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3 * 한국문인협회 역사기행

高 山 芝 2014. 9. 29. 10:07

   [ 백두산과 동북3성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얼을 찾아서-3 ]

                                       - 한국문인협회의 역사기행 -

                                                             高 山 芝 시인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인 연길(延吉.엔지)은 중국내 조선족의 문화 중심지이며, 주변 농업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주민의 47%가 조선족이다. 1902년 연길청(延吉廳)이 설치되고 1909년 부(府)가 되었으며, 1913년 중화민국 수립 후 현(縣)이 되었다. 1909년 간도협약(間島協約:젠다오협약) 이후에 교역주로서 개방되자 북한출신 조선인이 많이 이주하였다. 두만강 수계의 부르하통하가 도시의 중심부를 가로 지르고 있고 하남은 공업이, 하북은 상업이 발달하였다. 모든 간판은 한글병기를 의무화하고 한글을 먼저 표기하도록 법으로 제정된 곳이 바로 연길이다. 낮보다 밤이 볼 것이 더 많다는 이건씨, 아쉽게도 우리는 도문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겠다.

도문(투먼.圖們)이라는 지명은 두만강(豆滿江, 중국에서는 圖們江으로 표기)에서 비롯되었다. 두만강 연안에서는 유일하게 북한과 철도로 연결되어 있어서 북한과 교역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지역이 바로 도문시다.

동해물과 백두산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두만강을 단지 흘러간 유행가 가사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부끄러움, 울컥 치미는 서러움을 안고 두만강 저편 북한땅을 바라본다. 푸른 물결을 헤치며 노를 젓던 뱃사공은 보이지 않고 상류의 광산개발로 푸른 빛을 상실한 강, 뛰어서 2-3분이면 건널 정도의 거리의 강폭을 잠자리와 나비들이 오가고 있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 이 한밤 남편은 /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외투를 쓴 검은 순사와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의 눈을 피해 국경을 넘나드는 남편을 파인 김동환은 ‘국경의 밤’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먹을 것을 찾아서 도강하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북한군의 초소가 강변 무성한 수풀로 위장을 하고 있다. 유람선을 타고 북한땅 가까이 갔던 33인의 문인들이 대합실에서 막걸리잔을 들고 우리의 소원을 목노아 불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 / 이 목숨 바쳐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 이 겨레 살리는 통일 / 이 나라 살리는 통일 / 통일이여

어서 오라 / 통일이여 오라 “

 

독립은 하였으나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겨레의 아품을 토해내고 타는 목마름을 막걸리로 달래면서 윤동주 시비가 있는 용정을 향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의 배경이자 민족시인 윤동주의 고향 용정은, 1880년 초까지는 황량한 원시림지대로 해란강 유역에는 맹수들이 살고있었다. 1883년 봄, 함경도 회령에서 넘어온 조선농민들이 처음으로 해란강 유역을 개척, 마을을 일구고 옛우물을 복원했다. 이 우물이 용두레 다. 먼저 찾아간 곳은 윤동주시인의 모교인 대성중학교다. '서시(序詩)'가 새겨진 윤동주시인의 시비(詩碑)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의 서시-

 

잎새에 이는 바람소리를 듣고도 자신을 돌이켜보며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다짐하는 시인의 정결함 앞에 옷깃을 여몄다. 일제시대 용정을 중심으로 설립된 조선사립학교는 수많은 독립투사를 길러냈다. 대성중학교. 은진중학교. 동흥중학교. 광명중학교. 명신여고. 광신여고 등 6개의 소중학교는 나중에 용정중학교로 합병되었다. 윤동주 문학관 앞에서 33인 문인들에게 아이스케키를 사주는 구용서.최현희선생님 부부는 80이 넘은 연세로 문학 기행에 참여한 시인부부다.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짐이 되기 싫다시며 항상 앞장을 서는 노익장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나의 행동은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긴 규암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삼촌이다. 함경북도 종성출신의 김약연은 1899년 2월 18일, 31세의 나이로 25세대 142명을 이끌고 중국 화룡현으로 이주하여 명동학교를 세웠다. 동쪽 즉 조선을 밝힌다는 뜻이 담긴 명동(明東)학교는 유교교육으로 시작하였으나 신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유능한 교사를 초빙하게된다. 이때 초빙된 분이 서울상동감리교회에서 세운 상동학원출신의 정재면목사였다. 정재면은 부임조건으로 두가지를 제안했다. 성경을 학과목으로 가르칠 것과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릴 것 등 두가지였다, 김약연은 이를 받아들였고 성경을 배우면서 크리스찬이 된다. 민족의식에 눈을 뜬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 명동학교. 이또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전, 안중근의사도 명동촌에 은신하여 거사를 준비했다. 1909년 기독교에 입문한 김약연은 명동교회를 설립한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 목사가 되어 간도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점으로 활약을 하였다. 윤동주시인의 조부 윤하영장로는 김약연목사와 함께 명동촌을 개척한 초기 이주자였으며, 어머니 김용은 김약연목사의 누이동생으로 윤동주는 김약연의 조카이자 제자였다. 문화혁명때 훼손된 모양 그대로 성경 위에 세워진 비석이 지사(志士)의 의기(義氣)를 풍기면서 명동교회와 윤동주시인의 생가를 지키고 있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때 / 뜻 깊은 용문교 달빛 고이 비춘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우물가에 저녁종이 울릴때 / 사나이 굳은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 선구자 / 윤해영작사.조두남작곡-

 

거룡우호공원 내에 있는 용두레우물은 원래 여진족이 사용했던 우물이다. 회령에서 이주해온 조선농민들이 이 우물을 복원하자, 지나가는 길손들의 두레박을 빌려달라는 청이 빈번해졌다. 이에 조선농민들은 우물에 용두레(두레박)을 설치하였고, 우물에 살던 용이 비암산으로 날아가 해란강을 굽어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비암산에 있는 용주사는 용의 여의주 형국의 길지이다. 용두레우물에는 1934년 11월 용두레촌의 이기성의 발의로 ‘용정지명지정천’이란 문자를 새긴 우물수호비석을 세웠으나, 문화혁명당시 홍의병들에 의해 우물은 매립되고 비석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있는 비석과 우물은 1986년 용정시 정부가 복원한 것이다.

일송정은 비암산에 있던 정자가 아니다. 비암산의 깎아지른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아람드리 소나무로 자라면서 소나무 모양이 흡사 푸른 돌기둥 위에 푸른기와를 얹은 정자 모양으로 비처저서 일송정이라 불리게 된다. 조선농민들은 기우제를 지내던 일송정이 있던 바위는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돌립지사의 비밀 집회장소로 알려저 있다. 당시 독립군을 추적하던 일본군의 헌병대장은 일송정을 과녁삼아 실탄사격연습까지 하였으나 소나무가 죽기않자 껍질을 벗겨내고 구멍을 뚫어서 후추가루를 넣고 대못까지 박았다. 이런 고문 끝에 1938년 일송정 소나무는 고사하고 말았다. 지금의 소나무는 1991년 백두산에서 17년생 소나무를 이식하였다. 우리민족의 애환이 어린 해란강과 일송정을 차창으로 밖에 볼 수없는 아쉬움을 안고 버스는 백두산을 향해 달려갔다

 

                             - 2014년 9월 24일 주간한국문학신문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