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수필(戀子隨筆)

다산옹(茶山翁)에게 - 걸명소(乞茗疏)에 부쳐 - 고 산 지 / 금강일보 2017. 06. 13

高 山 芝 2017. 7. 13. 16:34

다산옹(茶山翁)에게

   - 걸명소(乞茗疏)에 부쳐 -   고  산  지 금강일보 2017. 06. 13

 

아침에 달이는 차(茶)는

흰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있는 듯 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茶)는

밝은 달이 푸른 물 위에 잔잔히 부서진다 던

차(茶) 버러지 다산옹(茶山翁)은 좋은 차(茶) 얻기 위해

염치(廉恥) 마저 버렸네

 

물 끓이는 재미를

게눈, 고기눈으로 비유하며

옛 선비 흥취(興趣)를 부질없이 즐긴 사이

왕실의 진귀한 차(茶) 거덜났단 핑계로

부끄럼 무릎쓰고 다산옹 애걸(哀乞)하네

차(茶) 좀 달라 복걸(伏乞)하네

 

새 샘물 길러다가 불 일어 달인 차(茶) 맛

신령께 바친 백포의 맛이라며

고해(苦海)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로

명산(名山) 고액(膏液) 뭉친 차(茶)

한 줌 달라 구걸(求乞)하네

 

다산옹(茶山翁) 마음 병(病)을 뉘 아니 거절할까

곡우(穀雨) 전(前) 오일 안에 자줏빛 찻잎 따서

정성들여 제작한 우전차(雨前茶) 보내오니

승(勝)도 말고, 취(趣)도 말고, 범(泛)도 말고, 시(施)도 말고,

오롯한 신(神)이 되어

홀로 음미(吟味)하소서

 

“제가 요즈음 차를 탐하게 되어 차를 약으로 마시고 있습니다. 글로는 중국의 육우의 다경 삼편을 다 통달하였고, 병든 이 몸은 누에처럼 중국의 노동이 말한 일곱 잔의 차를 모두 다 마시고 지냅니다. 비록 기력이 쇠약하고 정기가 부족하지만 기모경의 말을 잊지 않아 차가 막힌 것을 삭이고 헌 데를 아물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마침내 이찬황 (당나라 재상)의 차 마시는 버릇을 갖게 된 것이지요. 아침 햇살이 막 비추기 시작할 때나, 뜬구름이 푸른 하늘에 피어 날 때, 또는 오후 낮잠에서 갓 깨어 날 때, 그리고 밝은 달이 시냇물에 비출 때가 차 마시기에 좋겠지요. 끓는 찻물은 가는 구슬이나 휘날리는 눈처럼 날아오르고 자순의 향이 나부끼듯 합니다. 깨끗한 샘물을 길어와 활활 타는 불로 마당에서 차를 달이니 그야 말로 토끼 고기의 맛 그대로 입니다. 꽃무늬 자기나 홍옥의 화려함은 북송 재상가인 노공에게 양보하겠지만 돌솥과 푸른 연기의 소박함은 한비자에게 가깝습니다. 옛 사람들이 즐겨 했듯이 끓는 물방울이 더욱 거세어 게눈과 물고기 눈 모양으로 바뀌더니 용단 봉단의 모습으로 곧 사라지고 맙니다. 이제 제가 채신의 병에 걸려 차를 구하고자 걸명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듣건데 고해를 넘는 교량은 단나의 보시를 베푼다 하였고 명산의 고액은 서초의 괴를 보내 준다 하였습니다. 마땅이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생각하시어 차 보시의 은혜를 베푸소서”. 

                       -다산(茶山)의 걸명소(乞茗疏) 장문철 역 (1997.12)

 

걸명소(乞茗疏)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선생이 유배생활 중 아암 선사(혜장:1772-1811)에게 차(茶)를 보내주길 부탁하는 내용의 글로, 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잘 표현된 다산 선생의 편지이다. 선생은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경상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유배지가 전남 강진으로 변경된다. 강진의 동문 밖 주막집에서 4년 동안 머물던 선생은, 1805년 겨울 혜장스님의 주선으로 강진 읍내 고성사 보은산방(寶恩山房)에 거주했다, 1806년 가을 선생은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08년 봄 드디어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으로 들어갔다. 다산초당에서 10년 동안 거주했던 선생의 차(茶)사랑은, ‘다산 4경(茶山 四景)에 그대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다산 4경’은 정석바위,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으로, 뜰 앞의 평평한 바윗돌(다조)은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찻물을 끓이던 부뚜막이요, 초당 왼편 뒤쪽의 맑은 샘물이 찻물로 쓰던 약천(藥泉)이다. 동백 그늘 드리워진 뜰 오른쪽의 아담한 연못은 다산이 직접 축대를 쌓고 못을 파 물고기도 기르고 꽃나무도 심고 물을 끌어 폭포도 만들었던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과 초당 뒤쪽의 바위벽에 그가 해배될 때 썼다는 정석(丁石)이란 글씨가 그것이다. 걸명소가 쓰여진 시기는 1805년 겨울, 고성사의 보은산방 시절이다. 선생은 백련사의 혜장선사에게 기력이 쇠약하고 정기가 부족하여 산에 나무하러도 못 가고 병든 큰 누에처럼 생각만으로 차를 마시고 있으니, 명산(名山)의 진액이며 풀 중의 영약으로 으뜸인 차(茗)를 좀 보시(普施)하기를 목마르게 바란다는 편지를 보냈다. 나이 마흔에(1801) 유배를 가서 18년을 지내다 1818년 해배되어 18년을 더 사시다 76세(1836)에 세상을 뜬 다산 선생은, 돌아가신 날까지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언제나 찻잔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