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담자
임진왜란이 끝난 경자년(1600년)의 어느 봄날 파담자는 충청도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다가 임진왜란 때 달천 싸움이 있었던 충주 땅에 이르렀다.
달천 강가에는 봄바람이 불어오고 맑게 개인 하늘 아래 풀잎들이 푸르른 3월이었다. 임진년이 지나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 전쟁의 모습은 남아있었다.
파담자는 강기슭을 지나가며 지난 날의 옛 싸움을 회고하였다.
조정에서 내려 보낸 무능한 관군 장수들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왜적들과 맞서 패했던 달천 강가의
그 통탄할 싸움, 늠름한 용사들의 대열이며 큰칼과 긴 창을 비껴 든 병사들의 모습들이 아련한 기억으로
추억되었다.
전쟁 초기의 싸움터를 돌아본 그는 조용히 그 날의 가슴 아픈 추억을 되살리며 희생된 용사들을 추모하는
시를 지어 읊었다.
그 후 파담자는 화산 고을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전에 써 놓은 글들을 들추어내어 다시 읽어보던 중에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어디선가 큰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이 나비를 따라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어떤 그윽한 곳에 이르렀다.
자세히 주위를 살펴보니 얼마 전에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시를 쓰며 지나가던 달천 강의 옛 싸움터였다.
바람이 불어오고 사방이 캄캄해지더니 먼 곳으로부터 횃불을 든 사람들의 대열이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그 해 봄에 충주의 달천 강을 지키다가 죽은 용사들이었다.
파담자는 그들의 용맹한 모습과 대화 소리,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조용히 몸을 숨기고 듣고 있었다.
용사들은 자기들을 낳아 키워 준 부모들의 다정한 손길을 생각하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장렬한
싸움이 벌어졌던 그 나날들을 돌이켜보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때 한 군사가 나서더니 인간 세상의 나그네가 몰래 우리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 같다고 말하였고
파담자는 숲 속에서 뛰어나와 그들에게 예의를 표하였고 여러 군사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전일 여기를
지나며 시를 지어 남긴 사람이 아닌가하고 하면서 그에게 예의를 표하였다. 그
들의 이야기가 임진왜란 초기의 달천 싸움에 이르렀을 때였다. 용사들은 관군장수들이 지형 조건도 똑똑히 살펴보지 않은 채 덮어놓고 배수진을 친다고 하여 군사를 새초가 무성하게 자란 낮은 습지대에 자신들을 배치하도록 만든 그릇된 지략에 격분하였다.
한 군사는 장수 신립을 한하며 호서지방에서는 자연이 준 요새를 가지고도 적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는데
부하들의 말도 듣지 않고는 끝내는 제 억측으로 결심을 내려 억세고 용감한 군사들만 고기밥이 되게
하였다고 비분강개하였다.
또 다른 군사가 나서며 임진년 싸움의 옳고 그른 것은 후세의 사람들에 의해 이미 알려졌으니
이제는 파담자에게 우리가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하였다.
이에 멀리로부터 수많은 수레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 왔다.
서릿발 같은 창검이 숲을 이루었고 높이 추켜든 깃발이 훨훨 나부끼며 다가왔고 남한강 쪽에서는
숲처럼 돛을 올린 무수한 전함들이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고 천리 남해 바다 쪽에서도 수많은 전선들이
밀려와서 강기슭에 이르렀다.
갑옷 차림에 장수모를 쓴 사람들이 대에 오르고 있었다. 남해바다를 지켜 싸운 이순신 장군과
임진년 팔월에 있은 금산전투 때에 마지막까지 용감히 싸운 의병장 조헌,
다음 해 있은 진주성 방어 전투 때 남강의 촉석루에서 몸을 던져 최후를 마친 의병장 김천일을 비롯하여
최경희, 고종후 등 애국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였고 또한 임진강 방어전투에서 결사적으로 싸워
북쪽으로 기어드는 적들의 활동을 지체시킨 신길, 유극량, 칠천도 바다싸움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최후를
마친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도 보였다.
그리고 승병을 지휘하며 용감히 싸우다 죽은 영규와 같은 중의 모습도 보였다.
