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지역의 전황과 고경명 유팽로

高 山 芝 2013. 4. 12. 15:48

전라도 지역의 전황과 유팽로 장군

 

-월파 유팽로는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정7품, 7급 공무원)였다.

-역사는 그를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기억했으며, 고경명, 김천일과 더불어 호남의 삼창의三倡義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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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팽로 장군 정렬각, 출처: 임형의 남도문학기행

 

 

◈ 전라도 지역 전황

 

전라도는 약 57개 행정구역이 있었다. 지도상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익산 위의 전라도 행정구역은 여산군, 진산군, 금산군, 용담현, 무주현, 임피현, 용안현, 함열현, 고산현이 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제1군 지휘관 소서행장 부대가 부산성을 함락시키고, 동래성, 밀양성을 함락할 즈음 제2군 가등청정 부대, 제3군 흑전장정 부대, 제4군 모리길성 부대가 4월 18일 부산에 도착했다. 제1군과 제2군은 4월 28일, 충주성을 함락시켰고, 제3군과 제4군은 추풍령을 넘어가고 있었다. 

 

  ☞ 제1군 소서행장 부대 진격로

 

  ☞ 제2군 가등청정 부대, 제3군 흑전장정 부대 진격로

 

  ☞ 제4군 모리길성 부대 진격로와 경상도 전역

 

   부산성 전투, 동래성 전투, 작원관 전투, 상주 북천 전투, 충주 탄금대 전투

 

제5군 복도정칙 부대는 4월 28일(일본력 4월 27일) 부산에 도착했다. 이 부대에는 호전승륙, 장종아부원친, 봉수하가정, 생구친정, 득거통행(내도통지) 등의 지휘관이 배속되어 있었다. 먼저 도착한 제1군~제4군의 진격로와는 달리 이들 부대는 경상좌우도를 나누어 북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측 자료에 의하면 복도정칙의 부하 '다천내기'는 제2군 가등청정 부대가 경주성을 함락한 이후 경주성에 주둔하고, 영천성 탈환 전투(1592년 7월 25일~27일) 당시 영천성에 주둔하던 막하 지휘관은 '법화'라는 인물이었다고 하며,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봉수하가정은 득거통행(아파 수군)과 함께 부산, 웅천을 거쳐 창원에 본진을 구축했다고 한다.

 

경상도 지역(경상좌도와 경상우도)에서 조선의 관군과 의병들이 일본군의 북진을 방어하고 있는 동안 전라도 지역(전라좌도와 전라우도)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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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사 김수는 일본의 침략 소식을 듣고 밀양으로 향하던 중 4월 15일 경남 반성에서 정부에 장계를 올렸다. 이때 전라감사 이광에게도 공문을 보냈으리라 추정된다. 유팽로의 <월파집>에 의하면 이광은 나주에 있었으며, 광주에 있는 고경명에게 격문을 부탁했다.

유팽로는 옥과 출신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유성룡이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을 때 호당湖堂(독서당讀書堂)에 한준겸, 정경세와 함께 천거되었다. 호당은 현재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 한강 연안의 두모포에 독서당을 짓고 이를 '동호東湖 독서당'이라 이름한데서 연유한다. 이 지역이 예전에는 호수처럼 넓고 경치가 뛰어나서 동호라 불렀다. 호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왕의 명령이 절대적이다. 뛰어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한준겸은 전쟁이 발발한 후 왕을 호종하면서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활약하기도 하고, 비서실(동부승지라는 직책)에서도 활약했다. 후에 호조판서(현재의 재정경제부장관에 해당)를 지낸다. 정경세는 고향인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1598년에는 경상 감사가 된다.

 

1592년 3월 유팽로는 선친의 3년상을 마치고 옥과에 있었는데, 4월 2일 홍문관 박사로 임명받아 한성으로 상경하였다. 4월 6일 궁으로 들어가 군사를 정비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4월 19일까지 한성에 있었는데, 4월 16일 진주판관으로 있던 김시민의 아들인 김치로부터 일본군이 침략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성에 있는 동안 유팽로는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이 방문하기도 하고, 그 당시의 이름난 관료들을 만나기도 한다. 17일에는 경상도 감사 김수의 장계가, 18일에는 전라도 감사 이광의 장계가 한성에 도착하자 한성에 있던 관료들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이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왕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에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의 막하로 있었던 이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4월 17일, 유팽로는 양주와 용인에 있는 조상의 묘를 둘러보고 18일에는 묘지기 김충남을 옥과로 먼저 내려보내고 뒤따라 내려간다.

