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지의 戀子隨筆] 사무사(思無邪) - 금강일보 승인 2019.10.29
< 사무사(思無邪) >
생각하고 사는 사람
생각대로 살아가고
생각없이 사는 사람
사는대로 생각하네
생각하고 사는 사람
감사하며 살아가고
생각없이 사는 사람
감사없이 살아가네
거룩한 거래는 소통에서 시작되네
말씀과 기도가 생각을 만들면
은밀한 소통이 마음속에 작동되네
생각하고 사는 사람
생각대로 살아가고
생각없이 사는 사람
사는대로 생각하네
사무사(思無邪)란 글은 공자가 <논어 위정>편에서 시경(詩經)을 평한 글귀이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 자왈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사무사,
공자가 말하길 시경 3백 편의 시를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
이 글은 춘추시대 노나라 희공이 백성의 밭을 피해, 멀리 떨어진 목장에서 말을 길렀음을 칭송한 시로 행여 키우던 말이 백성의 곡식을 짓밟을까 봐서 목장을 먼 곳에 조성해 말을 길렀다는 思無邪 思馬斯徂 - 사무사 사마사조, 생각에 사특함이 없으니 말을 생각함이 이에 미치는 구나 - 라는 <시경 노송경(魯頌駉)>편에 실린 시이다. 공자는 이 시에서 사무사(思無邪)란 구절만 차용하였다. 이 후 퇴계 이황의 사무사(思無邪)의 무(無)자를 ‘없게하다’는 사역으로 읽을 수 있다는 해석에 따라 “생각에 사특함이 없게 한다”는 뜻으로 오늘날 읽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없는 것 자체가 삿된 것이다” 라고 해석하고 싶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게 하는 것은, 생각을 하고 나서의 일이다.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이 죄(罪), 사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는 사람이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감사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감사를 뜻하는 영어 ‘thank you’가 ‘생각하다’는 ‘think’에서 파생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지않고서는 감사를 할 수 없다. 회의문자인 느낄 감(感)자는 ‘느끼다’나 ‘감동하다’라는 뜻을 가진 뜻글자이다. 느낄 감(感)자는 함[咸, 다 함]자와 마음 심(心)자가 결합한 형성문자로, 함(咸)자에는 ‘모두’나 ‘남김없이’라는 뜻이 함의되어 있다. 이렇게 ‘남김없이’라는 뜻을 가진 함(咸)자에 심(心)자를 결합한 감(感)자는 ‘모조리 느끼다’라는 뜻의 뜻글자이다. ‘모조리 느낀다’는 뜻은, 오감(五感)을 통해 느낀다는 의미이다. ‘사례하다’나 ‘양보하다’, ‘사양하다’라는 뜻을 가진 사례할 사(謝)자는, 말씀 언(言)자와 궁술 사(射)자가 결합되어있지만 말씀과 궁술의 관계가 ‘사양하다’라는 뜻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射)자의 갑골문에서는 단순히 양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는 이미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물건을 건네주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지금은 ‘사례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오감을 통해서 느끼는 사례하는 마음을, 뜻 글자 한자는 감사라고 적고 있다
감사로 번역되는 헬라어 가운데 ‘카라’(chara)라는 단어가 있다. ‘기쁨’으로도 번역되는 ‘카라’는 단순한 감정인 육체의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기쁨을 의미한다. 이 기쁨은 하늘의 것과 연결되어 있어, 세상의 만족이나 짜릿한 쾌락과는 거리가 있다. 이 기쁨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라’는 세상이라는 외적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다. 카라’에서 나온 단어 카리스(charis)는 신약성경에서 ‘은혜’ 또는 ‘감사’로 번역되고 있다. 은혜와 감사의 공통점은 세상이란 조건에 억메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삿됨이 없는 올바른 생각에서 나오는 기쁨이야말로 성령의 은혜요, 신(神)이 준 선물이다. 세상은 상대적 비교를 통해 불평과 불만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지만,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입은 감사하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