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국(許國)
허국(許國) 초상화 출생 - 사망 | 1527 ~ 1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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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주부(徽州府) 흡현(歙縣) 사람으로 자는 유정(維貞)이다.명(明)나라 때의 대신(大臣)이다.
가정(嘉靖) 44년(1565)에 진사(進士) 출신으로 벼슬은 검토(檢討), 국자감제주(國子監祭酒),
태상시경(太常寺卿), 첨사(詹事), 예부시랑(禮部侍郎), 이부시랑(吏部侍郎), 예부상서(禮部尚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 태자태보(太子太保),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조선(朝鮮)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저서로 《허문목공집(許文穆公集)》이 있다.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의 문목(問目)에 답함- 기대승(奇大升) / 고봉문집 속집 제2권
명나라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의 질문에 안유(安裕)가 답하다
고봉문집(高峰文集) - 조선 중기의 학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문집이다.
‣ 허국(許國:1527-1596):명나라 휘주부(徽州府) 흡현(歙縣) 사람. 자는 유정(維楨).
예부상서겸동각대학사(禮部尙書兼東閣大學士)를 지냈다.
‣ 위시량(魏時亮:1529-1591):명나라 강서(江西) 남창(南昌) 사람. 자는 공보(工甫),
호는 경오(敬吾). 중서사인(中書舍人) 및 남경형부상서(南京刑部尙書) 등을 지냈다.
이 두 사람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을 때 질의에 안향(안유)에 대해 답한 내용이다.
천사(天使)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의 문목(問目)에 대해 조목조목 답함
본국(本國) 아무 도(道)의 벼슬아치나 선비, 혹은 백성들 가운데 이미 죽었거나 또는 살아 있는
사람들로서 어떠한 이행(異行)과 효제(孝悌)와 절의(節義)가 있는지? 또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능히 알거나 기자(箕子)의 주수(疇數)를 아는 사람에 이르기까지를 그 거주(居住)와 성명(姓名)과
실사(實事)를 하나하나 기록하라.
본국은 바다 밖에 궁벽하게 위치해 있고 땅덩이는 작지만, 백성들의 성품이 어질고 유순하여
선(善)에 잘 흥기하므로, 이행과 효제와 절의가 있었던 사람들이 사서(史書)에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 수를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우선 그 중 한두 가지만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안유(安裕)는 흥주(興州) 사람입니다. 벼슬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장엄하고 정중하고 안온하고 자상하였으며,
일찍이 인재를 길러서 사문(斯文)을 흥복시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학교의 제도가 크게 무너지고 유학(儒學)이 날로 쇠퇴해짐을 걱정하여, 문교의 진흥을 위해
국학(國學)에다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서 길이 인재 교양의 자본으로 삼았습니다.
또 남은 돈을 중국 강남(江南)에 보내어 공자 및 그의 제자 70명의 화상(畫像)을 그려와 모셨고,
또 제기(祭器)ㆍ악기(樂器)와 육경(六經)ㆍ제자(諸子)ㆍ사(史) 등의 서적을 구입해 와서
비치하였으며, 또 이산(李㦃)ㆍ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교관(敎官)으로 삼으니,
경(經)을 펴놓고 수업을 하는 생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만년에는 일찍이 회암 선생(晦庵先生)의 진영(眞影)을 벽에 걸어두고 경모의 뜻을 다하였으며,
회헌(晦軒)이라 자호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가 모두 소복을 입고
노제(路祭 발인할 때 문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리고
문묘 서무(西廡)의 아래쪽에 배향하였으며, 후인들이 또 서원을 건립 하였습니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 : 칠관은 고려(高麗) 때 국학(國學)의 여택(麗擇)ㆍ대빙(待聘)ㆍ경덕(經德)ㆍ구인(求仁)ㆍ복응(服膺)ㆍ양정(養正)ㆍ강예(講藝)의 일곱 가지 분과(分科)의 관(館)을 말하고, 십이도는 고려 때에 있었던 12사학(私學), 즉 문헌공도(文憲公徒)ㆍ홍문공도(弘文公徒)ㆍ광헌공도(匡憲公徒)ㆍ남산도(南山徒)ㆍ서원도(西園徒)ㆍ문충공도(文忠公徒)ㆍ양신공도(良愼公徒)ㆍ정경공도(貞敬公徒)ㆍ충평공도(忠平公徒)ㆍ정헌공도(貞憲公徒)ㆍ서시랑도(徐侍郞徒)ㆍ귀산도(龜山徒)를 가리킨다.
[출처]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의 문목(問目)에 답함-기대승(奇大升) (순흥안씨문숙공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