 

유팽로는 공주를 경유, 4월 20일 순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500명(기병 2백, 보병 3백)의 부랑배들을 설득시켜 휘하 군사로 삼고, 청기(청색 기)에 '전라도의병진동장군유팽로'를 써고 기병했다. 이들을 데리고 그 다음 날인 21일 옥과로 들어왔다. 그 후 5월 2일까지 옥과에 머물면서 양산, 밀양, 상주 함락 및 조령 통과 소식을 들으며, 징병 및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5월 3일 옥과를 출발하여 곡성에 들어가고, 5일에는 동복, 7일에는 화순 최경회와 광주 김덕령을 찾아간다. 8일에는 창평, 9일에는 진원, 10일에는 장성에 들러 변이중을 방문한 다음, 11일에는 담양, 정읍, 순창에 들렀다. 이곳 순창에서 37인을 얻은 다음, 임실 갈담역까지 갔다. 12일에는 남원 윤안성 부사를 방문하고 이종 형님인 양대박 창의소를 방문하여 15일에 그곳에서 고경명에게 서간을 보냈다. 16일 옥과로 돌아오자 응모자가 천여명이 되었다. 17일에는 고경명의 답서가 왔는데 5월 23일 담양에서 회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18일에 군사를 점검하니 수천명이었다.

 

고경명과 유팽로는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지만, 고경명과 양대박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 양대박(48세)은 유팽로(28세로 추정)와 이종지간이어서 양대박이 권유하여 고경명과 서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우리들이 현재 잘 알고 있는 전라도 지역의 의병장은 김천일과 고경명, 그리고 김덕령이다. 역사 속에서 김천일의 기병은 나주(전라우도의 중심 도시)에서 5월 16일이고, 고경명은 담양(광주에서 출생)에서 5월 29일이다. 김천일의 북상은 나주에서 6월 3일이며, 고경명의 북상은 담양에서 6월 11일이다.

 

4월 20일이 유팽로가 기병한 날짜다. 전라도 지역에서 제일 먼저 기병을 한 것이다. 광주에 있는 전 동래부사 고경명과 나주에 있는 전 수원부사 김천일은 4월과 5월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김천일과 고경명은 임진왜란 발발 후 늦어도 10일 이내에는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듯 하다. 또한 남원의 양대박, 순창의 양사형, 동복의 정암수 등도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김천일을 제외한 모든 의병장을 하나의 의병군으로 결속시킨 것은 유팽로의 노력이 기폭제가 되었다.

 

김천일은 고경명, 박광옥, 정담, 최경회와 서신교환을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5월 6일 담양에서 회동을 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김천일과 고경명은 담양에서 회동을 가졌다. 고경명과 유팽로와의 서신교환은 유팽로가 5월 15일 고경명에게 먼저 서신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5월 18일 고경명으로부터 유팽로에게 서간이 왔는데, 5월 23일 담양에서 회담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세 사람의 회동은 5월 29일 담양에서 이루어졌다.  

 

김천일과 고경명이 회동을 했지만, 이들의 의병활동은 다르게 전개되었다. 왜 이렇게 진행된 것일까? 상부로부터의 근왕에 대한 의견 차이, 의병들의 혈연, 학연, 지역 연고지에 따른 고려 등이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단독 기병이었느냐 아니면 공동 기병이었느냐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김천일은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했지만, 고경명의 경우에는 옥과의 유팽로를 중심으로 남원의 양대박, 순창의 양사형 등이 지역적 네트워크 형태로 의병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트워크 형태는 대규모적일 수 밖에 없다.

