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문기행

燕王進南京 - 중국상하오천년사

高 山 芝 2015. 7. 13. 20:12

 권세가 높은 대신들을 여럿 죽인 태조는 스물넷이나 되는 황자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했다. 그렇게 하면 통치 기반이 튼튼해질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는 오산이었다. 오히려 이로 인하여 나중에 큰 변란이 일어났다. 태조가 예순이 되는 해에 태자 주표()가 죽자 주표의 아들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봉했다. 주윤문의 숙부들인 번왕들은 황위 계승권이 조카의 손에 들어가게 되자 모두 안 좋게 생각했다. 특히 태조의 넷째 아들인 연왕() 주체()는 전공을 여러 번 세웠기 때문에 주윤문을 얕잡아 보았다.

주윤문이 동궁에 있을 때 황자징()이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그는 글을 배우는 것을 도와주는 반독() 선생이었다. 어느 날 주윤문이 홀로 수심에 잠겨 동문 어귀에 앉아 있는 것을 본 황자징은 무슨 걱정이 있어 그렇게 앉아 있느냐고 물었다. “지금 몇몇 숙부들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장차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오?” 이에 황자징은 서한시대에 7국의 난을 평정한 일을 이야기하면서 주윤문을 위로했다. 그 말을 들은 주윤문은 비로소 안심을 했다.

황자징

황자징

1398년, 태조가 죽자 황태손 주윤문이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혜제()이다(역사상에서는 건문제()라고도 하며 건문은 연호이다). 그런데 당시에 경성에서 몇몇 번왕들이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겁이 난 건문제는 황자징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황자징은 건문제의 다른 심복 대신인 제태()를 찾아가 방법을 논의했다. 제태는 왕들 중에서 야심이 제일 많고 병력도 제일 강한 연왕부터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자징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연왕은 이미 방비를 다 해놓고 있기 때문에 그를 건드리면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연왕 주변의 번왕들부터 먼저 제거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건문제는 물론 이 계책을 받아들였다.

연왕은 일찍부터 은밀히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모반을 준비해 왔지만 건문제를 속이기 위해 미친 척을 하고 매일 허튼 소리를 했다. 그러나 황자징과 제태는 연왕이 미쳤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사람을 북평에 보내 연왕의 가족들을 잡아들이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평 도지휘사(使) 장신()에게 밀령을 내려 연왕을 나포하게 했다. 그런데 장신은 도리어 그 비밀을 연왕에게 고해 바쳤다.

영리한 연왕은 건문제가 법적으로 인정받는 황제이므로 공개적으로 반대하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왕은 건문제를 도와 간신 황자징과 제태를 제거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내란을 역사상에서는 ‘정난()의 변()’이라고 하며, ‘정난’은 위난을 평정한다는 뜻이다. 이 내란은 거의 3년 동안 지속되었다. 1402년, 연왕의 군대는 회북에서 조정의 남군()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는데, 일부 장수들은 퇴각을 주장했으나 연왕은 이를 일축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명령했다.

머지않아 연왕의 군대는 남군의 식량 수송로를 차단하고 기습을 가하여 남군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그러고는 응천부를 향해 파죽지세로 진군했다. 며칠 후에 응천부를 지키던 대장 이경륭()은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연왕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 안으로 들어갔을 때 궁궐에 화재가 일어났다. 연왕은 급히 병사들에게 명해 불을 껐지만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에 타죽은 뒤였으며 건문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니, 연왕이 도성으로 들어올 때 건문제가 궁궐에 불을 지르고 황후와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연왕 주체가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성조()이다. 1421년, 성조는 도읍을 북경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북경은 줄곧 명나라의 도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