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 낙원동 누님(고완남)집에서 발견된 이기붕씨 일가 자살 현장 사진 ]

高 山 芝 2011. 9. 29. 15:31

낙원동누님(고완남)집 이야기

70년대 말 긴급조치가 시행중인 유신시절이였다

총기소유자 자진신고기간이였던 것같다

낙원동 누님집에는 헌병대 대위로 복무했던 매형(김남:인촌 김성수의 자)의 권총이 있었다

남이 매형은 이강석대위가 아버지인 이기붕 부통령과 박마리아여사 동생 이강욱등 가족을

살해한 현장을 수사했던 수사관이였다

살해현장의 사진이 함께 나오자  누님은 징그럽다고 사진을 찢어버렸다

당시 총기자진반납을 위해 범한케이블(사장 :고택)에 근무하던 김재욱(전 장흥방첩대장)

상무가 역사적인 기록인데 버리면 안된다면서 찢어진 사진을 스카치테프로 부쳐서 나에게 준 것을 수십년이지나서야 책갈피에서 발견을 하였다 .

역사적인 기록물인 것 같아서 정리를 하였다 

 

 [좌로부터 이기붕부통령, 박마리아여사. 이강욱군.  군복을 입은 이강석대위 ]

 

 [ 머리에 피를 흘리고 누어있는 이강석 대위 ]

 

[ 박마리아 여사의 총상을 검사하고 있는 검시관 ]

 

 [ 이강욱 군의 시신 ]

 

이기붕 부통령의 시신

 

       [ 이기붕 부통령 ]

 

이기붕 부통령은 부정선거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당선되었다

그러나 4.19혁명의 발발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표적이 되었고

이기붕의 집 앞은 시위대의 함성으로 뒤덮인다

4월 25일 시위대가 서대문의 자택을 포위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기붕은

포천군의 한 군단사령부로 피신한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소식을 듣고 이틀 후 28일에 경무대로 돌아온다

경무대로 돌아온 뒤 당시 육군장교였던 이기붕의 장남 강석이 권총을 쏴서

전 가족이 집단 자살을 한다

 이기붕 부통령


일가의 자살로 끝난 이기붕의 권력

이기붕은 1945년 이승만(李承晩)의 비서로 정계에 들어갔으며,

1949년 서울특별시 시장, 1951년 국방부 장관이 되어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을 처리하였다.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李範奭)과 함께 자유당(自由黨)을 창당,

2년 후 이범석의 족청계(族靑系) 세력을 축출하고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

실권을 장악하였다.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민의원 의장이 되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重任)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

일단 부결된 것을 사사오입(四捨五入)으로 번복, 가결을 강행하였다.

1956년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고,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 때 공개·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景武臺)에 피신해 있다가

육군장교이던 장남 강석이 총으로 박마리아.이기붕.동생 강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