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월봉(月峰) 고부천(高傅川)

高 山 芝 2011. 6. 2. 18:29

고부천(高傅川)

본관(本貫)

  장흥(長興)

시대(時代)

1578(선조 11)∼1636(인조 14)

자(字)

군섭(君涉)

호(號)

월봉(月峯

고부천(高傅川)   1578(선조 11)∼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군섭(君涉), 호는 월봉(月峯).

아버지는 인후(因厚)이며, 어머니는 함풍이씨(咸豊李氏)로 관찰사 이경(李璥)의 딸이다.

1605년 진사가 되었고, 1615년(광해군 7)38세에 알성문과시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지제교(知製敎)·사헌부장령 등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613년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제기하자 진사 정택뢰(鄭澤雷)와 함께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으며, 1624년 고향인 창평(昌平)에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태인(泰仁)에 이르러, 이괄이 이미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공주 등지로 피란가는 동궁을 호가(扈駕)하기도 하였다.

그는 학문이 고매하고 천품이 겸손하면서도 의리에 강직하였다. 그가 죽자 김상용(金尙容)·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 등 당시 명공석학들의 많은 만장이 답지하였다.

저서로는 《월봉집》 9권이 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月峯集. 〈李海權〉

 

고부천(高傅川) 장흥인

월봉 고부천 (月峯 高傅川)

고부천(高傅川 1578-1636)은 자(字)가 군섭(君涉), 호(號)는 월봉(月峯), 이름은 부천, 관향은 장흥이다. 고조(高祖) 운은 중종(中宗) 때에 형조좌랑을 지냈으면 기묘(己卯)제현(諸賢)과 함께 세상(世上)에 이름을 떨쳤고, 증조(曾祖) 맹영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조부(祖父)인 제봉 경명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싸우다가 부친(父親)인 학봉(學峯) 인후와 함께 금산(錦山) 전투(戰鬪)에서 순결(純潔)하였다. 백부인 준봉 종후는 복수의병장으로 출전(出戰)하여 그 다음해 진주성에서 순절(殉節)하였다. 한 집안에서 세 사람이 순절하니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그 충절(忠節)을 표창하고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여 추모했다. 아버지는 학봉이요, 어머니는 함풍이씨(咸豊李氏) 관찰사(觀察使) 경(璥)의 딸이다.

 1578년 선조(宣祖) 11년 (무인) 7월 13일 광주 압보촌 옛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용모와 자태가 온후(溫厚)하였고, 정신이 총명(聰明)하고 민첩함이 동년배들 보다 훨씬 뛰어났다. 갓난아이 때에 부모(父母)와 함께 누워 있으면서 (자신과 부모 셋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천(川)자 모양이구나"하고 외치니 아버지 의열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천(川)'자로 이름을 지었다.

1579년 선조(宣祖) 12년 (기묘) 2세 아버지 의열공이 7명 가운데 3등으로 진사(進士)에 입격하였다. 1585년 선조(宣祖) 18년 (을유) 8세 할아버지 충렬공에게 학문(學問)을 배웠는데 충렬공이 가장 사랑하고 기특히 여겼다. 1588년 선조(宣祖) 21년 (무자) 11세 정월 9일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함평 이씨가 별세(別世)하였다.

1589년 선조(宣祖) 22년 (을축) 12세 아버지 의열공이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6등으로 급제(及第)하였다.

 1591년 선조 24년 (신묘) 14세 선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문예(文藝)가 뛰어났다. 본도(本道) 감사(監司)가 선비들을 시험하는 백일장(白日場)을 열었는데, 선생은 수석(首席)을 차지하고 「논어(論語)」한 질을 상(常)으로 받았다. 작은 아버지 정헌공이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였다.

 1592년 선조(宣祖) 25년 (임진) 15세 4월에 왜적(倭敵)이 침입(侵入)하였다. 7월 10일에 할아버지 충렬공과 아버지 의열공이 함께 금산에서 순절하였다.

 1593년 선조 26년 (계사) 16세 6월 29일 큰 아버지 효열공이 진주(晋州) 남강 촉석루(矗石樓)에서 순절하였다. 선생은 2년 사이에 할아버지 충열공과 큰 아버지 효열공 그리고 아버지 의열공의 순절을 거듭 당하자 할머니 정경부인 울산김씨의 슬하(膝下)에 의지하게 되었는데, 작은 아버지 정헌공과 막내 아버지 청사공이 함께 가르치니 학업(學業)이 크게 성취(成就)되었다.

 1594년 선조 27년 (갑오) 17세 9월에 3년상(喪)을 마쳤다.

