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학봉 김성일

高 山 芝 2011. 6. 14. 16:57

임금에 직언하는 강직한 성품  

    넷째 아들인 학봉 김성일의 강직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1573년 9월 학봉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경들은 나를 전대(前代)의 어느 임금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정언 정이주가 “요순 같은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더니, 학봉이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임금이 “요순과 걸주가 이와 같이 비슷한가?”라고 물으니 학봉이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으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주상이 얼굴빛을 바꾸고 고쳐 앉았으며 경연에 있던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서애 유성룡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고 응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도 얼굴빛을 고치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게 하고서 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보통 직장생활에서 윗사람이 듣기 거북한 직언을 하고 나면, 그 후유증이 최소 3년은 계속되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런데 학봉은 임금 면전에다 대놓고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직언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다”는 직언을 할 정도로 기백이 있었다. 학봉의 그 기백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는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 청계의 평소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학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풍신수길을 평하여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것 없다”라고 했던 말이 임진왜란 상황을 오판하게 했다고 하여 체포령이 내렸다. 학봉은 그 소식을 듣자 금부도사를 기다릴 것도 없이 서울로 자진출두하였다. 출두하던 도중 충청도 직산에서 경상도초유사를 임명받고 영남으로 돌아와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학봉이 진주성에 도착하니 목사와 주민이 모두 달아나 성은 텅텅 비어 심난한 상황이었다. 옆에 있던 송암(松庵), 대소헌(大笑軒) 두 사람이 산하를 쳐다보고 비통해하면서 강에 빠져 죽자고 하자 공은 웃으면서 사나이가 한번 죽는 것은 어려울 바 없으나 도사(徒死)해서야 되겠느냐 하면서 이때의 비장한 심정을 시로 읊었다. 이 시가 식자층 사이에 회자되는 ‘촉석루중삼장사(矗石樓中三壯士)’라는 유명한 시다.

촉석루에 오른 세 사나이(矗石樓中三壯士)/ 한잔 술 마시고 웃으며 남강물 두고 맹세하네(一杯笑指長江水)/ 남강물은 넘실대며 세차게 흐르누나(長江之水流滔滔)/ 저 물결 마르지 않듯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

학봉은 이 시를 쓰고 난 후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을 이끌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 진주공관에서 과로로 죽는다. 평소 학봉을 미워하던 서인들도 그 죽음을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

학봉의 성품이 강직하고 의리가 있었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 장군(霽峰 高敬命, 1533∼1592년)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광주에서 살던 제봉은 아들 종후(從厚) 인후(仁厚)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면서 셋째 아들인 용후(用厚, 당시 16세)만큼은 나이도 어린 데다 대를 잇기 위해서 안동의 학봉 집안으로 피란하라고 당부한다. 학봉집은 의리가 있는 집이니까 네가 가면 틀림없이 돌보아줄 것이라며. 이때 고용후는 안동에 혼자 간 것이 아니라 아녀자를 포함한 가솔 50여 명과 함께 피신을 갔다고 한다.

학봉 가족도 이때 임하(臨河)의 납실(猿谷)이라는 곳에 피란하고 있는 중이라 산나물로 죽을 끓여 연명하면서도, 학봉의 장남 애경당(愛景堂) 김집(金潗)은 이들과 같이 동고동락하였다. 고용후는 이곳에 머물면서 아버지와 형들을 포함한 칠백의사가 모두 금산(錦山)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했으며, 학봉부인과 김집은 상주가 된 고용후가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도록 도와주고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고용후는 50여 명에 달하는 식솔들과 함께 학봉집에서 3∼4년쯤 머물다가 전라도로 되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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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후는 학봉집에 머물 당시 학봉의 손자인 김시권(金是權)과 같이 상을 당한 처지고, 거의 동년배라서 서로 격려하며 함께 공부하였는데, 이 둘은 1605년 서울의 과거 시험장에서 반갑게 해후하였으며 고용후는 생원과에 장원으로, 김시권도 동방(同榜)으로 진사급제를 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1617년 안동부사로 부임하게 된 고용후는 파발마를 보내 학봉 선생 노부인과 장자 김집을 안동관아로 초대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잔칫날 고용후는 “소생에게 오늘의 영광이 있는 것은 후덕하신 태부인(太夫人)과 애경당(愛景堂)의 20년 전 은혜 덕택입니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 하고 울면서 큰절을 올렸다. 비슷한 연배인 고용후와 김시추, 김시권 형제는 그 후로도 친형제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며 지냈다. 영·호남 간의 이념적 동지들 사이에 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