거기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져공중 변소(lavatory)가 있었다. 이것은 로마식 변소인데, 42실(室)로 되어 있으며, 돌 좌석이달려 있고, 아래는 수세(水洗)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체육장에는 로마식 목욕탕이 달려 있는데, 그것은 AD 3-4세기의 축조였다. 포람의 동북쪽 150m쯤 되는 구릉의 중복에는 헬라식의 커다란 야외극장이 있으며, 5만의 관객이 수용되었다. 이것은 빌립 Ⅱ세가 경영한 것인데, 지하도는 구경거리로 할 동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그나티아가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단구교회'(段丘敎會, Church of the Terrace)는 AD 500년 경의 조영인데, `바울의 교회'(Church of St. Paul)라 불리운다. 반원형의 아름다운 돌단을 거쳐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이 돌단이 우측에 지하실이 있으며, 그것은 `바울의 감옥'이라고불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