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연자시편 - < 독립 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프네 > - 한국문학신문 - 2021년 9월 29일 (515호)

高 山 芝 2021. 10. 1. 14:08

< 독립 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프네 >

 

해방이 곧 독립은 아니었네.

독립이 없는 해방공간은 냉전의 전초기지였네

정제되지 못한 자유가 서로를 아프게 했네.

독립 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팠네.

 

4천년 동안 왕권통치에 길들여졌던 사람들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국권 회복을 외쳤지만

추구하는 국체(國體)는 저마다 달랐네.

 

국민이 주인인 정치를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기에

 

인민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전체주의

사회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자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주장했으나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운명은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고 있었네.

나라 잃은 설움에 만주벌판과 유라시아를 떠돌며

우리의 선조들은 목이 메도록 애국가를 불렀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독립은 되었으나 자립을 할 수 없는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가 드디어 탄생했네.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 끄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였네, 하나님의 역사였네

 

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루즈벨트와 처칠, 장개석은 19431112,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전후의 문제를 논의 했다. 이 회담에서 장개석의 강력한 건의로 조선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 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 했다. 1945211일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대 일본, 대 독일의 전략을 논의 하면서 소련의 대 일본 참전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소련은 일본과 체결한 불가침조약(1941)을 근거로 참전하지 않았다. 1945514,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을 위해 일본은 소련의 중재를 타진했다. 독일이 항복하자 1945717, 연합국은 독일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184586일과 89.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자폭탄을 투하 하자, 89일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파기한 소련군은 만주와 북조선에 진주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1945815일 일왕 히로히토 직접 항복을 선언했다. 194592일 미국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정부 대표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당시 미국은 상해 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수반으로 귀국하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허락하지 않았다. 상해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면 우리는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았을 것이다. 중국(중화인민공화국) 또한 일본의 항복 문서를 받지 못했다. 중화민국(대만)의 장개석이 일본의 항복 문서를 받은 것이다. 93일을 전승일로 지키고 있는 중국은 항복문서가 없는 전승일을 기념하고 있다. 남한의 미군이 철수한 후 195015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미국의 태평양지역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연결되는 선이라고 보고했다. 대만, 한국,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네시아 등은 이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6. 25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미군이 철수되면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을 대한민국은 71년 전에 이미 체험을 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똑 같은 상황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195012월 당시 서부전선으로 북진한 제8군은 육로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동부전선 장진호 방면으로 북진한 미 제10군단의 병력은 원산지역이 중공군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되어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장진호 전투 전투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인민지원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하였다. 김백일 제1군단장과 고문관 현봉학은 알몬드 10군단장을 설득해서 피난민을 철수시켰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4천여 명을 승선 철수시켰지만 승선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흥남부두에 버려졌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한 1975년 미군의 사이공 탈출에서 극명하게 재현되었다. 정치인의 부정부패로 나라를 잃게 되면 그 피해는 모두 국민들에게 전가 된다.

 

바이든 미대통령이 미국의 국익이 없는 곳에서 미군이 싸우는 실수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군 철수를 선언한지 3개월 만에, 이슬람 무장단체 텔레반의 군대가 아프칸의 주요거점을 점령한 지 10일 만에, 아프칸의 수도 카불이 함락되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30만의 아프칸 정부군이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75천여 명의 텔레반 군대에게 패주를 한 것이다. 카불에서 이륙한 미 수송기 랜딩기어 부분에서 수송기 탑승을 위해, 아프칸 탈출을 위해 사투를 벌린 사람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돈다발을 들고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친 대통령을 둔 국민들의 비극이다.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우리의 대통령은 어떻게 행동할까? 한미연합훈련을 반대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당당하게 설득하는 지도자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