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山芝 散文房 ]

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 - 1

高 山 芝 2014. 9. 10. 20:24

[ 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 ]

                                    - 한국문인협회 역사기행 -

                                                                          高    山  芝 시인

子曰 十而 耳順이요 七十而 從心所欲 不踰距라 하였다. 그러나 한갑자가

지난지 십여년이지만 아직까지도 듣는 귀가 순해지지 못한 혈기방장한 33인의 문인들이 마음가는대로 광복을 위하여,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말달리던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남방항공에 몸을 실었다.  한쪽 언저리가 허무러진 하얀 달이 기울기에 따라 은익(銀翼)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솟구치곤 하였다

 

흑용강성의 성도인 하얼빈은 만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러시아인들이 중둥(中東)철도를 건설하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1904년에 완공된 이 노선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의 동쪽 지점에서 시작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극동의 러시아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주고 있다. 하얼빈은 러일전쟁(1904~05) 동안 러시아의 군사작전기지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일시적으로 중국과 일본이 공동 관리를 하기도 한 하얼빈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러시아를 떠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한때는 소련 밖의 도시 가운데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었다. 일본이 만주국(1932~45)을 지배하던 시기에는 하얼빈은 빈장(濱江)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1945년 소련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으며, 1년 뒤에는 중국공산군이 이곳에서 만주 정복작전을 지휘하였던 유서 깊은 도시가 바로 하얼빈이다.

 

하얼빈역 근처에 있는 곤륜호텔에 여장을 푼 33인의 문사(文士), 설레임 때문에 잠을 설친 나는 이삼헌시인을 깨워서 식사 전 산책을 나섰다. 일찍 잠이 깬 도시는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부산하고 이들이 만들어낸 역동성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강을 건너고 있는 모습 그 자체였다. 개관시간에 맞추어서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찾았다. 하지만 김을동의원 등 제69회 광복절행사를 하기 위해 온 국회의원일행이 개관시간 전부터 입장하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2014219일 개관한 하얼빈역에 위치한 안중근의사 기념관에는 안중근의사의 사적진열실과 이또 히로부미 저격지점 표기 등이 포함되었으며 하얼빈시 정부와 철도부문에서 출자하여 건설되였고, 하얼빈시 관련부문과 철도국에서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안중근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94년 갑오전쟁이후 일본이 조선반도를 침략하여 합병을 강행하자, 안중근의사는 학교를 설립하여 애국문화계몽운동을 벌렸으며 후에는 필()을 버리고 중국 동북지구와 러시아 극동지구에서 반일항쟁을 전개한다. 190910,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였다가 이듬해 3월 려순감옥에서 일본점령당국에 의하여 사형에 처해진다. 재판장에서 밝힌 안중근 의사의 당당함은 지금도 우리를 숙연케 한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 하나.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 5조약(을사늑약)7조약(한일신협약)을 강제로 맺은 죄.

     . 무고한 한국인을 확살한 죄.

  다섯.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여섯. 철도,광산,산림,천택을 강탈한 죄.

  일곱. 제일은행권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여덟. 군대를 해산시킨 죄.

  아홉. 교육을 방해한 죄.

      .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한 죄.

열하나. 교과서를 압수하고 불태워버린 죄.

    열둘.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한다고 세계 만방에 거짓말을 퍼트린 죄.

   열셋. 현제 한국과 일본사이에 경쟁이 쉬지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 처럼 천황을 속인 죄.

   열넷. 동양평화를 깨트린 죄.

열다섯. 일본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 15가지 죄목을 들면서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중장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서 나아가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라고 반론했던 안중근 의사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관람내내 나의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가정과 교육과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안중근 의사의 권위를 뒤로하고 731부대를 찾았다.

 

 

관동군 소속의 비밀 생물학전 연구 및 개발 기관으로, 중국 흑용강성 하얼빈에 있던 731부대는 1932년에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관동군 방역급수부', '동향부대'로 불리다가 '731부대'로 개명된다. 중일 전쟁(1937~1945)을 거쳐 1945년까지 생물·화학 무기의 개발 및 치명적인 생체 실험을 행한 악명 높은 부대가 731부대이다. 공식적으로는 ‘헌병대 정치부 및 전염병 예방 연구소’, '방역과 급수에 대한 임무'로 알려졌으며 실제로 부대장인 '이시이 시로'731부대의 진짜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원래는 태평양전쟁 전 정치 및 이념 부서로 설립되어 적에 대한 사상, 정치적 선전과 일본군의 사상 무장이 부대의 주 임무였다. 세균학박사였던 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의 중장은 1930년 초 유럽을 시찰하던 중 세균전의 효용성을 깨닫고 예하부대에 바이러스, 곤충, 페스트, 콜레라. 동상.등 생물학무기를 연구하는 17개의 연구반을 두고 각각의 연구반 마다 마루타 인간을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하였다. 부대장의 이름을 빌려서  이시이 부대(石井部隊)라고도 부르는 731 부대는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이며, 히로히토의 막내 동생이 그 부대의 장교(고등관)로 복무하였다. 1940년 이후 해마다 600명 이상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되었고 수많은 한국인, 중국인, 몽골인, 러시아인들을 희생시킨 부대가 731 부대다. 안내를 맡은 이건씨는 남경대학살에서는 30만명의 무고한 양민이 희생되었지만 731부대의 희생자는 40만에 이른다면서 언성을 높였다. 아우슈비치의 유대인들은 가스실에서 한 순간 죽어갔지만, 죽고싶어도 죽을 수 없었는 731부대의 생체실험 마루타의 흔적을 돌아보면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본군의 천인공노한 만행에 치가 떨렸다. 의병 중장 안중근은 평화를 위하여, 대의를 위하여 이또를 사살하였지만, 야욕을 위하여 탐욕을 위하여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본군 중장 이시이의 잔혹함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관람을 끝내고 돌아나오는 길목에 진열된 731부대 참상 사진들이 또 한번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1947년 미 육군 조사관이 도쿄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36년부터 1943년까지 731 부대가 만든 인체의 표본은 페스트 246, 콜레라 135, 유행성출혈열 101종 등 수백 종에 이른다. 생체실험의 내용은 세균실험 및 생체해부실험 등과 동상연구를 위한 생체냉동실험, 생체원심분리실험 및 진공실험, 신경실험, 생체총기관통실험. 가스실험 등이 있었다. 19401027일에는 남경(南京)1644 세균전 부대와 함께 절강성(浙江省) 령파()시에 페스트균을 대량살포 100여명 이상의 양민을 살해하였고, 1941년 봄에는 호남성(湖南省)에 페스트벼룩을 공중 살포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희생된다. 특히 작전을 수행하던 일본군도 사단병력이 감염된 사례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최근 731 부대 장교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문서가 일본의 한 대학에서 발견됨으로 일본군의 세균전 및 생체실험 상황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페스트균을 배양하여서 길림성(吉林省) 농안(農安)시과 장춘(長春)시에 고의로  퍼뜨린 후 감염경로와 증세를 관찰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있으며, 이로 인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죽었다고 밝히고 있다. 종전 후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세균전 결과를 미군에 넘겨주는 조건부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않았고 면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정부가 일본의 전쟁범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731 부대 시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등록 추진을 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