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와의 대화 원고 > - 제24회 책읽기 한마당 태화빌딩 회의실 2018.4/20
< 작가와의 대화 원고 >
시(詩) 만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견뎟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1970년 5월 사상계에 게재된 담시(譚詩) 「오적(五賊)」에서 김지하 시인은, 권력형 부패의 주범들인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정부 각료를 오적으로 비유하여, 너스레와 야유, 호통과 욕설을 섞어가며 조롱 비판함으로 국민의 시름을 달래주었습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정부부에 끌려가 전향서를 썼으나 시인들만이 유일하게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흑산도에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김지하 시인이 체포되던 그 해 1974년. 150명의 회원을 둔 “시인의 집” 동인들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국립공보관을 빌려서 8월 25일부터(31일까지)1주일 동안, 시화전을 개최하고 사화집 “멍석”을 출간합니다. 시화전에 출품했던 졸시 ‘바람’입니다.
기다리며 기다리며, 기다리다 쓰러지는 바람 / 울다가 잠이 든 사물을, 바람은 쓰러지며 껴안는다 / 부서저 어둠속에 흐터지는 가슴 / 에미의 거친 손에 죽음이 묻어나도, 바람은 누어서, 세월을 건저낸다 / 금이 간 돌다리 아래로, 갈대 우거저, 풍랑에 넘어지는 몸체 / 쓰러지며 쓰러지며, 쓰러지다 일어서는 바람.
오적(五賊)시 사본을 소지하고 있던 나와 박영웅 시인은 긴급조치 9호 위반,불온문서 소지죄, 유언비어 유포죄로 서소문 보안사 분실에 끌려갔으나, 민간인 신분이란 이유로 중정로 이첩됩니다. 시인의 집 동인 한사람이 군 수사기관의 내사를 받다가 그들의 수사망에 걸린 것입니다. 몇일 동안 구속 수사를 받던 중, 중정 화장실에서 수사관을 대동한 수갑을 찬 박영웅 시인과 조우했습니다. 장재훈 시인이 낭송할 시, ‘친구’는 40년 지기 박영웅 시인을 그리워하며 쓴 시입니다.
‘멍석’을 3집까지 발간하고 해체된 ‘시인의 집’은 이후 ‘창조문예(創造文藝)’ 동인으로 그 맥이 이어집니다. 소설가 강병석, 작고한 오진현(오남구) 시인과 박영웅 시인, 조계종 교무부장을 역임한 이청화 스님, 이혜선 시인, 박정엽 시인, 등과 지금까지 교류하고 있는 문우, 정건섭 작가, 양준호 시인, 박재화 시인, 윤제철 시인, 김완용 시인, 장재훈 시인, 박찬중 시인등은 이 때 만났던 친구들입니다. 1975년 발간 된 ‘멍석 3집’에 발표 된 달 월(月), 미칠 광(狂), 가락 곡(曲)의 “월광곡(月狂曲)” 이라는 시입니다.
너는, 밤을 난도질하는 여인이다. / 은빛 반짝이는 고기를 놓고, 타오르는 정념(情念)을 어찌할 수 없어, 식칼을 든 아낙이다 / 너는, 어둠을 속사(速射)하고 달아나는 요정이다 / 순백의 향연(饗宴)을 투기하여, 수정의 모닥불을 지피며, 심신을 사루는 정령(精靈)이다 / 한밤중, 짖어대는 삽살개다 / 아, 너는 밤의 역사를 직시하는 사천대왕의 부릅뜬 눈이다.
1976년 봄, 창조문예와는 별도로 창조문예 동인(고영표=고산지, 김경호, 김완용, 박영웅, 박재화, 박찬중, 박현모, 양준호, 이청화)9명은 “보리가 겨울을 나듯이 우리는 이 시대를 난다. 보리가 인동(忍冬) 속에서도 푸른 빛을 잃지 않듯이 우리는 과잉(過剩)의 밤을 절제된 언어(言語)로 고발(告發)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동인지 맥심부락(麥心部落)을 창간합니다. (맥심부락 동인은 동인지를 2집까지 발간하고 해체됩니다) 시의 마지막 연을 (1979년 발간된 저의) 첫 시집 제목으로 택했던 작품 “전라도(全羅道)”는 맥심부락 1집에 “거대한 탄가”, 시집에는 “탄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당시 군대는 지역감정을 부추기면서, 전라도 사람을 화와이 또는 따불빽이라는 속어로 불렀고, 전라남도는 A 빽, 전라북도는 B 빽이라 칭했읍니다.
