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지역의 전황과 고경명 유팽로
전라도 지역의 전황과 유팽로 장군
-월파 유팽로는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정7품, 7급 공무원)였다. -역사는 그를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기억했으며, 고경명, 김천일과 더불어 호남의 삼창의三倡義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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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팽로 장군 정렬각, 출처: 임형의 남도문학기행
◈ 전라도 지역 전황
전라도는 약 57개 행정구역이 있었다. 지도상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익산 위의 전라도 행정구역은 여산군, 진산군, 금산군, 용담현, 무주현, 임피현, 용안현, 함열현, 고산현이 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제1군 지휘관 소서행장 부대가 부산성을 함락시키고, 동래성, 밀양성을 함락할 즈음 제2군 가등청정 부대, 제3군 흑전장정 부대, 제4군 모리길성 부대가 4월 18일 부산에 도착했다. 제1군과 제2군은 4월 28일, 충주성을 함락시켰고, 제3군과 제4군은 추풍령을 넘어가고 있었다.
☞ 제2군 가등청정 부대, 제3군 흑전장정 부대 진격로
☞ 부산성 전투, 동래성 전투, 작원관 전투, 상주 북천 전투, 충주 탄금대 전투
제5군 복도정칙 부대는 4월 28일(일본력 4월 27일) 부산에 도착했다. 이 부대에는 호전승륙, 장종아부원친, 봉수하가정, 생구친정, 득거통행(내도통지) 등의 지휘관이 배속되어 있었다. 먼저 도착한 제1군~제4군의 진격로와는 달리 이들 부대는 경상좌우도를 나누어 북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측 자료에 의하면 복도정칙의 부하 '다천내기'는 제2군 가등청정 부대가 경주성을 함락한 이후 경주성에 주둔하고, 영천성 탈환 전투(1592년 7월 25일~27일) 당시 영천성에 주둔하던 막하 지휘관은 '법화'라는 인물이었다고 하며,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봉수하가정은 득거통행(아파 수군)과 함께 부산, 웅천을 거쳐 창원에 본진을 구축했다고 한다.
경상도 지역(경상좌도와 경상우도)에서 조선의 관군과 의병들이 일본군의 북진을 방어하고 있는 동안 전라도 지역(전라좌도와 전라우도)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을까?
경상감사 김수는 일본의 침략 소식을 듣고 밀양으로 향하던 중 4월 15일 경남 반성에서 정부에 장계를 올렸다. 이때 전라감사 이광에게도 공문을 보냈으리라 추정된다. 유팽로의 <월파집>에 의하면 이광은 나주에 있었으며, 광주에 있는 고경명에게 격문을 부탁했다.
유팽로는 옥과 출신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유성룡이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을 때 호당湖堂(독서당讀書堂)에 한준겸, 정경세와 함께 천거되었다. 호당은 현재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 한강 연안의 두모포에 독서당을 짓고 이를 '동호東湖 독서당'이라 이름한데서 연유한다. 이 지역이 예전에는 호수처럼 넓고 경치가 뛰어나서 동호라 불렀다. 호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왕의 명령이 절대적이다. 뛰어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한준겸은 전쟁이 발발한 후 왕을 호종하면서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활약하기도 하고, 비서실(동부승지라는 직책)에서도 활약했다. 후에 호조판서(현재의 재정경제부장관에 해당)를 지낸다. 정경세는 고향인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1598년에는 경상 감사가 된다.
1592년 3월 유팽로는 선친의 3년상을 마치고 옥과에 있었는데, 4월 2일 홍문관 박사로 임명받아 한성으로 상경하였다. 4월 6일 궁으로 들어가 군사를 정비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4월 19일까지 한성에 있었는데, 4월 16일 진주판관으로 있던 김시민의 아들인 김치로부터 일본군이 침략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성에 있는 동안 유팽로는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이 방문하기도 하고, 그 당시의 이름난 관료들을 만나기도 한다. 17일에는 경상도 감사 김수의 장계가, 18일에는 전라도 감사 이광의 장계가 한성에 도착하자 한성에 있던 관료들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이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왕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에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의 막하로 있었던 이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4월 17일, 유팽로는 양주와 용인에 있는 조상의 묘를 둘러보고 18일에는 묘지기 김충남을 옥과로 먼저 내려보내고 뒤따라 내려간다.