 

유팽로와 양대박 등은 5월 29일, 고경명 전 동래부사를 총지휘관으로 모셨다. 유팽로는 휘하 병사 약 3,000여명을 거느렸고, 양대박은 약 2,000여명을 거느렸다. 총지휘관이 된 고경명은 6월 1일부터 며칠 동안 연속적으로 격문을 각지로 보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연구 논문이나 서적들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발발 초기 관군과 사회지도층의 행동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천일과 고경명에 대해서도 4월과 5월의 의병활동 경과 과정을 파악하지 않고 단순히 기병 날짜만 기술하는 경우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전라좌도 남부 지역에서는, 4월 21일 순천부사 권준이 육전에 참가하기 위해 이순신 좌수사(좌도 해군사령관)에게 명을 받고 전주로 출발하였다. 이순신 좌수사는 동월 27일에 직할 수군기지와 마을에 전투준비 명령을 내렸다. '29일 본영 집결, 30일 출전'.

 

전라도의 경우, 최소한 전쟁 발발 10일 이내에 관군이 최소 1만명 정도는 즉각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4월 27일 전라도 남원의 운봉에서 경상도 함양으로 출발한 방어사 곽영과 조방장 이지시의 5천 군사, 정부의 명령으로 신립 장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진했다가 중도에서 충주 함몰 소식을 듣고 전라도로 귀대한 중조방장 이유의의 2천 군사, 그리고 전라좌수영 이순신 좌수사 소속의 군사 등은 전쟁이 발발하자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월일

행선지

구체적 내용

비고

4. 20

공주, 순창

순창 대동산에 기병 200, 보병 300 규모의 고을 부랑배를 복속시킴, 청기에 '전라도의병진동장군유팽로'라 씀

순창 군수 임백영

(전쟁 준비 중)

   21

옥과

24일: 양산, 밀양 함락 소식 들음

25일: 감사 이광은 나주에 있는데, 광주목사 정윤우가 근왕을 권함

28일: 일본군이 조령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음

29일: 감사 공문(징집 명령서, 여산 집결) 도착

30일: 상주 함락 소식 들음

옥과 현감 안곡

(전쟁 준비 중)

광주 목사 정윤우

5. 3

대광사

1일: 남원의 양대박으로부터 편지 받음

3일: 선조 피난 소식 들음

 

   5

동복 관음사

충주 함락 소식 들음

 

   6

동복

 

 

   7

동복, 화순, 광주

화순 최경회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자제들에게 의병 기치 통보, 광주 김덕령 방문하였지만, 노환으로 의병 기치 거절

 

   8

창평

창평 서봉사 방문하여 영규 스님 소식 물음, 한강 함락 소식 들음

창평 현감 조효원

   9

진원

수백명과 옥과에서 만나기로 약속

 

   10

장성

장성 맥동에 변이중 방문, 장성군수 방문

 

   11

담양, 정읍, 임실

임실 갈담역에서 적병 300명 사살

임실 현감 이몽상

   12

임실, 남원

 

 

   18

옥과

15일: 유팽로와 양대박이 상의한 후 광주의 고경명에게 편지 보냄  

22일: 용인함락 소식 들음, 전라 감사 이광은 임피로 피난 가 있음

23일: 고경명 답서 도착(23일 담양에서 회담)

27일: 고경명 서신 도착 '30일에 담양에서 군사를 합치고 조직 정비'

 

   29

담양

 

 

6. 12

태인

3일: 조직 편성(군량조달-이대윤, 최상중, 군량 수송-양사형, 박천정)

4일: 광주목사 정윤우 군량 보내옴

5일: 광주 김덕령 담양 도착

8일: 고경명을 대장으로 추대, 군 조직 편제(태공병법과 오행진), 대장 고경명(황기), 전부장 안공(흑기), 후부장 양대박(적기), 좌부장 고인후(백기), 우부장 유팽로(청기)

10일: 영광 강항이 군량 10석 보냄

무주 조방장 이계정

전주 부윤 권수

전라도 도사 최철견

   13

금구

13일: 임진강 함락 소식 들음

14일: 임실 현감이 군량 1,000섬 보냄, 의병 추가 모집 위해 양대박, 고경명 둘째 아들 고형후가 남원으로 감, 맏아들 고 경우는 진중에서 기록 담담

 

   15

전주

17일: 영남 주둔 일본군이 무주 침입 소식 들음, 고인후 진안 등지에 복병

21일: 임실에 일본군 침입 소식 들음

 

   25

여산

 

 

   27

은진

28일: 황간의 일본군이 금산 점령 후 전주 침공 계획 정보 획득, 전주 사수 결정

29일: 양대박의 운암 전투

 

