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詩歌)의 흥성과 발전 / 출처 - 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시가(詩歌)의 흥성과 발전
한대(漢代)에 이르러 중국의 시에 새로운 변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중국의 시는 『시경』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네 글자로 이루어진 행(行)' 네 개가 모여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4언체를 계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써는날로 풍부해져 가는 사상적 내용과 복잡한 생활감정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게 되었다. 민간 가요의 영향으로 후한(後漢) 때에 이르러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행' 네 개가 모여 한편의 시를 구성하는 5언체 시가 등장해 크게 유행했다. 하지만, 이들 시는 주로 문인 귀족들에 의해 창작되었던 데 반해 민간에서는 또 다른 형식의 시가 유행했다.
즉, 문인시와는 별도로 한대의 시단에 활기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다름 아닌 민간의 악부가사(樂府歌辭)였다. 당시 음악을 관장하던 악부(樂府)라는 관청에서 민간에서 유행하는 노래 가사를 채집해 책으로 엮었기 때문에 '악부시'라고도 불렸다. 이 시들은 문인들의 시처럼 글자수의 제한이 심한 정형시가 아니라 글자수는 물론 어휘 사용에 있어서도 대단히 자유로운 민가풍의 자유시였다. 악부시는 하층 민중들의 진실한 생활 체험에서 나온 내용을 담고 있어, 질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우며 진한 생활의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악부시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를 들 수 있다.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를 길지만 매우 곡진하게 서술하고 있는 「공작동남비」는 한대 악부가사 중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이 시는 과감하면서도 부드러운 서술을 통해 개성 있는 등장인물들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명나라의 왕세정(王世貞)이 이를 두고 '장편시의 절정'이라고 극찬했을 만큼 「공작동남비」는 중국문학사상 가장 빼어난 민간 서사시로 일컬어지고 있다.
후한의 마지막 임금, 헌제(獻帝) 유협(劉協) 때인 건안(建安, 196~220) 시기에 이르러 황건적(黃巾賊)의 난으로 인해 국운이 기울어가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하였고, 이는 시인들의 정신세계에 심각한동요를 일으켰다. 당시의 시인들은 강렬한 사회 참여의식과 사명감, 개인의 생명과 정신적 가치에 대한 존중, 전란을 체험하면서 느낀 격정 등을 그들의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 대표적인 시인들로 조(曹)씨 삼부자인 조조(曹操, 155~220), 조비(曹丕, 187~226), 조식(曹植, 192~232)의 '3조(三曹)'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술을 앞에 두고 노래를 부른다네."라는 구절에서처럼 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상황으로부터 시작해, 인생에 대한 엄숙한 철학적 사색을 보여주는 「단가행(短歌行)」의 조조가 그 대표 주자이다. 그의 아들인 조비의 「연가행(燕歌行)」은 현존하는 최초의 완전한 7언시로도 잘 알려져있고, 그의 동생 조식 역시 「백마편(白馬篇)」, 「명도편(名都篇)」, 「공후인(箜篌引)」 등의 작품에서 유한한 인생에 대한 고뇌와 불후의 공적을 세우고자 하는 갈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이어, 위(魏)·진(晉) 정권 교체기였던 정시(正始, 240~249) 연간은 사마(司馬)씨 일족과 위나라 조(曹)씨 일족 간의 권력 투쟁으로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문인들 사이에서는 현실정치에 나서서 자기 의사를 밝히기보다는 물러나 자연에 은거하는 풍조가 유행했다. 이 시기에 출현한 이들이 있었으니 이름 하여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한다.
이들은 이 시기의 혼란에 맞서 과감히 항거하거나 정치적으로 발언하기를 삼간채, 자연에 은거하며 술과 거문고에 취해 청담(淸談)이나 즐기며 지냈다. '죽림칠현'이란 이렇게 죽림에 은거하고 지낸 완적(阮籍), 혜강(嵆康), 산도(山濤), 상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 등의 일곱 현자를 일컫는 말이다. 개인주의나 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에 근거하고 있는 이들의 사상과 행동방식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파를 등지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선비들의 대명사가 되었다.
진대(晉代) 태강(太康, 280~289)에 이르자, '문체는 정시보다 화려하고, 문장의 기세는 건안보다 부드럽고도 연약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시풍이 점차 문단을 장악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작가는 화려하고 전아한 수사와 함께 대구(對句)를 맞추어 가지런한 글을 추구했고, 그 결과 시의 예술적 형식은 더욱 세련되어졌다. 이 시기 비교적 유명한 시인으로는 육기(陸機)와 반악(潘岳), 좌사(左思)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성취는 아무래도 산수전원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산수전원시에 있어서 최고의 성취를 이룬 이는 바로 도연명(陶淵明, 365~427)이다.
