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 고 경 명(高敬命) - 2 ]

高 山 芝 2011. 5. 25. 19:16

 

고경명(高敬命)     지역     금산군  

    출생·사망     1533(중종 28) ∼ 1592(선조 25)  

    구분     충신

    시대     조선(충청도)  

    관련유물/유적     고경명 선생비   

   내용

고경명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이다.

그의 아버지 맹영(孟英)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대개의 선비가 그렇듯이 그도 국난을 당하매 몸을 떨쳐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1558년 (明宗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할만큼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20세가 채 못되어 서울에 올라와 휴암(休菴) 백인걸(百仁傑)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 학덕이 높은 거유(巨儒)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요직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이르렀는데 서인(西人)이 몰락할 때 그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이듬해 즉 1592년(宣祖 26)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고향에서 60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유팽로(柳彭老)와 그의 아들 종후(從厚)·인후(因厚)와 함께 의병(義兵) 6천명을 이끌고 선조(宣祖)의 행궁(行宮)이 있는 평안도로 가고자 북상하다가 나주사람 김천일(金千鎰)과 합류하였는데 이 때 유팽로·김천일 등은 고경명을 맹주(盟主)로 삼았다. 앞서 그는 몇번 사양하다가 개연(槪然)히 단에 올라 전라도내에 창의(倡義)의 격문(檄文)을 전하였다. 이에 전라도의 뜻있는 의병들이 다투어 모여 들었다.

이 당시 왜군에게 불시의 침입을 받은 우리 나라의 삼로(三路)의 군사가 용인에서 무너지자 오직 충청·전라 두 도(道)를 믿는 판국이었다. 고경명이 전주로부터 군사를 정돈하여 올라와 노성(魯城)으로 향할 때 적군이 금산을 넘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에 고경명은 본도(本道)를 구하기로 작정하고 길을 변경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처음에 고경명은 금산에서 군세를 펼치었다.

7월 9일 금산에서 적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싸움은 성패가 분명한 것이었다. 금산의 격전에 앞서 고경명은 곽영(郭嶸)과 더불어 좌·우익을 만들어 남원으로부터 진격하였는데 방어영(防禦營)의 관하 장수 김성현이 먼저 도망하여 관군(官軍)이 무너지자 의병군도 패주하게 되었다. 이 패주하는 군사를 이끌고 고경명은 금산에서 최후까지 접전하게 되었다.

그때 고경명은

"불행히 싸움에 패하였으니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고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의병들의 그 뜻은 장하였지만 조총(鳥銃)을 가진 왜적들을 당할만큼 훈련되지 못하였다. 이 싸움에서 유팽로·안영 그리고 그의 아들 인후와 함께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그의 다른 아들 종후는 그 이듬해 진주에서 전사하여 그들 3부자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몸을 일으켜 싸우다가 죽은 것이다.

이 소식이 인근에 전해지자 곡성(哭聲)이 곳곳에서 진동하였다. 고경명은 금산을 공격할 때 사위 박숙에게 편지를 보내어 뒷일을 부탁하면서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아들 종후가 시체를 거두어 염하는데 40여일 동안에 여러 번 비를 맞았으나 신색이 산것 같았다고 한다. 선조(宣祖)가 의주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킨 것을 듣고 양산수에게 "원컨데 너희들이 빨리 국토를 회복하여 저승에 가서 내가 고경명의 얼굴을 대할 수 있게 해달라" 고 하였다 한다. 휘하의 병종들은 최경회(崔慶會)를 장수로 하여 계속 활동하였는데 고경명이 금산을 중요시한 것은 경상도를 석권한 왜적이 전라도를 진출할 수 있는 인후(咽喉)의 요지였던 까닭이다. 금산은 조헌(趙憲)이 왜군과 대적하여 칠백의사가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 고경명은 비록 승리를 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죽은 후에 의병이 잇달아 일어났고, 이것이 뒷날 국토를 회복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감안해 볼 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식견과 도량이 넓고 깊어서 일에 임하여 구차하지 않았으며, 불패(不敗)·불퇴(不退)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충렬(忠烈)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두 아들도 모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아버지와 같이 순국하여 장렬한 투혼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사당(종용사)과 순절비(殉節碑)는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칠백의총 묘역안에 있다.

제봉집(霽峰集) 유서석록(遊瑞石錄)이 세전(世傳)하며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 현재는 훼철되었음),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광주의 포충사(褒忠詞)에 제향(祭享)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