각각 자리를 잡되 이순신 장군이 오른편 첫 자리에 올랐고 왼편 첫 자리에는 고경명이 차지하고 제일 아래 자리에는 승장 영규가 앉고 그 아래에 파담자가 앉았다.
이렇게 차등 있게 자리가 정해지니 금 소반에 차린 특이한 음식들이 차려지고 이어 음악이 울렸다.
임진왜란에서 목숨을 바쳐 공을 세운 명장, 의병장 장수들과 용사들이 모여 달밤의 모임을 시작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 모두 이 밤에 함께 모여 즐기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하며 북을 치고 징을
울리게 하였다. 그래서 용사들의 춤과 노래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윽고 의병장 고경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귀한 사람들의 이러한 성대한 모임이 언제 또 있겠는가, 그
러니 이 즐거운 밤에 우리 서로 회포를 나누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명장, 의병장 장수들이 차례로 일어나 자기들의 절절한 심정과 소원을 토로도 하고
그 자리에서 자작시를 읊기도 하였다. 모두들 생전에 다하지 못한 뜻을 감개무량하게 노래하였다.
어떤 사람은 원수들을 물리치는 수성방어 싸움을 회상하며 그때에 부른 성 쌓는 노래 를 시에 담아 읊었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직접 참가했던 바다 싸움의 장면을 감동 어린 어조와 몸짓으로 표현하면서
노 젓는 노래 를 힘차게 불렀다.
그리고 원수들을 맞받아 나가며 싸우는 힘에 겨운 전투를 회고하며 나라의 방위력을 가일층 키워야
하겠다는 소원을 담은 시를 읊는 사람도 있었다.
명장들이 자기의 뜻을 피력하고 시도 한 수씩 모두 읊기에 파담자도 감동하여 스스로 장편 시
무훈의 노래를 격조높이 읊었다.
그가 잊을 수 없는 용사들의 그 무훈과 용맹을 다함없는 서경으로 노래하니 용사들은 시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킴이 이다지도 큰 것인가 라고 하며 그대는 무예와 더불어 문장에 힘써서
나라를 빛내리라고 격려하였다.
밤이 깊어 파담자는 여러 장수들과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는데 뜻밖에도 달밤의 모임에 끼어들려다가 거절당한 원균의 우스운 몰골을 보게 되었다. 임
진왜란에서 나라를 위태로운 지경에 빠뜨렸던 이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장수들의 모임에 참가하지
못한 채 강가의 낭떠러지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 우스운 몰골을 본 용사들은 통쾌하게 웃어댔고 파담자도 한바탕 웃고 나서 원균을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러다가 파담자는 몸을 뒤채여 깜짝 놀라 깨어났다.
베개를 어루만지며 생각을 더듬으니 꿈속에서 만나보았던 이순신, 고경명, 최경희, 김천일, 김제갑, 송상현, 김여물, 조헌 등 애국 장군들은 모두 그가 평상시에 흠모하고 우러르던 사람들이었다.
파담자는 곧 제물을 차려 가지고 용사들의 넋을 불러 제사를 지냈다. 파담자는 열사들이 지켜 싸운 이 나라의 강산을 굽어보며 목숨 걸고 오랑캐들을 쳐 물리친 충신들을 한 사람씩 추도한 다음 노래를 불러 그들을 추모하였다.
이 작품의 창작 연대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2년째 되는 1600년(선조 33), 곧 작자가 요절하기 4년 전인 23세 되던 해이다. 1책의 한문필사본 소설이며, 「수성지(愁城誌」와 합철되어 있는 고려대학교 도서관본, 성암문고본, 「난중잡록」 수록본 등이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만력(萬曆) 경자년(更子年. 선조 33년) 봄, 파담자(坡潭子)는 궁중에서 숙직을 선 다음날 임금에게서 호서지방을 암행하라는 어명을 받는다. 파담자는 여러 읍을 암행하면서 충주의 달천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9년이나 되었으나 달천에는 아직도 전장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파담자는 한시 3편을 지어 원통하고 슬픈 마음을 풀다가 잠이 들었는데, 큰 나비 한 마리의 안내를 받아 한 곳에 갔는데, 별안간 급한 바람이 불고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지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횃불을 높이 들고 다가 왔다.
