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문기행

중국인문기행 - 172 / 명효릉

高 山 芝 2015. 7. 13. 20:01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무덤으로 남경 자금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국 제왕들의 무덤 중에서 가장 크다

 

명효릉 옹중로의 무신상 / 남경(南京)의 자금산(紫金山 : 鍾山)에 위치해 있다.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朱元璋)과 황후인 마(馬)씨가 이곳에 매장되었다. 명나라의 첫 번째 황릉으로서 당시의 건축과 석각예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500년 동안 이어진 명, 청 두 왕조의 왕과 황제들은 효릉의 규격에 따라 능을 축조하였다.  

효릉은 명 홍무14년(1381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명칭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공사가 시작된 다음 해에 마황후가 세상을 떠서 이곳에 먼저 안치 되었으며, 마황후의 시호가 효자(孝慈)였기 때문에 이를 따라 효릉(孝陵)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는 설과, “효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효릉이라고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공사는 크게 신도(神道)부분과 능원 두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1398년 주원장마저 세상을 뜨자 합장하게 되었고, 1413년 그의 공적을 기록한 성덕비(聖德碑)가 완성됨에 따라 효릉은 완공되었다. 노동자와 군인 10만 명이 투입되었고, 25년이 걸려서야 끝마쳐진 대공사였다. 공사가 끝난 후 능원 내에는 10만 그루의 소나무가 심어졌으며 천 마리의 사슴이 방생되었다고 한다.

60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효릉은 나무로 만든 많은 건축물들을 잃었다. 하지만, 신도(神道)와 석각들, 방성(方城), 명루(明樓), 하마방(下馬坊), 대금문(大金門),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등과 같은 석재 건축물들은 여전히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효릉은 전조후침(前朝後寢)이라고 하여, 앞쪽에는 정무를 보는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정원을 비롯한 침실 등 생활공간을 배치하는 황실의 규범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예규에 따른 것이며 당, 송 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능은 산에 기대어 짓는다.”라는 제도에 따라 산기슭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효릉이 과거의 규범만을 답습한 것만은 아니었다. 효릉의 전조(前朝)는 방형으로 지었지만, 시신이 매장된 지하궁전은 원형의 토산을 쌓아 완성시킴으로서 전방후원(前方後圓)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내기도 하였다. 효릉 이후에 건설된 명, 청 500년 20여 좌의 황릉은 모두 효릉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를 따라 지어졌다. 효릉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황릉 중의 하나이며, 2003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위엄이 느껴지는 문신상/효릉의 신도는 다른 제왕들의 신도와는 달리 직선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신도가 직선이 아닌 것은 중국에서 효릉이 유일하며, 매화산(梅花山)의 모양을 따라 건설된 이것은 재미있게도 북두칠성처럼 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신도는 사방성(四方城)에서 시작된다. 사방성은 비석을 보관하는 비정(碑亭)으로 위교(衛橋)와 중산릉 사이에 있다. 주원장의 아들 주체가 세운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가 이곳에 있다. 비석의 높이는 8.78m이며, 거북이 좌상위에 놓여 있다. 비문은 주체가 손수 작성했으며 주원장의 공덕을 칭송하는 2746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영성문(欞星門) / 용봉문(龍鳳門)이라고도 한다. 신도에 위치한 하나의 의식성 건축물이다.

6개의 기둥에 3개의 문으로 된 패루이며 주춧돌과 포고석(抱鼓石)은 명나라 시대의 것이다. 포고석은 대문을 이루는 기둥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둥을 받쳐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보통 관직이 높거나 부잣집에서 사용하는 건축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