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성지순례 영상수필

성지순례 영상수필 - 성 소피아성당 - 4

高 山 芝 2012. 7. 10. 16:52

 

 

터키 이스탄불의 성소피아성당 (Aya sofya)     

 

비잔틴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성소피아성당이다.

터키 이스탄불의 옛 이름은 비잔티움(Visantium)으로  이곳을 점령한 고대 그리스 장군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발칸반도 동쪽끝의 보스포루스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 걸쳐져 있다.

 

324년 로마제국의 단독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330년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그곳을 콘스탄티니우스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 불렀다. 이후 로마제국은 데오도시우스황제 사후 동서로 분열되었고, 서로마제국의 수도는 그대로 로마였고,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이 476년 게르만족에게 멸망당한 뒤 천년이나 꿋꿋함을 유지하며 이탈리아 로마와 구분하기 위해 비잔틴제국이라 불린다.

 

 

 

성소피아성당(Aya Sofya)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 공인(313년 밀라노칙령) 후, 개종하고 처음으로 지어진 바실리카로, "헌신"(Αγια Σοφια) 이란 이름으로 325년 창건하였다. 고대 아폴론 신전이 있었고 마르마라 해협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의 폐허 위에 360년 10월 30일에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완성되어 도시에서 제일 크고 좋은 교회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지붕이 목조로 된 바실리카(Basilica)양식의 이 건물이었던 이 교회는 404년에 연이은 반란의 와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405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역시 바실리카 양식으로 교회를 재건하지만  53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때 유명한 농민들의 난인 ‘니키의 난’ 때 화재로 전소되어 버린다. 지금의 아야 소피아성당은 동 로마제국의 유스티나아누스 황제 때 재건한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새로운 설계에 근거하여 재건을 시작하여 537년 지금의 웅장한 크기의 성당을 완성한다.

설계는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로스가 담당하고 100명의 감독 밑에서 1만 명의 공인이 작업을 하여 5년 10개월만에 완성하였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 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전까지 916년동안 그리스 정교회가 되었고, 1453년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 500여년간 이슬람 사원으로 이용되었다. 지금은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 이들 두 종교가 공존하는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소피아는 ‘지혜 (Sophia)’라는 뜻이고, 성(聖)은 그리스어로 ‘하기야’이며, 터키말로는 ‘아야’이기 때문에 하기아소피아(Hagia Sophia) 성당 혹은 아야소피아(Aya sofya) 성당이라고 한다.

 

 

성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건립한 건축가들은 트랄레(Tralles)의 안테미우스(Anthemius)와 밀레투스(Miletus)의 이시도루스(Isidorus)이다. 안테미우스는 기하학, 통계학, 그리고 동역학에 뛰어난 사람이었고, 이시도루스는 물리학을 가르쳤으며 아치형 천정 기술에 관해 저술을 남겼다. 이시도루스는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의 저술들을 편집했을 뿐만 아니라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헤론(Heron또는 Hero)의 천장에 관한 기술적 논문들에 주석을 달았다.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 모두 포물선과 만곡의 면에 관해 연구했다.

 

성소피아성당은 안 길이 81m, 너비 70m의 광대한 3랑(廊) 바실리카 플랜과, 지름 약 33m의 거대한 원개(圓蓋)를 교묘히 조합시킨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본당은 75m X 70m 로 거의 정사각형의 그리스 십자형 플랜에 가까우며 넓이는 7,570 평방 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높이이며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장대한 구조이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이렇게 장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기둥이 아닌 15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돔이라는 사실이다. 성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양식의 견본으로서 그 후 비잔틴 건축 양식의 모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회교 사원 양식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날 회교 사원을 보면 가은데 거대한 돔과 보조돔으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사방에 네 개의 뾰족한 첨탑들(minarets)은 1453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터키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첨탑들을 세우고 회교 사원으로 사용했다. 회교사원으로 바꾸어진후 벽화들과 모자이크들은 회색 회칠이 더해졌다.

다행스럽게도 터키인들이 모자이크를 파내지 않고, 두께 5cm이상의 횟가루도 덮어버렸기 때문에 1934년에 케말 아타투루크 (터키 초대대통령)에의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나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자이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성소피아 성당은 1000년간 동방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역할하면서 수많은 시련을 겪는다.