 1598년 선조 31년 (무술) 21세 평강 채씨(平康蔡氏) 충익(忠益)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충익은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층받았다.

 1600년 선조 33년 (경자) 23세 할아버지 충렬공의 사우(祠宇)를 광주 제봉산(霽峰山) 남쪽 기슭에 세우고 큰 아버지 효열공과 아버지 의열공을 배향(配享)하였다. 청사공을 따라 금강을 건너면서 '서리 내리는 형문의 밤, 하늘은 차가워도 금강은 흐르는구나(霜落荊門夜 天寒錦水流)'라는 오언 율시 한 수를 차운(次韻)하여 지었다.

 1603년 선조 36년 (계묘) 26세 할아버지 충렬공의 사우(祠宇)에 '포충(褒忠)'이라는 편액이 내려왔다.

 1605년 선조 38년 (을사) 28세 진사(進士) 3등급(等級)에 제5등으로 입격(入格)하였고, 청사공이 수석(首席)을 차지하였다.

 1606년 선조 39년 (병오) 29세 청사공이 증광(增廣)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다.

 1608년 선조 41년 (무신) 31세 12월에 할머니 정경부인 울산 김씨가 별세(別世)하였다.

 

1.고부천(高傅川) 자는 君涉, 호는 月峯 장흥인, 제주인

月峯集(奎4291), 高傅川(朝鮮)著.

          9卷 1冊 木板本 32.2×21.3cm.

          四周雙邊 半郭:21.4×15.8cm.

          有界 10行 20字 注雙行.

          版心:上花紋黑尾.

     月峯 高傅川(1578∼1636)의 詩文集. 맨처음 저자의 아들 悔過가 원고수집을 했고  다시 그 손자 때 吟味贈遺詩 수십편을 더 얻었으며 또 현손 때에 와서는 諸家의 文集  기타 懸板 등을 참고로 더욱 增補를 해 놓았다가 1860년(哲宗 11) 6세손  時佐에  이르러 간행되었다. 高傅川의 자는 君涉, 호는 月峯으로, 進士를 거쳐 光海君 때 謁聖文科  丙科에 급제, 校書館 正字·知製敎·掌令 등의 淸職을 역임하고 奏問使 書狀官으로  明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父·叔父·祖父가 모두 殉節을 했던 義兵의 자손으로 그 역시  丁卯胡亂 때 公州 등지에서 東宮을 扈駕한 일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2편의  序文(宋來熙 및 鄭景淳) 기타 跋文 등에 많이 言及돼 있다. 鄭景淳과 宋來熙의 序文과  그가  仁祖反正 때 靖社原從功臣에 策勳됐던 傳敎가 있다. {卷1}:詩로 五·七絶句,  五·七律詩 및 五·七古詩 등 도합 70여수. 詩의 品格에 대해 洪良浩는 그의  墓碣文에서  "淸勁豪逸 如其爲人"이라 하였다. {卷2}:程文, 詩 2수(題愛蓮說後 등),  表  3편(漢鄭均謝幸其舍賜尙書祿表, 程영請以身死報宣孟及杵臼表,  擬皇朝大平院判花雲侍婢孫氏請以雲兒위見表), 論 1편(郭子儀窮奢極侈之論). {卷3}:疏箚와 啓辭. 疏箚는  儒疏(光海君의  廢母不可를 논한 疏), 封進從信錄疏(從信錄을 바치는 疏), 기타 避嫌疏·辭職疏 등  5·6편이고 啓辭는 請革罷內奴復戶啓, 迎勅習儀時館儒生事避嫌啓, 申救朴炡等啓,  請禁殺人正犯 家作亂啓 등 20여편이다. {卷4}:祭文·祝文·敎書 등 모두  應製文.  {卷5}:墓碣文으로 參軍河公大豹墓碣文 1편. {卷6}:附錄. 諸公贈遺詩 및 朝天別章인데 兩者 모두 그가  明나라에 갔다 왔을 때 國內諸士들과 和答한 글들이다. {卷7}:附錄으로  祭文,  輓章인데 金尙容, 張維, 金尙憲, 崔鳴吉, 鄭弘溟 등 15人의 것. {卷8}:附錄으로 行狀(徐憲淳  撰), 墓碣銘(洪良浩 撰). {卷9};7대손 輝鎭이 수집한 年譜로 도합 11장의 비교적  상세한 것이다. 책끝에 跋文(玄孫 萬紀·6代孫 時佐·校理 兪晩源·奎章閣 提學 金學性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