7. 2

진산

1일: 선조 의주 행영 설치 소식 들음

5일: 금산 군수 권종 전사

7일: 선봉-유팽로, 중군-고경명, 안공-후군, 진산 본진-고경우, 영규 수백명 도착

충청 수사 정걸

금산 군수 권종

   8

금산

 

 

   9

금산 와평

금산성 전투(제1차 금산성 전투), 방어사 곽영

일기 끝

출처: 유팽로의 월파집, 일별 기록이나 중요한 것만 발췌

 

 

◈ 일본군 편제

 

▼ 제5군 편제

 

제5군은 복도정칙을 총지휘관으로 호전승륙, 장종아부원친, 봉수하가정, 생구친정, 득거통행으로 구성되었다. 풍신수길은 1590년 11월 7일 조선 통신사를 복견성에서 접견했으나, 요구사항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 다음 해인 1591년 1월 20일, 군대수송용 선박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서에는 동으로는 상륙常陸, 남으로는 4국四國, 구주九州 연해, 북으로는 추전 秋田 주전酒田에서 중국中國까지 10만석 번주에게는 대선 2척, 수부水手(노잡이)는 해안의 100가구당 10명씩 대선에 투입하고, 나머지는 대판으로 보낼 것, 직할지인 경우 10만석 번주에게는 대선 3척, 중선 5척 건조할 것 등 4가지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0년에 조선을 정벌하겠다는 선포가 있었으나 군대수송용 선박은 그 다음 해인 1591년 1월 20일에 착수되었다. 조선정벌이 늦어진 이유는 수군(해군)의 준비가 부진했기 때문이다. 해전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해전을 지휘할 총지휘관도 없었다. 협판안치의 1,500 병사 중 1,000명, 가등가명의 1,000명 병사 중 500명은 해당 지역의 수부(노잡이)들을 징용해서 수군을 만들었다. 이 당시 일본군 수군의 주 기능은 육군의 수송이었으며, 전투 기능은 부차적인 기능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나마 독립적인 수군 체제로 출진한 것은 협판안치, 가등가명, 구귀가융이다.

 

☞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 수군(해군) 편제

 

소뢰보암의 <태합기>에는 해군이 지켜야 할 7가지 수칙이 들어 있다. 해전을 수행할 경우에는 다수결로 결정할 것, 타 부대가 곤란을 겪을 때는 즉각 지원해 줄 것, 작전계획은 서로간 정보 공유를 원칙으로 할 것, 전공은 명확하게 보고할 것, 타 부대의 전공을 도둑질하지 말 것, 각 지휘관은 초탐선 2척을 배치할 것, 명호옥 본진에 보고할 경우 군봉행軍奉行을 경유할 것 등이다.

 

1591년 8월에는 내년 3월 1일 명국을 정벌하겠다고 선포했다. 1592년 3월 13일에는 모리휘원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전하는 병력은 육군은 1번대에서 9번대까지 15만 8천 700명, 수군은 9천 200명(상산일청의 동생인 상산소전차의 1,000 병력을 추가할 경우 1만 1천 200명)이며, 일본군 본영인 명호옥성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10만여명 등이다. 수군으로 편제된 내도형제는 5번대로 편입시켰다. 7월 17일에는 관달장(관평우위문달장)과 그의 아들인 화천·약협·권지조和泉·若狹·權之佐를 경고선봉행警固船奉行(수군의 행동과 전과 보고 등 경계에 대한 총감독)으로 임명했다. 이 당시 풍신수길의 조선에 대한 확신은 <모리가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있다. 풍신수길은 조선이 위협을 느껴 명나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해 줄것으로 믿고 있었다.

 

제5군에 편성된 득거통행은 사국四國 이여伊予 내도來島를 중심으로 활약한 아파수군阿波水軍이었다. 제5군은 1592년 3월 26일 경도京都를 출발하여 명호옥을 경유, 4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① 복도정칙 ② 장종아부원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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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봉수하가정(덕도성) ④ 생구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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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병력

지배영역

비고

복도정칙福島正則 후쿠시마 마사노리=대은둔

4,800

안예 광도

어릴 때 市松, 正則 별칭 左衛門大夫, 淸須侍從 관위 左衛門尉, 左近衛權少將, 어머니 풍신수길의 숙모

  부장 다천내기多川內記

 

