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 - 10 * 한국문인협회의 역사기행

高 山 芝 2014. 11. 17. 11:12

[ 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 - 10 ]

                                                - 한국문인협회의 역사기행 -

                                                                             高 山 芝 시인

북방민족(흉노.몽골)의 침입을 막고자 쌓은 만리장성의 동단 끝이 호산산성이라면서 고구려의 성 박작성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기억하면서 고구려가 당나라의 친입을 대비하여 쌓은 천리장성의 끝 자락인 발해만의 비사성(卑沙城)을 보기 위하여 대련을 찾았다. 631년(영류왕 14) 당나라 사신 장손사(長孫師)가 고구려에 와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 : 고구려 때 전사자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장사 지내고 그들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합동 분묘 비)을 헐어버린 사건이 발생하자 고구려는 장차 당나라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 해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동북쪽으로는 부여성(扶餘城 : 지금의 農安)에서 서남쪽으로는 발해만의 비사성(卑沙城 : 지금의 大連)에 이르기까지 1,000리에 걸친 장성으로, 16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되어 647년에 완성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주청(奏請)으로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고 했으나, “삼국사기에는 영류왕의 명으로 연개소문이 642년 1월부터 그 공사를 감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련(大連)의 대흑산(大黑山)에 있는 고구려 때의 산성인 비사성은 한자로 卑沙城 외에 卑奢城 또는 필사성(畢奢城) 등으로도 쓴다. 중국은 대흑산(663.1m)에 있는 산성이라는 뜻에서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으로 부른다. 고구려가 수(隋)·당(唐)과 전쟁을 할 때 적군의 침략을 막는 최전선 산성 역할을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만 서문(西門)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나라 양제(煬帝)가 614년(영양왕 25) 7월(음력) 마지막으로 고구려를 침공할 때 비사성까지 진격했으나, 고구려군은 하나뿐인 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해 수나라군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수나라는 건국한 지 40년 만에 멸망하였다. 645년 4월에 당나라는 4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수로군으로 비사성을 공격하여 함락되었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하여 대흑산 주위에 새로 성벽을 쌓았지만 고증을 하지 않아 고구려의 축성법과는 전혀 다른 성벽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1~2m 높이의 고구려 때 성벽이 일부만 남아 있다는 비사성을 차창으로 구경한 후 관동군사령부를 찾았다.

 

중국과 소련을 침략할 목적으로 1906~45년에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하고 있던 관동군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인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관동주(關東州)를 만들어 관동도독부를 두고 관동주와 남만주철도의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였다. 이후 관동도독부는 폐지되었고 그 밑에 있던 육군부가 독립하여 관동군사령부가 되었다. 관동군은 일본 군국주의의 중국 침략의 첨병이 되어 장작림(張作霖) 폭살사건(1928), 만주사변(1931) 등을 일으켰고, 1932년 일본의 꼭두각시인 만주국을 설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1932년부터는 관동군사령관이 주만(駐滿) 대사를 겸하면서 중국 동북지방 전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여순감옥의 관람권이 오후 3시30분에는 마감된다면서 서두르는 가이드 이건씨. 1902년 러시아가 동북 3성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여순을 점령하게 된 후 1907년 현재 형태의 규모로 확장된 여순감옥은 총 면적은 약 26,000㎡로, 275개의 여러 형태 감방이 있으며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담장으로 구역이 나뉘어 젔는데, 담장 안에는 수색실· 고문실· 사형집행실· 15개의 공장 등이 있고 담장 밖에는 강제노동소인 벽돌 공장과 과수원, 채마밭 등이 있었다. 건물의 외형은 큰대(大)자 형으로 방사형 구조이다.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마다 복도를 따라 감방이 나란히 나열, 복도 중간부분에는 간수들의 감시 및 투광, 상하층의 공기소통 역할을 하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많이 수감되었고, 1906~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이곳에 수감하여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수많은 수감자들이 형무소 안에서 처형당했다. 1909년 러시아 하얼빈역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사가 수감되어 순국한 곳이며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하였다. 1945년 8월 소련 붉은 군대가 여순에 주둔하면서 사용이 중지되었다, 그후 1971년 복원을 통해 전시관으로 꾸며져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으며 1988년 중국 정부는 이곳을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였다.

 

1910년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는 관동군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처형되기 직전 남긴 안중근 의사의 유언은 지금도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한다.

 

“내가 조선의 독립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업, 공업, 상업 등 실업을 일으켜, 나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의 자유 독립을 되찾으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안의사 순국후에도 간도지역 독립독립투사의 뒷바라지 하다가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로 건너간다. 임시정부에서 임정 요인들 간의 의견충돌이나 갈등이 생기면 이를 해결해주는 조정자 역할을 하여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은 조마리아여사를 보고서 "범이 범을 낳았다."는 평가를 하였다.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상해에서 지병(폐결핵으로 추정됨)으로 순국, 상해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그 이후 관리 부실과 무관심으로 유택 자체가 없어저 버렸다. 현재는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어 찾을 길이 없다. 안의사의 아들 분도(베네딕트)는 불과 7살의 나이에 일본 밀정에 의해 독살되었다. 어머니, 안중근의사, 아들 분도까지 3대가 나라를 위해 순국한 안중근의사의 유해도 나무통에 구겨저서 여순 사형수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아직까지 찾지못하고 있다.

 

안중근의사가 순국한지 104년, 주권을 찾은지 69년이 지났지만 “나의 뼈를 고국에 옮겨달라”는 안의사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불민한 후손으로서의 자괴감. 지난 봄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라는 책을 출간한 안태근교수와 김월배교수, “‘국민에게 나라를 위한 희생을 국가가 기억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라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와 관련 자료를 찾아야한다”며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아서 그분의 고귀한 희생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안의사의 후손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고귀한 사명이다“는 김교수의 음성이 이명이 되어 남방항공을 타고 돌아오는 내내 맴돌았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함께 어우러저 꿈을 꿀 수 있도록 깨닫는 자가 먼저 장을 펼처야한다는 다짐과 함께 아쉬움 속에서 5박6일간의 역사기행을 끝냈다.

 

                                                      - 주간한국문학신문 2014년 11월 12일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