726년부터 레오 3세 황제가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칙령을(성상금지령)을 발하면서 성소피아 성당의 많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들이 손실됐다. 또한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십자군들의 약탈 대상이 되고, 그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파티 술탄 메흐멧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흔히들 투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성당을 파괴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성당을 훼손한것은 제4차 십자군전쟁때의 엔리코 단돌로와 십자군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투르크족은 흉하게 훼손된 성당의 내부를 덧칠하여 자미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술탄 메메드 2세는 하기아 소피아를 아야소피아(ayasofya)로 바꾸고,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부터 몰수하여 자미(camii)로 사용한다. 미나레와 미흐랍을 지어서 자미로 개조하고 술탄이 매주 방문하는 오스만 제국내 가장 위상이 높은 자미가 되었다. 현재의 내부구조는 대부분 오스만 제국의 점령기에 완성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멸망과 성소피아성당>

 

 

 

동로마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최전성기였으며, 이때가 로마제국은 발칸반도와 터키의 아나톨리아지방을 비롯한 지중해 주변지역을 석권하여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4세기에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된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 후, 서로마의 비잔틴은 6세기가 되어서야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정부를 통해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때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였다. 그는 ‘시민법 대전’을 편찬해 법 체계를 정립하는데도 힘을 쏟았는데 유럽의 근대적인 법제도가 탄생하는데 기초했다. 그러나 그는 별로 인기 없는 황제였다. 전쟁하는데 힘을 쏟아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이었다.

 

서기 532년 1월, 백성들의 불만이 히포드롬에서 전차경기가 열리는 시간에 극에 달한다. 작은 시위에서 시작된 소요가 큰 폭동으로 이어지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폭동을 피해 도피하려 했다. 그때 테오도라 황후가 그를 막았다.
“도망쳐야 할 때가 아닙니다. 황제 폐하! 황제는 등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저도 황후로써 무시 받고 싶지 않아요.

안전을 걱정하신다면 해결책은 간단하옵니다. 옛 현자들의 말로 ‘죽은 자의 옷이 황제의 옷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는 말을 기억하시어 우리의 재산과 배와 군사로 저들을 치십시오!”


황후의 마음이 황제의 마음을 바꾸어 군대를 동원해 폭동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전하는 바로는 무력진압으로 3만에 가까운 사상자가 있었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당시 힘있던 시민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공로로 절대적인 황제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파괴된 교회를 복구해 웅장하고 신성한 하기아 소피아를 세우도록 했다.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는 537년 12월 27일, 단지 5년 10개월 4일 만에 100명의 장인과 10,000 명의 인부, 고대 7대 불가사의의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 온 녹색 대리석 기둥과 귀중한 건축자재들을 제국의 각 지역에서 운반했다. 로마의 판테온 기술과 초기 기독교 비잔틴 양식을 혼합하고 교회 내부에 사용된 대리석들은 지중해에 있는 국가들 및 소아시아의 대리석 석광에서 가져왔다. 본당의 양쪽에 있는 네 개의 녹색 화강석 기둥은 에페수스 항구 체육관에서 가져왔고 코너에 있는 한 쌍의 반암 대리석 기둥은 현재 레바논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가벼운 자재로 거대한 돔을 만들기 위하여 로도스 섬에서 특별한 타일과 벽돌을 운반했다.

 

 


개장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려했고 황제가 내부를 처음 보았을 때   “ 오! 솔로몬, 나는 그대를 능가했다”는 말을 남겼다.
성 소피아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로마식 기념비이다. 교회가 건축된 이래로 제국의 멸망까지 800여 년 동안 새로운 건축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 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물도 건축되지 못한 건축물 중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 받는 박물관이 되었다.

비잔틴이 교회의 권능과 더불어 세계의 중심국가로 성장하는 동안 비잔틴 황실의 후원 아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가 교역망을 더욱 확대해 아드리아해의 수많은 항구들을 관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베네치아도 이탈리아 최대의 해양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13세기에 벌어진 한 사건이 베네치아와 비잔틴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는데 1203년 제 4차 십자군 원정이 그것이다.


