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사 김규식 “애국을 노래하다‘ 출간 출판기념회 답사 = 2019년 10월 18일 15시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백범 김 구 및 우사 김규식 “애국을 노래하다‘ 출간 - 백범기념관
1부 순서 답사
저는 의정부영락교회 장로로 시무하면서 대전 소재 일간지 금강일보에 칼럼“연자수필”과 한국문학신문네 칼럼 “연자시편”을 연재하고 있는 시인 고산지입니다.
“ 독립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프다” 라는 시집은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5월 31일, 이윤영 의원의, 제헌국회의 개회기도까지를 노래한 대하 서사시입니다. 해방공간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각자들의 열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저는 <동방의 등불>이란 제목으로 기독교의 전래 과정을 통해서, 이 땅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동방의 등불> 4부작 중 본 시집은 3부작에 해당합니다. 복음의 전래와 조선의 멸망, 일제치하의 독립운동, 대한민국 건국과 6,25, 그리고 반공포로 석방 등으로 <동방의 등불>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은 모두 개신교 신자들입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조선 땅에 복음을 들고 건너온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어린 아들, 딸, 남편을 풍토병으로 이 땅에 묻으면서도 학교를 세우고 의료기관을 세우고 교회를 통하여 한글성경을 보급했습니다. 한글 성경을 읽게 된 기독교 신자들은 민족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이는 독립운동으로 이어젔습니다.
당시 우사 김규식 선생의 부친은 동래부에서 무역 업무를 담당한 관리였습니다. 그분은 일본 상인의 횡포가 늘어나자, 불평등조약의 부당성을 비판,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한 상소문을 올렸다가 유배형을 당합니다. 당시 4살이었던 우사는 어머니와 함께 상경했으나, 2년 후 어머니 마저 병으로 사망하자, 형편이 어려운 큰아버지는 우사를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맡김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입양된 우사는 민로아학당과 구세학당에서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고 1894년 3월에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제1반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1897년에 9월에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통의 인문대학인 로아노크 대학(Roanoke College) 예과에 입학, 1898년 가을에 정식으로 본과에 진학한 우사는 전체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1903년 6월, 로아노크대학을 졸업합니다 그해 가을,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우사는 박사학위 과정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비 지원 제안을 받았으나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을 결심함니다. 귀국한 우사는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로 있으면서 그 해 가을,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YMCA) 교육부 간사로 활동을 합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 어학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우사는 어학실력 때문에 파리강화회의의 한국 대표로 선발되었읍니다. 이러하듯 기독교는 교육을 통하여 수많은 선각자와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주역으로 쓰임받게 하였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이 시간 설명하지 않겠읍니다.
다음은독립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프다에 나온 김규식 선생의 요약입니다
1945년 11월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 환국 제1진으로 32년 만에 귀국
1946년 1월 4일 임정을 계승할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과도적 최고입법기관의 비상정치회의 소집
비상정치회의주비회 조직 - 1차준비회의 개최 결의(1/20-24)
- 임시정부국무회의를 거처 조선공산당과인민당 등을 제외
1946년 1월 18일 미군정 독자적 과도정부수립 시도 저지훈령
1946년 1월 24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임정의 비상정치회의를 통합
비상국민회의로 개편
- 과도정권수립을 위한 28명의 최고정무위원 선출
정무위원회조직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3인에게 일임
1946년 2월 14일 미군정의 요청으로 최고정무위원 명칭을 의결기관이 아닌
미군정의 자문기관 =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의 개편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 이승만 신탁통치반대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의장 사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 => 대리의장 김규식 좌우 합작운동 추진 =>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기능 정지
미군정 하지중장 : 극 우 = 이승만 김구
중도우파 = 김규식 원세훈
중도좌파 = 여운형
극 좌 = 박헌영
1946년 7월 26일 좌우합작위원회 발족 / 김규식 여운형 = 미군정 버치중위 주선
1946년 8월 24일 조선과도입법위원의 창설에 광한 법령 미군정 법령공포
1946년 11월 4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 => 김규식 의장 선출
독촉계열과 하지중장 계열 다수 여운형 탈퇴 =>최초의 대의기관
1947년 3월 2일 이승만 방미 중 김구 대의원 1,500명 한국국민대표회의 소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승인 요청 부결
임시정부 주석 이승만, 부주석 김구 추대,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 시작
=>김규식은 남북연립정부가 통일의 유일한 길
임정과 군정의 대립 완화 국민대표회의의 정당화
=> 하지중장 김규식을 대통령 후보로 생각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 이승만 김구 반대
=> 삼상회의 고수 결렬 =>1947년 9월21일
장덕수 암살로 이승만과 김구 결별 => 김구 남한단독정부 반대
=> 김규식 남북연립정부 계속 주장
1947년 11월 14일 남북총선안을 결의안 제112호 유엔 결의
1947년 12월 12일 중국영사관, 이승만 김구, 김규식 남한총선거실시 동의 합의
=> 남북요인회담을 총선거에 지장이 없다면 방임
김 구 =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북한의 인민공화국도 반대 => 계속 노력
김규식 = 과도입법의원회가 끝나면 총선거 불참가
김구, 김규식의 남북한정치대표자연석회의
=>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로 명칭이 바뀜
1948년 4월 22일 참석
=> 남북한 연석회의에서 채택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헌법 이다
김구, 김규식이 도착하기 전 채택되었으나 합의헌법으로 김일성 선전
김구 공주 마곡사, 김규식 정계은퇴
역사의 아이러니 => 김규식 6.25 납북 사망, 김구 안두희 암살
애석하게도 해방공간에서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장로는 6.25 때 평양형무소에서, 김규식 장로는 납북되어 운명을 달리합니다. 이분들은 시대적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신 분들입니다. 역사를 지금의 시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편견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시바 료타로는 역사소설은 60이 넘어서 써야한다고 말했읍니다. 오늘 이렇게 휼륭하신 분들 앞에서 인사말을 하게 되어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