도연명은 자가 원량(元亮)이다. 이름이 잠(潛)이고 자가 연명(淵明)이라고도 한다. 좨주(祭酒)와 참군(參軍) 같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으나, 매번 오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다. 가난과 질병으로 찌든 만년에도 꼿꼿한 성품은 변하지 않았는데, 죽기 직전에도 당시의 강주(江州) 자사(刺史)인 단도제(檀道濟)가 보내온 쌀과 고기를 하찮다는 듯 팔을 휘저어 거부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도연명은 중국문학사에서 전원생활을 소재로 하여 가장 많은 창작을 남긴 시인이다. 그의 전원시에는 스스로 농사지으며 부지런하게 살았던 반평생 동안의 생활이 진실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시인의 소박한 생활 태도와 인생의 이상이 드러나 있다. 그의 대표적 산수전원시인 「전원으로 돌아온 삶(歸田園居)」은 일상적인 농촌생활과 전원적 풍경으로부터 생활의 내재적 아름다움을 발굴해내고, 이를 통해 순박하고 천진스러우며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이상적경지를 창조해 내고 있다.
집 둘레로 십여 마지기 밭 方宅十餘畝
여남은 칸의 초가지만 草屋八九間
뒤뜰엔 느릅나무 버드나무 처마를 드리우고 楡柳蔭後簷
앞뜰엔 복사꽃 오얏꽃 줄지어 섰네 桃李羅堂前
멀리 어슴푸레한 마을에 暖暖遠人村
모락모락 저녁연기 피어오르면 依依墟里煙
골목길 깊은 곳에선 삽살개 짖어대고 狗吠深巷中
뽕나무 위에선 수탉이 울부짖네 鷄鳴桑樹顚
「전원으로 돌아온 삶」
시 문학이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시기는 당(唐, 618~907) 왕조 300년이라 할 수 있다. 당 왕조가 건립되면서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에서 수(隋)에 이르는 분열과 혼란의 국면이 해소되었고, 또한 정치적 안정으로 인해 문화적으로도 가장 많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당 왕조 300년을 편의적으로 크게 네 개의 시대로 구분해 이야기한다.
건국 후 체제정비에 매진해 왕조의 틀을 형성했던 초당(初唐), 안정된 국가체제를 구축한 이후 발전과 번영을 누렸던 성당(盛唐), 각처에서 반란과 혼란이 발생하는 등 국가체제가 다소 흔들리긴 했으나 여전히 공고한 기반 위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한 중당(中唐), 전반적으로 국운이 기울어가는 만당(晩唐) 등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시기마다 그에 조응해 문학 장르가 변화하기도 하고, 새로운 문풍이 탄생하기도 했다. 시문학에 있어서 초당은 시의 형식을 정비했다는 점에서, 성당은 시의 내용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각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초당 시기에는 왕적(王績, 589?~644)을 비롯한 수대의 유신들이 중심이 되어 '유약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궁정(宮庭) 시풍이 유행했다. 이를 이어 등장한왕발(王勃, 650~676), 양형(楊炯, 650~693), 노조린(盧照鄰, 637?~689?), 낙빈왕(駱賓王, 640?~684) 등 이른바 '초당사걸(初唐四傑)'들은 육조(六朝)시대의 시풍을 계승 발전하면서도 소재의 범위를 넓히고 화려함과 소박함을 조화시킨 새로운 시풍을 이끌어냄으로써 진정한 당대 시풍을 열어 가고자 노력하였다.