1203년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이 준비되고 있었다. 비잔틴의 새로운 황제가 되어야 할 한남자의 등장해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하지만 삼촌에게 쫓겨 났다. 4차 십자군 원정의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베네치아 교황청에 자신이 황제가 되면 자금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십자군은 비잔틴으로 출정했고 십자군의 힘을 등에 입은 한 남자의 황제 등극도 자명한 듯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다. 십자군이 약속했던 보상금을 받기도 전에 그 남자가 암살당한 것이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십자군 원정에 대한 자금을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분노했고 결국은 암살자 처벌이라는 명분하에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그때가 1204년 4월이었다.

불과 일주일만에 십자군이 수도를 함락했고 3일동안 전통대로 도시를 약탈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중세의 보물창고였다.

 

술탄 마흐멧이 1543년 콘스탄티니우스 11세와 맞붙어 사용했던 전술로 '배가 산으로 간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전술로 통나무와 황소들이 배를 끌고 골든 혼으로 이동해서 콘스탄티니우스 11세의 허를 찌르고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다.
결국 15세기에 이르러 난공불락의 요새로 일컬어지던 위대한 수도가 가혹한 운명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가장 강대했던 시절, 서유럽에서 중동에 이르는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 주변 지역이 세력을 넓히면서 그 영토도 계속 줄어들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적이 나타나 제국을 위협했다. 바로 이슬람교를 주축으로 뭉친 오스만 제국이었다. 콘스탄티니우스 11세가 맞섰다. 한때 천 년의 기독교 왕국을 세우며 세상의 제물을 끌어 모으며 번성했던 비잔틴 제국의 몰락은 어떠했을까! 위대했던 비잔틴 제국도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천년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슨 역사적 유물을 남겼을까!

 

 

726년에 시작된 우상타파시대에 성 소피아를 비롯한 제국 내 모든 교회의 성화 모자이크들이 파괴되면서 대신에 단순한 십자가 형상이 그려졌는데 843년에 우상타파 시대가 끝나고 종교적인 성화들이 다시 그려지게 되었고 황제의 명령에 의해 프레스코와의 모자이크로 다시 장식되기 시작했다. 1204년 4차 십자군들인 라틴군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이곳의 보물들은 십자군들에 의해 모두 약탈 당했으며, 금 바탕으로 된 모자이크들도 많이 파괴되었다.

 

라틴 기독교 십자군이 도점령했을때 교회로 이용되었고 1261년 비잔틴 왕족이 재탈환 했을 때 소피아는 다시 그리스 정교 교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지진! 수 차례에 걸친 지진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버려졌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점령한 후 이 교회는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 되었다.

 

 

술탄 마호멧은 콘스탄티노플의 위용에 감탄해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꾼채 제국의 수도로 정한다. 또한 성소피아 성당의 위용에 감탄해 이후 이슬람사원은 성소피아성당와 같은 모양으로 짓도록 칙령을 내린다. 그래서 이스탄불에 있는 이슬람사원은 하나같이 성소피아 성당을 닮았다.


정복왕 술탄 아흐멧은 1453년 6월 1일에 소피아에서 이슬람 금요 기도회를 가졌다. 그는 이 건물을 복구, 사원으로 전화하면서 ‘미흐랍’을 성지인 카바의 방향을 설치했으며 부속건물로써 첨탑과 12개의 방이 있는 회교 신학교를 세우는 반면 내부 정원과 우물, 그리고 성직자들이 사용하던 방들은 건물 앞 외부에 세워졌다. 술탄은 건물을 파손하지 않으면서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되었다.

 

537년에 건설되어 오토만에 정복되기까지 916년간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1453년부터 터키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튜르크의 명령으로 대규모의 복구 사업을 거쳐 회칠되어져 사라졌던 비잔틴 모자이크가 빛을 보고 1935년 2월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까지 481년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소피아 성당은 터키에서 세번째로 많은 방문객이 찾는 박물관이 되었다.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는 하기아 이레인(성스런 평화), 하기아 디나미스(성스런 힘)과 함께 기독교에서 신에게 봉헌된 3개의 부가물이 되었다.


참조 : http://blog.daum.net/parisjumac/18291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