  2군 가등청정군이 4.21 경주읍성 함락 후에 주둔

  부장 법화法化

 

   

  가신 대기장행大崎長行 오사키 오사유키

 

 

玄蕃允 宇右衛門, 與一郎, 與八郎, 藤藏 兵庫, 賤ヶ岳七本槍 시즈카다케 칠본창

  가노 미관정승 尾關正勝

 

 

石見守, 외눈, 가문의 문장은 丸之內三貫團子(목을 칼로 꼬챙이에 궤는 모양을 본뜬 것, 조선에서의 용맹을 표시)

  가신 겸전신개 鎌田新介 카마타 신중재

 

  남원성 전투 때 사망

  가신 志賀小左衛門 시가 오사 마모루 문

 

 

太郎親次, 親善대우의통 가신이었으나 조선에서 도망하여 복도정칙 가신이 됨, 천주교 신자(돈 바울)

  가신 고단우위문?團右衛門

 

  가등가명 따라 출병, 후에 가등가, 소조천수추, 복도정칙 섬김

  가신 길촌선충吉村宣充 요시무라 노부미츠

 

 

又右衛門, 17세에 출병, 진에서 돌아온 후 복도정칙과 불화, 낭인이 됨

호전승륙戶田勝隆 도다 가츠다카

3,900

(4,000)

伊予 대주

三郎四郎, 民部少輔, 駿河守, 강항의 간양록에는 호전치부대보라 기록되어 있는데, 누구인지 확인 요망

장종(증)아부원친長宗(曾)我部元親 조소가베 모토치카

3,000

 

어릴 때 彌三郎, 관위 宮內少輔, 土佐守

  아들 장종아부성친長宗我部盛親=장증아부토우수성친長曾我部土佑守盛親=     토좌수성친土佐守盛親

 

 

어릴 때 千熊丸, 별칭 右衛門太郎, 관위 宮內少輔, 土佐守

  형제 향종아부친태香宗我部親泰 코우소까베 치까야스

 

 

어릴 때 彌七郎, 비공식 관직명 內記, 安守, 위의 부장 다천내기를 말하는 것 같음, 1593년 장문長門에서 급사

    아들 향종아부친씨香宗我部親氏 코우소까베 치까우지

 

  장종아부원친을 대신해 해전에 출전, 웅천해전에서 전사(21세)

  가신 길전정중吉田政重 요시다 마사시게

 

  1592년 출병, 적장 포로 잡음, 진지 망치는 호랑이 퇴치

  가신 광부권지조光富權之助

 

 

權之介, 토좌 좌하성土佐佐賀城 성주, 1592년 출병, 해전에서 중상, 귀국 도중 아파阿波에서 사망

  가신 상명친승桑名親勝

 

  1593년 웅천(?) 사망

  가신 이여목국안伊與木國安

 

 

번다군幡多郡 이여목성伊與木城의 성주 고강高康의 아들

  가신 미좌고도심梶佐古道尋

 

 

源左衛門, 법명 天德法岸居士, 1592년 말 조선에서 사망

  가신 원견가순垣見家純

 

 

별칭 一直, 관위 화천수和泉守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 하치스가 이에마사=蜂須賀阿波守家政=阿波守家政

7,200

덕도德島

별명 彦右衛門, 관위 阿波守

  가신 삼촌춘森村春=삼지마수촌춘森志摩守村春

 

아파 복정장

아파 수군阿波水軍, 해적대장, 지마수志摩守, 阿波 福井莊, 웅천 진격, 1592년 6월 5일 당항포 해전 사망

     아들 삼지마수충촌森志摩守忠付

     

  가신 삼신정씨촌森新正氏村=삼심대부씨순森甚大夫氏純

   

웅천 진격, 甚大夫 가의 시조, 울산성 전투 참가

  가신 삼심오병위촌중森甚五兵衛村重

   

村春의 조카, 작은 아버지 新正氏村과 함께 村春의 사체를 인양함, 전사한 득거통행 대신 지휘관이 됨, 울산성 전투 참가

  가노 도전식원稻田稙元=도전좌마윤식원稻田左馬允稙元=도전수리향시식稻          田修理亮示植

 

아파 협성

좌마개左馬介, 1585년 阿波脇城主 1만석, 1592, 97년 출병, 97년 남원성 전투 때 전공

  가노 중촌중우中村重友=중촌우근대부중우中村右近大夫重友

     