당대 시문학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왕발과 양형, 특히 심전기(沈佺期, 656?~713?)와 송지문(宋之問, 656?~712?), 두심언(杜審言, 645?~708) 등에 이르러 마침내 5언 율시를 비롯해 7언 율시와 5언 절구들이 비로소 완숙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초당에서 성당으로 넘어가는 문학발전사의 길목에서 선대의 문학을 계승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작가로 진자앙(陳子昻, 661~702?)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초당 시기 문단에 만연하고 있던 '형식주의 문풍'에 불만을 느끼고, "문장의 도(道)가 끊어진 지 오백 년이나 되었도다(文章道弊五百年矣)."라고 지적하며, 문학작품에 사상과 풍격이 내재하는 '한위풍골(漢魏風骨)'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이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사에서 벗어나 성당 시문의 호방하고 힘있는 기풍을 형성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성당 시기에 이르자 정치적 안정이 공고해지며 국력이 강대해졌고, 이러한 배경 아래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자 하는 일군의 청년 작가들이 등장했다. 이 시기는 왕창령(王昌齡), 왕지환(王之渙)에서부터 변새파(邊塞派)로 지칭되는 고적(高適)과 잠삼(岑參), 그리고 당시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 올린 이백(李白, 701~762)과 두보(杜甫, 712~770)를 거쳐 산수전원시파의 왕유(王維, 701~761), 맹호연(孟浩然, 689~740) 등에 이르기까지 이채롭고 다양한 예술 풍격과 유파들이 속속 출현하였다. 여기서는 성당 시기의 대표 시인일 뿐만 아니라 중국 시 예술의 최고봉이라 칭해지는 이백과 두보에 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참고] 근체시
당대에 완성된 시 형식으로, 당대 이전의 시를 근체시와 구분해 고시(古詩) 또는 고체시(古體詩)라한다. 고시에 비해 엄격한 규칙을 지닌 정형시로, 한 구절에 사용하는 글자 수가 반드시 5자 혹은 7자여야 하며, 구절의 수도 절구는 4구, 율시는 8구, 배율은 12구 이상 짝수구로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5언절구, 7언절구, 5언율시, 7언율시, 5언배율, 7언배율로 나뉜다.
(1) 시선(詩仙) 이백(李白)
이백은 자가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두보와 함께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시인으로 꼽히는데, 세간에서는 시선 이백과 시성두보를 병칭해 이두(李杜)라고 불렀다. 이백은 일생 동안 1,1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특히 고시(古詩)와 절구(絶句)에 능해, 그의 절구는 '신품(神品)'으로 극찬받았고, 그의 시적 재주는 '하늘이 내린 재주(天才)'로 여겨졌다.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박진감이 있으며, 때때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그는 문풍이 매우 자유분방하여 생각나는 대로 휘갈겨 쓰는 듯한 천재형 시인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글자 한 구절의 조탁(彫琢)에 뼈를 깎는 고심을 기울인 두보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어느 날, 이백의 「촉으로 가는 길 어려워라(蜀道難)」라는 시를 읽은 선배시인 하지장(賀知章)은 그를 일컬어 '하늘에서 유배된 신선'이라 극찬해 마지않았다.
(전략)
그로부터 사만 팔천 년 동안 爾來四萬八千歲
진나라 땅으로 드나드는 길이 끊어졌다 不與秦塞通人煙
서쪽 태백산 너머 새는 날아 올라 西當太白有鳥道
아미산 꼭대기를 가로지를 수 있었을까? 可以橫絶峨眉巓
(중략)
땅이 꺼지고 산이 무너져, 장사도 죽어나가고서야 地崩山摧壯士死
절벽에 매달린 돌다리 이어지고 然後天梯石棧相鉤連
위로는 여섯 용이 끌던 해수레도
돌아섰던 높은 산 上有六龍回日之高標
아래는 암벽에 부딪히는 물결과
거꾸로 솟는 거센 물결 下有衝波逆折之回川
신선이 탔던 황학도 날아 넘지 못했고 黃鶴之飛尙不得過
원숭이의 재주로도 붙잡을 데조차 없다네 猿揉欲度愁攀援
푸른 때는 어찌 그리 반들반들한지 靑泥何盤盤
백 걸음에 아홉 번은
암벽 봉우리를 꺾어 돌아야 하네 百步九折縈巖巒
하늘의 삼성 별 어루만지고 정성 별 지나니,
가슴으로 숨을 쉬네 捫參歷井仰脅息
손으로 앞가슴 쓸며 주저앉아
장탄식 몰아 내뿜네 以手撫膺坐長嘆
(후략)
「촉으로 가는 길 어려워라」
악부가사의 제목을 차용하고 있는 이 시는 이처럼 7언 고풍을 기본 형식으로 하고 있다. '천 리 먼 길 촉 땅으로 가는 험난한 여행길'에 대해 신화나 전설과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자신만의 독특한 낭만적 상상력을 더해 묘사하고 있다. 마치 이 시를 읽는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깎아지른 암벽을 타고 촉 땅을 향해 가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백은 특히 7언고시를 많이 남겼다. 「양원음(梁園吟)」, 「양양가(襄陽歌)」, 「여산요(廬山謠)」, 「몽유천로음유별(夢游天姥吟留別)」 등이 모두 7언고시이다. 위의 시들은 산천의 풍물을 묘사하거나 인간사의 단면을 이야기하는 데도 사실적이고 진실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보고들은 이야기나 상상해서 지어낸 이야기들 모두가 하나같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2) 시성(詩聖) 두보(杜甫)
두보는 자가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이다. 그는 이백을 존경해 추종하는 한편 자기보다 열한 살이 많은 이백과 시우(詩友)로 지냈다. 중국 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시성'으로 일컬어지며, 약 1,500여 수에 달하는 그의 작품은 시로 쓴 역사와도 같다고 해서 '시사(詩史)'라 불리었다.