유팽로는 공주를 경유, 4월 20일 순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500명(기병 2백, 보병 3백)의 부랑배들을 설득시켜 휘하 군사로 삼고, 청기(청색 기)에 '전라도의병진동장군유팽로'를 써고 기병했다. 이들을 데리고 그 다음 날인 21일 옥과로 들어왔다. 그 후 5월 2일까지 옥과에 머물면서 양산, 밀양, 상주 함락 및 조령 통과 소식을 들으며, 징병 및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5월 3일 옥과를 출발하여 곡성에 들어가고, 5일에는 동복, 7일에는 화순 최경회와 광주 김덕령을 찾아간다. 8일에는 창평, 9일에는 진원, 10일에는 장성에 들러 변이중을 방문한 다음, 11일에는 담양, 정읍, 순창에 들렀다. 이곳 순창에서 37인을 얻은 다음, 임실 갈담역까지 갔다. 12일에는 남원 윤안성 부사를 방문하고 이종 형님인 양대박 창의소를 방문하여 15일에 그곳에서 고경명에게 서간을 보냈다. 16일 옥과로 돌아오자 응모자가 천여명이 되었다. 17일에는 고경명의 답서가 왔는데 5월 23일 담양에서 회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18일에 군사를 점검하니 수천명이었다.
고경명과 유팽로는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지만, 고경명과 양대박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 양대박(48세)은 유팽로(28세로 추정)와 이종지간이어서 양대박이 권유하여 고경명과 서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우리들이 현재 잘 알고 있는 전라도 지역의 의병장은 김천일과 고경명, 그리고 김덕령이다. 역사 속에서 김천일의 기병은 나주(전라우도의 중심 도시)에서 5월 16일이고, 고경명은 담양(광주에서 출생)에서 5월 29일이다. 김천일의 북상은 나주에서 6월 3일이며, 고경명의 북상은 담양에서 6월 11일이다.
4월 20일이 유팽로가 기병한 날짜다. 전라도 지역에서 제일 먼저 기병을 한 것이다. 광주에 있는 전 동래부사 고경명과 나주에 있는 전 수원부사 김천일은 4월과 5월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김천일과 고경명은 임진왜란 발발 후 늦어도 10일 이내에는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듯 하다. 또한 남원의 양대박, 순창의 양사형, 동복의 정암수 등도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김천일을 제외한 모든 의병장을 하나의 의병군으로 결속시킨 것은 유팽로의 노력이 기폭제가 되었다.
김천일은 고경명, 박광옥, 정담, 최경회와 서신교환을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5월 6일 담양에서 회동을 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김천일과 고경명은 담양에서 회동을 가졌다. 고경명과 유팽로와의 서신교환은 유팽로가 5월 15일 고경명에게 먼저 서신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5월 18일 고경명으로부터 유팽로에게 서간이 왔는데, 5월 23일 담양에서 회담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세 사람의 회동은 5월 29일 담양에서 이루어졌다.
김천일과 고경명이 회동을 했지만, 이들의 의병활동은 다르게 전개되었다. 왜 이렇게 진행된 것일까? 상부로부터의 근왕에 대한 의견 차이, 의병들의 혈연, 학연, 지역 연고지에 따른 고려 등이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단독 기병이었느냐 아니면 공동 기병이었느냐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김천일은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했지만, 고경명의 경우에는 옥과의 유팽로를 중심으로 남원의 양대박, 순창의 양사형 등이 지역적 네트워크 형태로 의병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트워크 형태는 대규모적일 수 밖에 없다.
유팽로와 양대박 등은 5월 29일, 고경명 전 동래부사를 총지휘관으로 모셨다. 유팽로는 휘하 병사 약 3,000여명을 거느렸고, 양대박은 약 2,000여명을 거느렸다. 총지휘관이 된 고경명은 6월 1일부터 며칠 동안 연속적으로 격문을 각지로 보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연구 논문이나 서적들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발발 초기 관군과 사회지도층의 행동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천일과 고경명에 대해서도 4월과 5월의 의병활동 경과 과정을 파악하지 않고 단순히 기병 날짜만 기술하는 경우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전라좌도 남부 지역에서는, 4월 21일 순천부사 권준이 육전에 참가하기 위해 이순신 좌수사(좌도 해군사령관)에게 명을 받고 전주로 출발하였다. 이순신 좌수사는 동월 27일에 직할 수군기지와 마을에 전투준비 명령을 내렸다. '29일 본영 집결, 30일 출전'.