파담자가 숲 속에 숨어 그들을 엿보니, 머리가 없는 사람, 오른팔이 잘린 사람, 왼팔이 잘린 사람, 오른다리가 잘린 사람, 허리는 있으나 다리가 없는 사람 등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여러 사람들이 눈물을 닦고 말하기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들 우리들의 원한은 다함이 없을 것이니, 달이 밝고 바람이 맑은 이와 같은 좋은 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일제히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끝낸 뒤, 한 사람이 누군가 우리의 얘기를 엿듣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파담자는 자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그들 앞에 나선다. 그러자 귀신들이 일어나 절하고 오늘 저녁에 다행히 군자를 만나 우리들의 얘기 중 세상에 전할 것이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 죽령(竹嶺)은 천하의 요새인데도 신립 장군이 지리(地利)를 이용하여 작전을 펴지 않고, 충주의 달천으로 퇴진하였다가 참패를 당하여 전군이 몰살당하였다며 눈물을 흘린다. 이에 한 장부가 일어나 충주 달천으로 퇴진하여 작전을 편 이유를 말하고, 하늘이 실로 그렇게 시킨 것을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하며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는데, 이 장부가 바로 신립장군이다.
이때 수레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나면서 장수들과 군선들이 나타나고 그 중에 한 장군이 내려오니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영접한다. 그 장군이 상좌에 앉고, 좌우로 고경명, 최경회, 임현, 송상현, 김여물, 김천일, 조헌, 이복남 등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여러 사람들에게 순서를 정하여 앉게 한다. 좌석이 정해지자 음악을 연주하고 잔치가 시작되며, 춤을 추고 좌석의 사람들이 차례로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를 하며 시를 읊는다.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자신이 전사한 것을 얘기하며 시를 읊는다.
장군이 시를 읊자 끝으로 승장(僧將)이 읊으니, 장군이 웃으며 칭찬한다. 파담자가 여러 사람들을 품평한 글을 써서 올리니 좌우에서 읽고 탄식하고는, “文足以華國 武足以御侮”라 하면서 우리들은 이미 끝났으니, 그대가 국사에 힘써 달라고 하는지라, 파담자가 뜻을 받들겠다고 하고는 물러 나오는데, 귀신들이 박수를 치는 소리에 놀라 깨니 꿈이었다. 꿈을 깬 파담자는 제문을 짓고 저들의 혼을 불러 제사를 드린다.
작자 윤계선은 자기 자신이 소설 속의 몽유자(夢遊者)가 되어 임진왜란 때 희생당한 수많은 장수와 군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액자 구조의 형식을 취하였다. 꿈속의 세계에서 만난 이름 없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패전의 책임을 신립과 원균에게 묻고, 이순신을 비롯하여 충절을 지킨 장수들의 공적을 평가했다.
원혼들이 하는 원망과 규탄의 말을 들으며 감회가 커질 때는 한시를 삽입했으며, 꿈에서 깨어나서는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등 원한을 풀기 위해 여러 방식들을 사용했다. 또한 윤계선은 좌정(坐定) 대목을 통해, 당파의 차이에 따라 의병과 관군측으로 갈라져 양립했던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 그들의 충절을 고양하면서도 화합을 추구했다.
몽유록은 조선시대 지식층 작가들이 꿈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심회나 현실에 대한 비판을 토로하거나, 이상세계를 설정하여 그들의 지향의식을 묘사한 장르이다. 파담자와 같이 몽유록의 화자는 꿈속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를 실제 체험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꿈을 의탁하여 사건을 서술하는 허구적인 가탁(假託) 양식이다.
「달천몽유록」은 현실비판 지향의 작품이며, 이와 비슷한 성격의 작품으로는 단종과 사육신의 억울한 죽음을 기술한 「원생몽유록」,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절사(節死)한 14명의 부인들의 이야기를 기술한 「강도몽유록」 등이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제목으로 황중윤(黃中允:1577~1648)이 지은 「달천몽유록」도 있다.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