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수필 - 대만여행기 / 지우펀(九汾) - 8
[사건 이후]
2·28 사건 공원내에 있는 2·28사건 기념관. 이 사건은 사건 발생 후 40년동안 언급하는 것 자체가 최대의 금기처럼 여겨졌다. 국공내전에서 패퇴한 중국 국민당은 1949년 12월에 중화민국 정부를 난징에서 타이베이로 옮겨왔다. 그러나, 이미 내전의 패색이 짙던 1949년 5월 1일 타이완 섬 전체에 걸쳐 총호구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같은 달 21일에는 계엄령을 발표하였다. 그 해 말부터 위험분자로 간주된 이들이 대거 체포됐다
타이완을 보위하고 대륙을 공격한다'(反攻大陸)는 총 구호하에서 내전을 반대하거나 국공 평화회담을 주장하거나 평화 건설과 민생 문제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나 언론은 무조건 공산당 간첩, 파괴분자, 음모분자로 간주되었다. 1949년 5월 21일 타이완 전역에 발포된 계엄령은 38년동안 계속되다가 1987년 7월 15일이 되어서야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명령으로 해제되었다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금기 중의 금기가 되어버린 이 사건은 1988년 타이완 출신인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오랜 논란을 거쳐 1995년 리덩후이 총통이 국가차원에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하였고,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기념공원이 세워졌다.
아직도 2.28 사건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었다. 1991년 리덩후이 총통의 지시로, 이듬해 행정원이 발표한 「2·28 사건 연구 보고」에 따르면 2·28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3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사건은 '국부(國父)'격인 장제스가 직, 간접적으로 연루된 사건이라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실제로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에는 장제스가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4] 타이완에서 진보성향이거나 민진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장제스를 기념하는 기념관인 '중정(中正)기념관'을 폐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