전라도의 경우, 최소한 전쟁 발발 10일 이내에 관군이 최소 1만명 정도는 즉각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4월 27일 전라도 남원의 운봉에서 경상도 함양으로 출발한 방어사 곽영과 조방장 이지시의 5천 군사, 정부의 명령으로 신립 장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진했다가 중도에서 충주 함몰 소식을 듣고 전라도로 귀대한 중조방장 이유의의 2천 군사, 그리고 전라좌수영 이순신 좌수사 소속의 군사 등은 전쟁이 발발하자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출처: 유팽로의 월파집, 일별 기록이나 중요한 것만 발췌
◈ 일본군 편제
▼ 제5군 편제
제5군은 복도정칙을 총지휘관으로 호전승륙, 장종아부원친, 봉수하가정, 생구친정, 득거통행으로 구성되었다. 풍신수길은 1590년 11월 7일 조선 통신사를 복견성에서 접견했으나, 요구사항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 다음 해인 1591년 1월 20일, 군대수송용 선박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서에는 동으로는 상륙常陸, 남으로는 4국四國, 구주九州 연해, 북으로는 추전 秋田 주전酒田에서 중국中國까지 10만석 번주에게는 대선 2척, 수부水手(노잡이)는 해안의 100가구당 10명씩 대선에 투입하고, 나머지는 대판으로 보낼 것, 직할지인 경우 10만석 번주에게는 대선 3척, 중선 5척 건조할 것 등 4가지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0년에 조선을 정벌하겠다는 선포가 있었으나 군대수송용 선박은 그 다음 해인 1591년 1월 20일에 착수되었다. 조선정벌이 늦어진 이유는 수군(해군)의 준비가 부진했기 때문이다. 해전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해전을 지휘할 총지휘관도 없었다. 협판안치의 1,500 병사 중 1,000명, 가등가명의 1,000명 병사 중 500명은 해당 지역의 수부(노잡이)들을 징용해서 수군을 만들었다. 이 당시 일본군 수군의 주 기능은 육군의 수송이었으며, 전투 기능은 부차적인 기능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나마 독립적인 수군 체제로 출진한 것은 협판안치, 가등가명, 구귀가융이다.
소뢰보암의 <태합기>에는 해군이 지켜야 할 7가지 수칙이 들어 있다. 해전을 수행할 경우에는 다수결로 결정할 것, 타 부대가 곤란을 겪을 때는 즉각 지원해 줄 것, 작전계획은 서로간 정보 공유를 원칙으로 할 것, 전공은 명확하게 보고할 것, 타 부대의 전공을 도둑질하지 말 것, 각 지휘관은 초탐선 2척을 배치할 것, 명호옥 본진에 보고할 경우 군봉행軍奉行을 경유할 것 등이다.
1591년 8월에는 내년 3월 1일 명국을 정벌하겠다고 선포했다. 1592년 3월 13일에는 모리휘원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전하는 병력은 육군은 1번대에서 9번대까지 15만 8천 700명, 수군은 9천 200명(상산일청의 동생인 상산소전차의 1,000 병력을 추가할 경우 1만 1천 200명)이며, 일본군 본영인 명호옥성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10만여명 등이다. 수군으로 편제된 내도형제는 5번대로 편입시켰다. 7월 17일에는 관달장(관평우위문달장)과 그의 아들인 화천·약협·권지조和泉·若狹·權之佐를 경고선봉행警固船奉行(수군의 행동과 전과 보고 등 경계에 대한 총감독)으로 임명했다. 이 당시 풍신수길의 조선에 대한 확신은 <모리가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있다. 풍신수길은 조선이 위협을 느껴 명나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해 줄것으로 믿고 있었다.
제5군에 편성된 득거통행은 사국四國 이여伊予 내도來島를 중심으로 활약한 아파수군阿波水軍이었다. 제5군은 1592년 3월 26일 경도京都를 출발하여 명호옥을 경유, 4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복도정칙: 1592년 죽도 대관으로 병참 임무, 1592년말 경기도 죽산 수비, 주임무 이요伊予 수군으로 하여금 해상병참수송, 충청도 병참 봉행, 보급로 경비, 충청도 진압, 1593년 진주성 공격, 일시귀국, 다시 출병, 부산진출, 강화교섭 전개 남부포진 결정되자 거제도 송진포성, 장문포성 수비, 1594년 10월 이순신 장문포 해전, 정칙이 해군 지휘, 이순신 분멸하자 반격하고 격퇴(정한록, 참모본부 조선역), 1595년 미장尾張 청주 24만석 증가, 호전승륙: 1593년 거제도 주둔, 강화교섭기 귀국 도중 병사, 1594년 강화교섭기 귀국 도중 병사(10월 23일), 장종아부원친: 1592년 출병, 1593년 6월 교섭기간 중 귀국, 1596년 4월, 8월 26일, 1597년 3월 24일 분국법, <장종아부원친 100개조> 제정, 6월 조선 재정벌, 사천 축성(봉행은 원견가순垣見家純, 1592년 목부로 도해, 전황보고 과정에서 가등청정과 대립, 1593년 대우의통 재산 몰수 후 1594년 풍후 부래 2만석 포상, 관위 화천수和泉守, 별칭 一直, 장종아부원친과 사천 축성 때 총포 구멍 위치 높이에 대해 의견 교환), 1598년 3월 귀국, 8월 16일 풍신수길 사망, 봉수하가정: 1592년, 97년 출병, 1592년 아파 수군을 이끌고 부산, 웅천을 경유해 창원에 본진 구축,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의 전공 다툼을 조정해 줌, 부산으로 퇴각 후 거제도 주둔, 1593년 11월 양국간 평화교섭이 이루어지고 12월에 명호옥 도착, 1593년 12월 1597년 창원 주둔, 남원성 전투, 울산성 전투 구원군, 천야행장 원조, 전선 축소 주장하다 1598년 5월 귀국 도중 석전삼성의 참언을 듣고 복견성 가지 않고 덕도성으로 감, 생구친정: 가문 문장, 조선 정벌 당시 도해 시 문장이 파도에 절반 잠기고, 그 후 조선에서 승전을 거두어 절반인 채로 그냥 사용함.