  가노 임능승林能勝=임도서조능승林圖書助能勝

 

 

助藏, 五郎兵衛, 圖書助, 道感, 1585년 덕도성 근처 川島城 번주

  가신 암전광장岩田光長=암전칠좌위문광장岩田七左衛門光長

     

  가신 수천여삼좌위문중승數川與三左衛門重勝

     

  가신 십오랑대부호승?五?大夫好勝

     

  가신 금지치병위今枝治兵衛

     

  가신 산전종중山田宗重

 

 

織部正, 三哲

  가신 삼호방일三好房一

 

 

新右衛門, 관위 丹後守

  가신 건충청乾忠淸

 

 

통칭 長大夫

  가신 견원우지개?原牛之介

    당항포해전 실

  가신 소삼육대부小森六大夫

    당항포해전 실

  가신 율전반칠粟田半七

    당항포해전 실

  가신 도부식부渡部式部

    당항포해전 실

  가신 미마여칠美馬與七

     

  가신 위전판차랑가충位田判次郎家忠=세산가병위가충笹山加兵衛家忠

    1597년 남원성 전투 1차로 성문 돌파

  가신 중산원병위일강中山源兵衛一綱

    1597년 남원성 전투 전공

  가신 파다신시波多信時

    1598년 명량해전 전사

  가신 통구내장조정장?口內藏助正長

    1598년 울산성 전투 참가

  가신 소남가하우위문씨장小南加賀右衛門氏長

   

1598년 울산성 전투 참가

  가신 영강가우위문장정鈴江嘉右衛門長定

   

1598년 울산성 전투 참가

  가신 미관저우위문尾關猪右衛門

     

생구친정生駒親正 이코마 치카마사=生駒雅樂正(頭)=우단둔

5,500

찬기讚岐

별명 甚助, 近規, 近正, 政勝, 正成, 近親, 관위 雅樂頭, 左近大夫, 번주 讚岐 高松, 조선 출병 당시 67세, 1598년 5대로, 5봉행 설치 시 3중노 설치, 3중노 중의 1인

  아들 생구일정生駒一正=찬기수일정讚岐一正=生駒讚岐一正

 

  울산성 전투 활약

득거통행得居通幸 도쿠이 미치유키=내도통지來島通之=내도통구來島通久

700

 

별칭 通之, 通久, 通年, 사료에 따라 사망 연월에 여러 설이 있음(1592년 6월 2일, 6월 6일, 6월 7일, 9월 2일, 1594년 1월 말~2월 초)

  동생 내도통총來島通總 구루시마 미치후사

 

 

어릴 때 牛松丸, 통칭 助兵衛, 4국(시코쿠) 인솔, 5번대 따라 도해, 충청도 진격, 수군으로 재편, 1597년 수군으로 편제되어 남원성 전투에 600명 인솔 후 수군으로 남해안 연해 침탈

총병력

25,100

 

 

복도정칙: 1592년 죽도 대관으로 병참 임무, 1592년말 경기도 죽산 수비, 주임무 이요伊予 수군으로 하여금 해상병참수송, 충청도 병참 봉행, 보급로 경비, 충청도 진압, 1593년 진주성 공격, 일시귀국, 다시 출병, 부산진출, 강화교섭 전개 남부포진 결정되자 거제도 송진포성, 장문포성 수비, 1594년 10월 이순신 장문포 해전, 정칙이 해군 지휘, 이순신 분멸하자 반격하고 격퇴(정한록, 참모본부 조선역), 1595년 미장尾張 청주 24만석 증가, 호전승륙: 1593년 거제도 주둔, 강화교섭기 귀국 도중 병사, 1594년 강화교섭기 귀국 도중 병사(10월 23일), 장종아부원친: 1592년 출병, 1593년 6월 교섭기간 중 귀국, 1596년 4월, 8월 26일, 1597년 3월 24일 분국법, <장종아부원친 100개조> 제정, 6월 조선 재정벌, 사천 축성(봉행은 원견가순垣見家純, 1592년 목부로 도해, 전황보고 과정에서 가등청정과 대립, 1593년 대우의통 재산 몰수 후 1594년 풍후 부래 2만석 포상, 관위 화천수和泉守, 별칭 一直, 장종아부원친과 사천 축성 때 총포 구멍 위치 높이에 대해 의견 교환), 1598년 3월 귀국, 8월 16일 풍신수길 사망, 봉수하가정: 1592년, 97년 출병, 1592년 아파 수군을 이끌고 부산, 웅천을 경유해 창원에 본진 구축,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의 전공 다툼을 조정해 줌, 부산으로 퇴각 후 거제도 주둔, 1593년 11월 양국간 평화교섭이 이루어지고 12월에 명호옥 도착, 1593년 12월  1597년 창원 주둔, 남원성 전투, 울산성 전투 구원군, 천야행장 원조, 전선 축소 주장하다 1598년 5월 귀국 도중 석전삼성의 참언을 듣고 복견성 가지 않고 덕도성으로 감, 생구친정: 가문 문장, 조선 정벌 당시 도해 시 문장이 파도에 절반 잠기고, 그 후 조선에서 승전을 거두어 절반인 채로 그냥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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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군 편제

