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백
권세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백 / 중국상하오천년
현종은 말년에 젊고 예쁜 양귀비를 총애하면서 양귀비의 친척들에게 높은 관직을 주었다. 현종과 양귀비는 매일 궁전에서 먹고 마시며 향락을 즐겼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궁전에서 전해 내려오는 노래에 싫증을 느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새로운 가사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하게 했는데 하지장(賀知章)이 이백(李白)을 천거했다.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또는 적선인(謫仙人)이다. 조상은 농서(隴西) 성기(成紀) 사람이며, 서량의 무소왕(武昭王) 이고(李暠)의 후손이다. 이백은 서역 쇄엽성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다섯 살 때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머나먼 내지로 들어와 금주(錦州) 창륭현(昌隆縣, 사천성 강유현) 청렴향(淸廉鄕, 다른 설에 따르면 청련향(淸蓮鄕))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이백이 어렸을 때부터 엄하게 가르쳤다. 이백은 다섯 살 때 육갑(六甲)을 외웠고, 열 살 때 제자백가를 통독했으며 불경과 도가의 책들을 읽었다. 스무 살을 전후로 촉(蜀)의 명소들을 유람하고 「등금성경화루(登錦城敬花樓)」, 「백두음(白頭吟)」, 「등아미산(登峨眉山)」 등의 명시들을 써냈다. 수려하고 웅위로운 산천은 이백의 시야를 넓혀주었고 흉금도 넓혀주었다. 그리고 이백으로 하여금 호탕한 성격과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니게 했다. 이백은 여느 위인들처럼 역사에 남는 원대한 일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당대의 선비들이 모두 선망하는, 과거시험을 통해 벼슬에 오르는 길은 택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학문과 덕성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
이런 삶의 지표를 가지고 있던 그는 고향에 있을 때부터 ‘제후들을 방문’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촉을 떠나서 10여 년 동안 중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비록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동안 그의 시는 날로 성숙해졌다. 이백은 그동안의 사회 경험과 생활의 어려움을 통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인심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이백은 불후의 시를 많이 썼으며 이로 인하여 그의 이름은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대의 이름 있는 시인이자 요직에 있던 하지장은 현종이 궁전 시가를 새로 지을 사람을 물색하자 이백을 추천했다. 그는 이백의 문학적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며 나라를 위하는 이백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가에 관한 상주서를 올렸다. 인재를 아주 귀히 여기던 현종은 이백의 시 재능에 탄복해 하며 즉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724년, 현종의 부름을 받은 이백은 10년 동안 바라던 소원이 드디어 성취되었다며 흥분해 있었다. 그는 “내 어찌 쑥밭에만 묻혀 있는 사람이리, 오늘 호탕하게 웃으며 집을 나서노라.” 하고 시를 읊으면서 현종을 만나러 궁으로 들어갔다.
이백을 보자마자 그의 비범한 기상에 놀란 현종은 자신도 모르게 용상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내시를 시켜 이백에게 자리를 권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현종은 이백이 명실상부한 천재적 시인임을 또 한 번 느꼈다. “짐은 선생의 시를 많이 읽어 보았소만 오늘 이렇게 면대하여 말을 들어보니 과연 선생의 사람됨도 시와 같음을 알겠소.” 현종은 즉시 이백을 한림원에 등용했다. 현종의 신임을 얻은 이백의 기쁨이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백은 술을 무척 즐겼다. 그는 짬만 있으면 친구들과 더불어 야외로 나가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백과 최종 등을 비롯한 여덟 사람을 ‘취중팔선(醉中八仙)’이라고 불렀다. 이백은 또 혼자서 거리의 술집을 찾아가 흠뻑 취하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
시간이 오래되자 이백은 현종이 자신을 더 이상 등용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백은 원래 지니고 있던 열의가 식어버리자 집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고, 현종도 마침 잘되었다며 이백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이백이 떠날 때 금패를 하사했는데, 그 금패가 있으면 어디를 가든 관원들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장안을 떠난 이백은 또다시 자유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라의 명산대천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감명 깊은 시를 수없이 써 내려갔다. 이백은 예순둘의 나이로 친척 이양빙(李陽氷)의 집에서 병사했다. 이백이 나라의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있을 때 당나라는 더욱 부패해지고 중원 지역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