▼ 제6군 편제
소조천융경: 1592년 60세에 출전, 1593년 벽제관 전투(입화종무), 1594년 풍신수길豊臣秀吉 양자인 우시수준羽柴秀俊(小早川秀秋)을 양자로 받아들임, 1595년 가독 승계한 후 은거, 수길 축전 5만석을 은거료로 파격적으로 지급, 1597년 6월 12일 사망(65세), 소조천수포: 1592년 1,500명 전라도 공략, 대고성大鼓城 공성전, 벽제관 전투,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1594년 풍신수길의 양자 목하수준木下秀俊(소조천수추)이 소조천융경의 양자가 되자 수포는 폐적되면서 별가 창설, 1597년 출병, 죽도성, 성주곡성 방어전, 소조천수추: 1597년 2월 1일 조선출병 명 받음, 5월 22일 대판에서 축전으로 돌아옴, 6월 29일 명호옥 출발, 7월 17일 부산 상륙, 부산 주변 수비, 양산왜성, 12월 울산성 전투, 소조촌 병력은 서생포왜성 경유하여 명조선군 포위, 울산왜성 구원, 12월 4일 귀국 명령, 1598년 1월 29일 귀국, 소조천수추 귀국 후 소조천 병력 500 잔류, 사택정성 배속, 부산 수비, 사택정성은 5월 중 귀국, 입화종무: 1592년 6월 한성회담 후 전라도 공략 할당, 6번대 충청도로 남하, 7월~8월 금산, 양단산 수차례 공격, 조헌과 영규가 공격 받음, 후방 공격, 침공 지체, 7월 조승훈 평양 공격 후 주력군 소조천융경은 한성 방면으로 지원 출발, 입화종무는 잔류 병력으로 전라도 침공 금산, 무주 공략, 점령 유지, 후에 한성 방면으로 출발, 황해도 우봉 주둔, 1593년 벽제관 전투, 동생 입화직차(고교직차, 고교통증) 전방 배치, 철포 속사 후 기급전, 소조천융경의 본대가 명군 격파, 소조천융경이 <입화가의 3,000 병력은 다른 가문의 1만명에 필적>, 6월 제2차 진주성, 융경 및 5번대 명조선군 후위 부대 차단, 공성전 이전에 진주성 동북방 성주 일대 유정 수만 집결, 6월 13일 임호 무장 명조선군 4만명 진주성 진군, 제6군 입화종무, 소조천수포 병력 4천 성주행 격퇴, 1597년 안골포 수비, 정읍회의 보고서 수길에게 보냄, 남부 재포진 당초계획, 부산 수비, 최종적 결정은 길성은 부산, 종무는 고성 수비, 제1차 울산성 전투, 도진의홍 1월 6일 석전삼성에게 보낸 서장 '와도직무, 승무 울산 지원 위해 마산왜성 비어 있음, 1598년 1월 2일 조명군 부산습격(우키다 히데이에), 종무에게 지원 요청, 8백명으로 고책 부대 2만 2천 야습, 불화살 습격, 7백 수급, 울산왜성 공격, 가등청정 포위, 부산 제장들 회담, 9월 조명 4로 병진, 고성수비, 도진충환 사천공격 통보 받음, 9월 28일 순천왜성 봉쇄, 입화직차, 도진의홍, 종의지, 사택광고 수군 편성하여 구원 향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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