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성지순례 영상수필

성지순례 영상수필 - 폼페이 유적지 - 3

高 山 芝 2012. 11. 13. 17:06

 폼페이의 발굴 과정

폼페이의 유적은 사르노 강으로부터 토레안눈치아타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16세기말에 라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매몰된 도시의 발굴은 오스트리아 점령기인 1709년에 헤르쿨라네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폼페이의 발굴 작업은 1748년에야 시작되었고, 1763년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rei publicae Pompeianorum)이 발견되었다.

발굴은 현재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어왔다. 초기의 발굴작업은 대체로 무책임했으며, 발굴자들은 주로 웅장한 건물이나 박물관에 진열할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굴은 1860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발굴 감독이 되면서 종식되었다. 그는 발굴지 사이에 놓인 지역을 정비하고 꼼꼼히 기록했다. 폼페이를 9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을 가구(街區)로 분류하고 거리의 각 문에 번호를 매겨서 각 집의 위치가 3개의 숫자로 편리하게 표시되도록 했다(그림 참조). 또한 피오렐리는 화산재 속의 시체가 분해되어 생긴 구멍에 시멘트를 부어 신체 주형을 뜨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은 고대의 문·가구·밑바닥의 주형을 뜨는 데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발굴작업은 1951년 아메데오 마이우리의 지휘 아래 집중적으로 재개되었다. 그는 1924~61년에 발굴책임을 맡았다. 제1구역과 제2구역에 있는 아본단차 가도 남쪽의 넓은 지역이 발굴되었고, 시 성벽 외곽에 쌓인 파편들이 치워졌다. 그결과 노케라 문과 이 문으로부터 누케리아까지 이르는 도로의 양편에 나란히 뻗은 멋진 공동묘지가 드러났다. 현재 폼페이의 3/4이 발굴된 상태이다.

스타비아이와 그라냐노 근처의 발굴작업은 카를로 4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으며, 1749~82년에 12채의 별장이 발굴되었다. 그후의 발굴작업은 금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어 지금도 진행중이다. 열주(列柱)에 둘러싸인 2개의 큰 안뜰과 목욕탕이 있는 산마르크 별장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다른 별장들은 그라냐노와 폼페이 근처, 스카파티·도미첼라·토레안눈치아타 근처, 보스코레알레 및 보스코트레카세 근처의 베수비오 산 아래 경사면에서 발견되었다. 그중 많은 별장들은 발굴 후 다시 묻혔지만, 유명한 수수께끼 별장을 비롯한 여러 채는 지금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