저주받은 땅, 빛깔도 붉다 / 한 줌의 흙 속에 백제(百濟)가 보인다 / 어둠 속으로만, 짓눌려 길들여진, 거시기 거시기 거시기 거시기 / 땡볕에 갈라지는 전답(田畓), 농부의 주름진 이마에 서러움이 질펀하다 / 따불빽에, 한 아름 애증(愛憎)을 담고, 성난 노을이 핏빛으로 번진다 / 지층(地層)에서 묻어나는 육자배기, 나지(裸地)를 감싸며, 손 매디 굵은 사내는 황토를 판다 / 비비고, 입 맞춰도 끝남이 없는 그리움이여, 천형(天刑)의 땅이여, 전라도(全羅道)여
“창조문예”는 (1981년 5월 발간된 동인지) 12집까지는, 제가 담당하였고 이후 윤제철 시인과 김인만 소설가 등이 맡아서 15집까지 발간(發刊)합니다. (1979년에 발간한) “창조문예 ”10집에 “동인활동의 재조명”이란 주제의 특집좌담이 실렸는데, 반시 동인 김창완 시인과 작단 9인 동인의 “순이삼촌‘의 저자 현기영 소설가를 초청,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김하연 시인의 추천으로 경성방직에 다니고 있던 나는 야학에 동참, 1976년부터 대림동 시장 근처에 있던 대림재건학교(한국청년학교로 바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치게 됩니다. 두 번에 걸친 가택수색으로 가족들의 맘 고생이 심했던 1979년 종형이 용접선 등을 제조하는 범한전선을 설립하고 도와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 있는 범한전선으로 회사를 옮기면서 재건학교 교사는 그만 두게됩니다. 1980년 대림재건학교는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에 연루, 교장은 1년 6개월, 남선생은 6개월 여선생은 3개월의 옥살이를 합니다. 한양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남선생이 격문을 재건학교의 가리방으로 긁은 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이후 저는 범한전선의 사업 부진으로 광주에 낙향하여 개인사업을 시작하면서 문학과 멀어진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991년 광주에서 사업을 하던 나는 공업용송풍기제작(및 공조설비 시공업체)를 인수합니다. 정부에서는 5.18 광주사태의 핏값으로 광주에 산업단지 테크노벨리를 조성하고 지원할 업체를 찾고 있었습니다. 중진공 광주,전남지부장이 찾아와서 대출지원 연계 프로그램 인 CEO 교육을 권했습니다. 교육생 33명 중 전라도 출신은 저 혼자였습니다. 정부의 지원 방식은, 먼저 시설투자를 하면 시설자금과 운영자금을 지원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호기롭게 시설투자를 하고 어음을 꾾었습니다. 정책자금이 신한은행 광주지점에 배정되었으나, 기표하는 과정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포괄양수도로 인수한 업체의 부도 전력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부채까지 안고 인수한 업체는, 빚을 갚더라도 1년이 지나야 백색부도가 해소된다는 은행의 내부규정 때문에 대출이 좌절된 것입니다. 청와대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끝내 버티지 못하고 1년 만에 부도가 납니다. 이 후 저는 서울에 있는 처형집 지하 단간방에 처자식을 버려두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50개월동안 불법체류를 하게 됩니다. 당시의 삶을 일기로 쓴 것이, 간증집 “차명의 세월” 1부 “안개 속”과 2부 “연단” 입니다, 마지막 3부인 차명의 세월 “회복”편은 올 가을에 출간할 예정입니다.
사업을 한답시고 절필하고 지내던 나에게 다시 “시”를 쓰게 되는 계기가 찾아옵니다. 저는 딸만 셋을 둔 딸부자입니다. 부도 날 당시 큰애가 중 2, 둘째가 6학년, 막내가 4학년이었습니다. 갑자기 바뀐 환경 때문인지 애들이 자주 다투자, 집사람이 전화로 짜증을 냈습니다. 그 때 아이들을 위해 쓴 시가 “윙크”라는 시입니다.
윙크가 무엇인 줄 아니 / 한 쪽 눈을 감는거야 / 상대방의 허물을 감싸주는 사랑의 눈을 감는거야 / 사랑은, 두 눈을 뜨고서는 할 수 없기에 / 사랑은, 한 쪽 눈을 감는거야 / 눈감아 주지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기에 / 사랑을 할려면 한 쪽 눈을 감는거야
일본에서 나는 여자들에게만 한번에 5통의 편지를 써야했습니다. 딸 셋과 집사람 그리고 어머니까지. 당시 유일한 기쁨이 아빠에게 편지를 받는 기쁨이었다고 아이들은 회고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믿음의 훈련과, 매일 일기를 쓰게 함으로 나의 재능을 연단시키고자 부도라는 채찍을 하나님이 저에게 사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1987년 11월, 불법체류를 끝내고 귀국을 한 저에게 서울대학교에 수시 합격한 큰 딸은,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아빠 우리 집은 이미 IMF를 다 겪었어” 라는 말하더요. 김대중 정부는 중소기업 육성책의 일환으로 벤처창업을 택합니다. 교수인 사촌 동생의 벤처창업에, 저는 법인설립부터 관여하여서 관리담당이사로 코스닥 상장까지 시키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저의 신분은 개인파산절차를 거처 정상인으로 복권됩니다. 도산부터 복권까지는 15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첫 시집 발간 이후 27년만에 두 번째 시집 ‘짠한 당신’과, 작년에 제3시집 ‘상선약수마을’을 발간했습니다. “짠한 당신“이라는 시는 그동안 고생한 집사람에게 바치는 헌시입니다, (2007년도 시사문단 2월호에 발표한 작품 ) 졸시 ”짠한 당신“을 낭송함으로 저의 사설을 끝내고자 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치통 / 아내는 하루 세 번 진통제를 복용한다 / “수술하면 통증은 사라지나 얼굴 한면이 마비된다”는 의사의 소견에 / “느낄 수 있기에 살아있는 것이라며, 통증을 견뎌보겠다”는 당신 / 아리아리 내 가슴이 아려온다 / 곱던 그 얼굴에 잔 주름이 생기더니 / 삶의 무게 때문일까, 무릎 관절이 부어 올랐다 / “이제는 쓸만한 게 하나도 없네” 하며 글로코사민을 찾는 아내 / 찡해 오는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 설레임으로 가득했던 추억의 편린들이, 아직도 나를 달구고 있는데 / 이제는 반백으로 마주앉은 우리. / 서리서리 서린 정 흉배 만들어, 사랑보다 진한 정 흉배 만들어, 당신의 짠한 허리 동여주리라
지금까지 경청해 주신 여려분들께 거듭 감사 인사를 드림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