 

① 소조천융경 ② 소조천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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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입화종무 ④ 입화종무의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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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병력

지배영역

비고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0,000

삼원三原

毛利氏→小早川氏, 어릴 때 又四郎, 통칭 筑前宰相, 관위 中務大輔, 左衛門佐, 權中納言, 양자 秀包, 秀秋

  동생 天野元政

 

 

통칭 少輔六郎, 六郎左衛門尉, 관위 掃部守, 讚岐守, 1592년, 97년 출병

  동생 末次元康

 

 

관명 兵部大輔, 大?大輔, 1592년, 97년 출병

  잉미종승乃美宗勝

 

 

新四郎, 兵部丞, 관위 備前守, 1592년 출병, 조선에서 발병, 귀국 후 9월 23일 사망

  촌상경광村上景廣

 

 

어릴 때 又鶴丸, 별칭 元平, 少輔次郎, 彈正, 통칭 八郎左衛門尉, 1592년 해전 익숙지 않아 등당고호에 배속되어 보좌

  촌상경친村上景親

 

 

통칭 三郎兵衛尉, 源八郎, 길천광가吉川廣家에 배속, 부인은 조선인 포로 귀족의 딸, 소조천융경 은거 후 아버지와 형은 모리씨 배속, 경친은 소조천가 잔류, 소조천수추 가신이 됨, 1597년 소조천융경 사후 모리씨에 배속

소조천수포小早川秀包(소조천융경의 동생)

1,500

 

어릴 때 才菊丸 별칭 藤四郎, 수령명受領名市正, 內記, 성씨 어릴 때 毛利才菊丸→大田才菊丸, 그 후 大田元綱→小早川元總→小早川秀包→毛利秀包, 양자 형제 小早川秀秋

  가신 횡산경의橫山景義

 

  1593년 1월 26일 벽제관 전투 사망

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

 

 

별칭 金吾, 金吾中納言, 筑前中納言, 岡山中納言, 관위 左衛門督, 權中納言, 어릴 때辰之助, 그 후 木下秀俊→羽柴秀俊→小早川秀秋→秀詮, 양부 豊臣秀吉→小早川隆景

  형제 목하승준木下勝俊

 

  출병

  가신 산구종영山口宗永

 

 

玄蕃允, 玄蕃頭, 별칭山口正弘, 1597년 소초천수추 보좌, 울산성 전투, 지원군

  가노 도엽정성稻葉正成

 

 

관위 內匠頭, 1597년 출병, 보좌

  가신 장기원가長崎元家

 

  1592년, 97년 전공

입화종무立花宗茂

2,500

 

어릴 때 千熊丸 彌七郎, 高橋統虎, 관위 飛驒守

  가신 십시연구十時連久=十時傳右衛門

 

 

惟道, 傳右衛門, 1593. 1. 26. 벽제관 전투 사망

  가신 지변영성池邊永晟=池邊龍右衛門

 

 

龍右衛門, 1593. 1. 26 벽제관 전투 사망

  가신 소야성행小野成幸=小野喜八郞

 

 

喜八郞, 1593. 1. 26 벽제관 전투 사망

  가신 안동상구安東常久=安東善右衛門

 

 

善右衛門, 1593. 1. 26 벽제관 전투 사망

  가신 소환성중小串成重=小串忠左衛門

 