일생토록 말단 관직을 전전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다지 여유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 초당 율시의 대가인 두심언(杜審言)의 손자로 허난성(河南省)의 궁(巩)현에서 출생했다. 24세 때 진사 시험에 낙방한 후 부친을 따라 산둥(山东)으로 건너가 이백, 고적(高適) 등과 함께 자연을 즐기고 시를 읊으며 친교를 돈독히 했다. 746년에, 두보는 거처를 장안(長安)으로 옮겨와 고위 관리에게 벼슬을 구하는 간알시(干謁詩)를 써서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생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두보는 경제적으로 점점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졌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민중들의 궁핍한 삶 속에서 분노하기 시작했다.
당시, 현종(玄宗)이 후궁 양귀비(楊貴妃)와의 사랑에 빠져 정사를 나 몰라라 하는 상황에서 국운은 날로 쇠퇴해 갔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마침내 귀족들의 사치와 민중들의 궁핍한 처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안사(安史)의 난이 발발하고 말았다. 그는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묘사하면서 총체적인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했다.
그즈음, 두보는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받았으나 곧 반군 토벌에 실패한 방관(房琯)을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것은 곧 파직으로 이어졌다. 화주사공참군(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된 두보는 벼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진주(秦州) 행을 감행한다.
두보의 대표적 사회시로 알려진 이른바 「석호리(石壕吏)」,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의 '삼리(三吏)'와 「무가별(無家別)」,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의 '삼별(三別)'이 이즈음에 지어졌다. 이 시들은 전란에 의해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처절한 상황과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제 배 채우기에만 눈이 먼 탐관오리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말년에 그는 경제적 궁핍을 벗어나지 못하고 건강마저 악화되어, 악양(岳陽)과 담주(潭州)사이를 전전하다 마침내 뱃길에서 58세로 일생을 마쳤다. 아래에 그의 대표작 「중양절에 높이 올라(登高)」를 소개한다.
바람 세찬 높은 하늘 원숭이들 슬피 우나니 風急天高猿嘯哀
맑은 물가 흰 모래톱엔 물새들 빙빙 날고 있지 渚淸沙白鳥飛回
온 산에 낙엽은 우수수 소리 내며 떨어지고 無邊落木蕭蕭下
끝없는 장강 물줄기 출렁이며 흐르고 있네 不盡長江滾滾來
만리타향 슬픈 가을 맞이할 이는 외로운 객뿐 萬里悲秋常作客
오랫동안 병든 몸 홀로 누각에 오르네 百年多病獨登臺
간난과 외로움에 서리 낀 백발만 늘어 艱難苦恨繁霜鬢
쇠락한 이 몸 잡았던 술잔을 놓는다 潦倒新停濁酒杯
「중양절에 높이 올라」
중당에 들어서자 옛 악부 민가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내용과 문체에 있어서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시풍의 이른바 '신악부(新樂府)' 시인들이 등장했다. 원진(元稹), 백거이(白居易, 772~846), 이신(李紳) 등은 '옛 악부의 정신과 수법을 빌어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자'는 시 창작 운동을 주도했다. 이는 곧 백거이가 「신악부서(新樂府序)」에서 "창작은 임금, 신하, 백성, 사물, 사건 등을 위한 것이어야지, 문(文)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했던 바와 같았다. 즉, 그들은 "문학의 사회적 작용을 중시하여야 하며, 문학 자체를 위한 문학이 아니라 현실의 변화를 위한 문학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당시 문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만당에 이르러 시 예술 역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가장 걸출한 시인으로는 두목(杜牧, 803~852)과 이상은(李商隱, 811~859)을 들 수 있는데, 성당의 이백과 두보에 견주어 이들을 '소이두(小李杜)'라 불렀다. 만당 시풍은 유약하면서도 애상적으로 흘러 명작이 드물 뿐만 아니라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사(詞) 창작에 밀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채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