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 / 창조문예(創造文藝)와 고산지 시인 - 정 건 섭(詩人, 作家)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
- 창조문예(創造文藝)와 고산지 시인 -
정 건 섭(詩人, 作家)
< 등 잔 불>
나, 주 안에서 빛이라
세상을 밝히는
빛의 자녀 되었지만
나 혼자선
선(善)을 행할 수가 없었네
등잔 없인
등불 켤 수 없듯이
심지 없인
등잔불을 켤 수가 없었네
도움 없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모든 것이 협력(協力)하여
선(善)을 이루라’
세미한 음성 듣고
깨닫기까지는
세상을 밝히는
빛의 자녀 되었지만
나 혼자선
빛을 밝힐 수가 없었네
“우리가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빵 가게 주인의 자비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국부론’에서 “우리는 가게 주인의 휴머니티가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필요에 관해서가 아닌 그들의 이익에 관해 말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분업(分業)이 자유시장경제를 통해 협업(協業)으로 바뀔 때 국부(國富)가 창출된다는 그의 철학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새해가 되면 유일하게 나이를 먹는 민족이 한민족이다. 떡국을 먹고 나이를 먹고, 작심삼일(作心三日)이긴 하지만 마음까지도 먹는 강인한 민족이다. 그런데도 지난 한 해는, 경제는 관심에서 사라지고 촛불정치가 화두가 된 한 해였다. 올 한 해는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먹는 문제에 촛불을 밝히는 한 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먹는 문제가 사랑으로 확산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를 우리는 식구(食口)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식구임을 확인하는 공동체의식으로 성찬식(聖餐式)을 행한다. 빵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의식(儀式)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참여하는 회중에게 발현(發顯)되기 때문이다.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남과 맺어지는 일체감, 그리고 공동체와 융합되는 원리는 오늘날 회사를 의미하는 ‘컴퍼니(Company)’라는 말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컴(Com)’은 ‘함께(With)’, ‘퍼니(Pany)’는 ‘빵(Panis-bread)’이라는 뜻이다. 어원대로 하자면 컴퍼니는 회사의 일터이기에 앞서 함께 빵을 먹는 식탁이다. ‘캠페인’이란 말, 혁명가들이 애용하는 ‘컴페지언(동지)’이란 말 모두 같은 뜻에서 파생된 말이다.
정유년 새해에는 지도자들이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제정책에 우선순위를 부여해 궁극적으론 사랑을 먹는 건강한 공동체로 우리 사회가 거듭나길 이 아침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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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산지(高山芝) 그러나 나에게는 고영표(高永表)가 훨씬 익숙한 이름이다, 40년을 그렇게 불러왔기 때문이다. 위 작품은 고산지시인으로부터 가장 최근에 받아본 작품이다. 모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시와 칼럼인데 발표할 때마다 메일로 내게 보내주곤 하여 아예 독자가 되어버렸다. 이제 중견시인이 된 고산지시인은 내가 알던 40년전의 작가지망생이 아니다. 고산지시인의, 사회와 인간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시각과 폭넓은 시야는, 삶으로 무디어진 우리들의 심성을 북 치듯 두드려 일깨워준다. 삶이 무엇이며 인간의 풍요로움이 무엇인가? 행복의 근원은 무엇이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가? 고산지시인이 자신에게 묻고 있는 질문이다. 아니 자신 뿐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 소리지르는 외침이기도 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성향(기독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고산지시인은 타고난 성품이 온유하다. 그 많은 세월을 함께 보내면서 한번도 얼굴 붉히며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격렬히 비난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그의 성품과 그가 쓰는 글들은 일치하고 있다. 고산지 시인과 시인의 작품이 똑같다는 뜻이다. 그의 시가 정직하기 때문에 정직한 만큼 고산지시인과 그의 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강산이 4번이나 변한 40여년 전,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 어떤 인연이 작용해서였을까? 나는 창조문예(創造文藝)라는 문학동호인 모임을 이끌고 있던 고영표(고산지)를 만났다. 당시 우리들은 부정기적으로 동인지를 발간했다. 동인들 중 대부분은 시인 지망생이었고, 소설가 지망생도 한 둘 섞여 있었다. 고영표를 중심으로 김경호, 박영웅(작고), 양준호, 박재화 등과 함께 윤제철, 장재훈, 이숙희, 조대환, 엄세우, 송지은 등이 눈에 뜨이는 작품을 들고 나왔다. 우리들은 매월 일요일 하루를 택해 한적한 다방에 모여서 열정적으로 서로의 작품을 평하면서 습작에 몰두하였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그 시절이 내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였다. 김인만이라는 회원이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소설을 쓰고 있었고, 우리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몇년도 인지는 분명하지않지만 중앙일보 신춘문예 최종예심까지 오른 화려한(?) 경력때문이었다. 원래 소설가가 꿈이었던 나는 시창작(詩創作)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詩) 쓰는 일 만큼 문장훈련에 도움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9년 창조문예 제10집 특대호를 발간한 이후, 단단히 결집하던 창조문예 동인들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비비고 입맞추어도 끊남이 없는 그리움이여“라는 시집으로 고영표(고산지)는 등단하였고, 박재화는 누구나 꿈에 그리는 현대문학 추천을 받아 시인이되었다. 박영웅, 김경호는 김광협(작고)시인이 이끌고 있던 ’詩文章‘으로 등단했다. 나 또한 성기조, 박화목씨가 주축이 된 ’詩와 詩論‘을 통해 등단했다. 이 후 창조문예 동인은 해체되었지만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우리들의 우정은 이어젔다, 지금도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창조문예‘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함께 창조문예 동인으로 참여할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고. 나에게 창조문예는 식어가는 문학에의 열정을 달궈주는 용광로였다, 1983년 작가로 데뷔하여 글만 써도 충분히 먹고 살 만큼 내 인생이 바뀐 것도 창조문예 덕분이다. 나는 틈틈이 고산지(고영표)시인에게 전화를 건다. ”내 인생에 창조문예 시절만큼 행복한 때는 없었다“ 라는 푸념과 함께. 소설가가 되어 평생을 신문연재, 방송, 강연으로 바삐, 바삐 살아왔지만 창조문예 시절 만큼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시절은 없었다. 지금은 어디들 흐터저 사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절 함께했던 동인들과 소주잔 한잔 기울이고 싶다. 더불어고산지 시인의 제3시집 ’상선약수마을‘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