 

忠左衛門, 1593. 1. 26 벽제관 전투 사망

  가신 입화성가立花成家

 

  6월말 연안 전투 혹은 김천일 장단 전투

  가신 유포유차由布惟次

 

  6월말 연안전투 혹은 김천일 장단 전투

  가신 소야진행小野鎭幸

 

 

和泉守, 日本七槍, 立花四天王 중의 하나, 1592년, 97년 출병

  가신 십시연정十時連貞

 

 

孫右衛門, 관위 攝津守, 1592년 출병

입화직차(고교통증)立花直次(高橋統增)(입화종무 동생)

800

 

어릴 때 高橋統增, 관위 主膳正, 民部少輔, 아내는 축자광문의 딸, 명군이 입화종무를 포위했을 때 혈로 구출

축자광문筑紫廣門

900

 

관위 左馬頭, 上野介, 1592년, 97년 출병

총병력

15,700

   

소조천융경: 1592년 60세에 출전, 1593년 벽제관 전투(입화종무), 1594년 풍신수길豊臣秀吉 양자인 우시수준羽柴秀俊(小早川秀秋)을 양자로 받아들임, 1595년 가독 승계한 후 은거, 수길 축전 5만석을 은거료로 파격적으로 지급, 1597년 6월 12일 사망(65세), 소조천수포: 1592년 1,500명 전라도 공략, 대고성大鼓城 공성전, 벽제관 전투,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1594년 풍신수길의 양자 목하수준木下秀俊(소조천수추)이 소조천융경의 양자가 되자 수포는 폐적되면서 별가 창설, 1597년 출병, 죽도성, 성주곡성 방어전, 소조천수추: 1597년 2월 1일 조선출병 명 받음, 5월 22일 대판에서 축전으로 돌아옴, 6월 29일 명호옥 출발, 7월 17일 부산 상륙, 부산 주변 수비, 양산왜성, 12월 울산성 전투, 소조촌 병력은 서생포왜성 경유하여 명조선군 포위, 울산왜성 구원, 12월 4일 귀국 명령, 1598년 1월 29일 귀국, 소조천수추 귀국 후 소조천 병력 500 잔류, 사택정성 배속, 부산 수비, 사택정성은 5월 중 귀국, 입화종무: 1592년 6월 한성회담 후 전라도 공략 할당, 6번대 충청도로 남하, 7월~8월 금산, 양단산 수차례 공격, 조헌과 영규가 공격 받음, 후방 공격, 침공 지체, 7월 조승훈 평양 공격 후 주력군 소조천융경은 한성 방면으로 지원 출발, 입화종무는 잔류 병력으로 전라도 침공 금산, 무주 공략, 점령 유지, 후에 한성 방면으로 출발, 황해도 우봉 주둔, 1593년 벽제관 전투, 동생 입화직차(고교직차, 고교통증) 전방 배치, 철포 속사 후 기급전, 소조천융경의 본대가 명군 격파, 소조천융경이 <입화가의 3,000 병력은 다른 가문의 1만명에 필적>, 6월 제2차 진주성, 융경 및 5번대 명조선군 후위 부대 차단, 공성전 이전에 진주성 동북방 성주 일대 유정 수만 집결, 6월 13일 임호 무장 명조선군 4만명 진주성 진군, 제6군 입화종무, 소조천수포 병력 4천 성주행 격퇴, 1597년 안골포 수비, 정읍회의 보고서 수길에게 보냄, 남부 재포진 당초계획, 부산 수비, 최종적 결정은 길성은 부산, 종무는 고성 수비, 제1차 울산성 전투, 도진의홍 1월 6일 석전삼성에게 보낸 서장 '와도직무, 승무 울산 지원 위해 마산왜성 비어 있음, 1598년 1월 2일 조명군 부산습격(우키다 히데이에), 종무에게 지원 요청, 8백명으로 고책 부대 2만 2천 야습, 불화살 습격, 7백 수급, 울산왜성 공격, 가등청정 포위, 부산 제장들 회담, 9월 조명 4로 병진, 고성수비, 도진충환 사천공격 통보 받음, 9월 28일 순천왜성 봉쇄, 입화직차, 도진의홍, 종의지, 사택광고 수군 편성하여 구원 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