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순을 맞는 어머님께 드리는 글 - 고 산 지
- 팔순을 맞는 어머님께 드리는 글 -
고 산 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두 번에 걸친 가택수색과 안기부 보안사 등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에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을 한 후 처자식과 함께 격동의 80년대를 살아오면서 나 때문에 겪어야 했던 가족들의 고통,
그 중에서도 어머님의아픔을 그 진한 사랑으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나이 사십에 청상이되어 우리 오남매를 키우느라 온갖 풍상을 겪으셨던 어머니.
장한 어머니 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던 어머니가 겪으셨던 고통과 아픔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 아들은 살아왔습니다.
심한 가뭄 때문에 문전옥답도 쩍쩍 갈라지던 어느 해 여름, 보리타작을 끝낸 아래사장에서
어린 나를 의지하여 밤을 새우며 물꼬를 지키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화학비료가 부족했던 시절 고구마 모종을 위해 합수(분료)를 주면서 밭을 일구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갈퀴로 긁어모은 마른 솔잎보다 더 좋은 땔감은 없었습니다.
나무 단을 머리에 이고 야산을 오르내리던 어머니, 그러나 장남인 나는 잘 쓰지도 못한 시(詩)를 쓴답시고
시대의 아픔을 혼자 짊어지고 살아왔습니다.
대우(大宇)와 제세(濟世)의 신화가 사내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던80년대 초,
재종형의 권유로 직장을 옮기면서 시작된 시련, 안정된 직장을 떠나 중소기업에서
엎치락뒤치락 거리던 아들의 삶이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 것은 9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부도를 내고 찾아온,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들에게 손수 차려주던 그날의 점심식사를
아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서의 유랑생활은 자신을 추리기도 힘든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일감이 없어 노가다를 쉬게 된 어느 날입니다.
동료들과 함께 파칭코장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귀에 익은 선율이 노래 말이 되어 나의 가슴을 저미는 것입니다.
유년시절에 우리 남매들을 데리고 즐겨 불러주시던 어머님의 노랫가락이었습니다.
“자든지 깨든지 이 내몸에
복락과 깊은 정을 길러내고
당대의 큰 재목도 여기서 나네
아름답다 나의 가정 천만년 가도록
두터운 정 큰 사람 반석 같으리”
너무 자주 들어 아직까지 외우고 있는 어머님의 노래 말,
그 가락이이명이 되어 지금도 내 귓전을 맴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