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문기행

왕씨와 사마씨가 함께 천하를 다스리다(석두성의 前이름-건강성)

高 山 芝 2015. 7. 16. 18:38

왕씨와 사마씨가 함께 천하를 다스리다[ ]

                                        출처 / 국상하오천년사

유총이 장안을 함락한 후에도 진나라는 장강 이남의 절반이 남아 있었다. 민제는 포로가 되기 전에 건강(, 강소 남경시)에 있는 낭야왕() 사마예()로 하여금 황위를 계승하게 한다는 조서를 남겼다. 사마예는 서진 황족들 중에서 지위와 명망이 그리 높지 못했다. 회제가 있을 때 그를 보내어 건강을 지키게 했는데, 이때 그는 북방의 사족() 관원들을 데리고 갔다. 그중에서 가장 명망이 있는 사람이 왕도()였는데, 사마예는 그를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지기로 여기고 그의 말을 잘 따랐다.

왕도

왕도

사마예가 건강에 도착하자, 강남의 사대부 가문들과 큰 지주들은 그의 지위가 낮다고 얕잡아보면서 인사도 오지 않았다. 그러자 사마예는 왕도에게 방법을 강구해 보라고 했다. 왕도는 양주 자사 왕돈()을 불러다가 대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3월 3일이 되었는데, 이날은 백성과 관원들이 모두 강변에 나아가 ‘화를 막고 복을 비는’ 축제를 하는 계절()이었다. 이날 왕도는 사마예로 하여금 굉장히 화려한 가마를 타고 강변으로 가게 했다. 가마 앞에서는 어마어마한 의장대가 징을 울리며 길을 열었고, 가마 뒤에서는 왕도와 왕돈, 그리고 북방에서 온 관리들과 명사들이 하나같이 큰 준마들을 타고 뒤를 따랐다. 이렇게 굉장한 행차를 처음 보는 건강성 사람들은 모두들 매우 놀라워했다.

강남에서 이름난 사족 지주인 고영() 등도 이 소식을 듣고 구경하러 나왔다. 그들은 왕도와 왕돈 같은 명망 높은 사람들이 사마예를 그렇게 존중하고 있다는 걸 알고 크게 놀랐다. 그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그들은 길옆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때부터 강남의 명문 거족들은 앞다투어 사마예를 지지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마예의 지위도 탄탄해졌다. 후에 북방에서 전쟁이 그치질 않자 일부 사족 지주들은 강남으로 피신했다. 왕도는 사마예에게 권고하여 그들 중에서 명망이 높은 사람들을 왕부()로 불러들이게 했고, 사마예는 1백여 사람에게 관직을 주었다. 왕도의 보좌 덕분에 사마예는 강남의 사족들과 손을 잡고 북방의 인재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지반을 점차 확고히 했다.

317년, 사마예는 건강에서 황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원제()이다. 그후 진나라는 줄곧 건강을 도성으로 삼았다.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서진)와 구별하기 위해 역사상에서는 사마예가 세운 진나라를 동진()이라고 부른다. 원제 사마예는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왕도와 왕돈 형제가 보좌한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제는 두 형제를 매우 존중했으며, 왕도를 상서()로 임명해 조정의 대권을 맡겼으며 왕돈은 군사를 총괄하게 했다. 그리고 다른 왕씨네 자제들에게도 주요 관직을 주었다. 그래서 당시 민간에서는 ‘왕여마(), 공천하()’라는 말이 돌았다. 이는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함께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군권을 장악한 왕돈은 이후 원제를 안중에 두지 않고 제 마음대로 일을 처리했다. 원제는 왕돈의 교만과 전횡을 아니꼽게 여겼다. 그래서 왕씨 형제를 점차 멀리하고 대신 유외()와 조협()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세운 지 얼마 되지 않는 동진 정권의 내부에 분열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진(晋)나라 시대의 석두성

진()나라 시대의 석두성 212년, 오나라 손권이 말릉을 다스리면서 금릉읍(주경왕 36년에 건설) 자리에 성을 쌓고 석두성이라 이름했다. 서진시대에는 건강성이라고 고쳐 불렀다.

육조시대의 건강성 위치

육조시대의 건강성 위치 건강성은 장강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종산(, 자금산)을 등지고 장강과 그 지류들로 둘러싸여 있는, 이른바 ‘호거용반()의 지세인 데다가 방어하기 편리한 석두성까지 있다. 육조시대 때 정치의 중심이었던 건강성 안에는 불교 사원들도 적지 않았다.

기마 인형 [서진시대]

기마 인형 [서진시대]

술그릇 [서진시대]

술그릇 [서진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