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프다

서사시 '독립없는 해방은 시리도록 아프다' 주석

高 山 芝 2018. 12. 13. 11:58

註釋*1 - 스탈린의 대숙청 : 스탈린이 37년 10월 극동 지방에 거주하는 한인의 대부분인 17만1781명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켜 2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은 것도 대숙청의 일부다.

 

註釋*2 - 88정찰여단 : 구소련 국방부 극비문서인 구소련 극동군 제88 특별저격 경찰여단 파일입수로 그동안 논란이 있었던 북한의 김일성이 1942년 6월부터 1945년 9월까지 3년3개월동안 구소군 대위로 복무했던 이 여단의 정체 등이 50년만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중앙일보 1992.06.15 기사 - 모스크바=김국후특파원

 

註釋*3 - 조선의 신탁통치 :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3년 3월에 이르러 신탁통치안을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하였으며, 이 결정은 다음날, <시카고 썬(Chicago Sun)>지에 보도되었는데 이승만이 격분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15일 미국대통령에게 신랄한 어조의 항의문을 보냈다. 한국사람들은 독립을 원하는 것이지 신탁통치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1905년 한국병탄을 허락함으로써 한국사람들이 36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어야 했는데, 만일 미국 정치가들이 한국에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미국 자체가 “장차 더 큰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 이정식의 이승만 연구 414-415p

 

註釋*4 - 카이로선언문 중에서 :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카이로 선언에서 “현재 조선인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음에 유의해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조선인에게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을 합의했다.

 

註釋*5 - 적절한 절차에 따라 : 1943년 11월 23일 오후 8시 카이로 회담에는 루즈벨트와 처칠, 장제스가 참석했고 루즈벨트 보좌관 합킨스와 장제스의 통역으로 숭메이링(부인)과 왕 충후이 비서실장이 동석했다. 미국과 중국이 조선, 인도차이나 및 태국의 장래에 대한 상호 이해에 도달하자는 루즈벨트의 제안에 장총통은 조선에 독립을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고 루즈벨트는 동의했으나 처칠은 부정적이었다. 11월 24일 루즈벨트는 합킨스에게 합의서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한국에 관한 사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에(at the earlist possible moment)한국을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였다. 초안을 검토한 루즈벨트는 자신의 신탁통치 구상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에‘ 라는 문구를 ’적절한 순간에(at the proper moment)'로 수정했다. 11월 23일 하오 3시 30분, 미국 초안과 영국 초안을 놓고열린 최종 조율회의에서 영국 측은 “조선이 자유롭게 독립된다”를 “조선이 일본 통치에서 해방된다”로 수정하자고 제의했다. 수정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조선문제에 대해 영국내각은 다룬 적이 없고, 소련의 태도도 알수가 없기 때문에 조선의 독립에 관한 조항은 성명문안에서 삭제하자고 주장했다. 중국은 영국의 주장이 “난센스”라며 강력히 반발, 조선이 일본침략의 첫 번째 희생양이었음을 상기시켔다. 루즈벨트가 카이로회담에 동석한 해리만 소련주재 미국대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해리만은 “소련의 태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밝혔다. 조선독립의 의제는 미국과 중국의 강력한 지원으로 살아남았다. 루즈벨트가 수정한 ‘적절한 순간에’라는 문구가 카이로 선언의 최종안에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in due couse)" 바뀌게 된 것은 영국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적절한 절차를 거처서“는 처칠 수상이 즐겨 사용하는 단골 문구였다.

 

註釋*6 - 얄타회담 Yalta Conference : 점령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크림 반도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다. 극동문제에 있어서는 비밀의정서를 채택하였는데, 그것은 소련이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해야 하며, 그 대가로 연합국은 소련에게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해준다는 것이었다

 

註釋*7 - 포츠담협정 Potsdam Agreement : 1945년 영국·미국·소련 3개국 수뇌 사이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조인된 독일의 전후처리 방침에 관한 협정

 

註釋*8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朝鮮建國準備委員會 : 1945년 8·15광복 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로, 약칭하여 건준(建準)이라고도 한다. 1945년 8월 초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협상 대상자로 한국의 민족지도자를 찾았다. 이때 건국준비를 위한 민족의 대표기관과 정치세력 형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여운형이 그에 동조함으로써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4년 8월 10일 비밀리에 '건국동맹'이 조직되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절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註釋*9 - 몽양 여운형의 11차례 테러 : 1945년 8월18일 - 1차테러 / 1945년 9월07일 - 2차테러 / 1945년 12월 상순 - 3차테러 / 1946년 01월 - 4차테러 / 1946년 04월18일 - 5차테러 / 1946년 05월하순 - 6차테러 / 1946년 07월17일 - 7차테러 / 1946년 10월07일 - 8차테러 / 1947년 03월17일 - 9차테러 / 1947년 05월12일 저녁 7시경 - 10차테러 / 1947년 07월19일 오후 1시경 - 11차테러

 

註釋*10 - 조선인민공화국 朝鮮人民共和國 : 8·15광복 직후 발족한 여운형(呂運亨)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선포한 나라 이름,

 

註釋*11 - 미군정 美軍政 :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삼팔선(한반도 북위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이 진주하여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 동안 실시한 미군의 통치시기

 

註釋*12 - 소련의 군정통치 : 1945년 8월 9일 종전을 며칠 앞두고 대일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은 다음날인 10일부터 북한으로 진주했다. 당시는 이미 일본의 패전이 완연하던 때여서 소련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북한을 점령할 수 있었다. 24일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 M. Chistiakov) 대장이 선발대를 거느리고 평양에 들어왔다. 소련점령군은 북한에 진주한 뒤 각 도의 자치위원회를 임시정치위원회로 개칭할 것을 명령하고, 이 임시정치위원회로 하여금 각 도의 치안유지와 일제의 행정권 접수를 담당하게 하였다. 1946년 2월 5일 ‘북조선 각도·군인민대표와 반일 민주정당 및 사회단체 회의’를 소집하고 이 회의에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46년 11월 3일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다음해 1947년 2월 17일 도·시·군 인민위원 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최고입법기관으로 북조선인민회의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고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최고입법기관과 정권기구가 완비된 뒤 같은 해 2월 24∼25일의 동(리)인민위원회 선거와 3월 5일의 면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됨으로써, 북한은 ‘민주선거방식에 의한 인민정권형태’를 하부 말단에 이르기까지 완성하였다.

 

註釋*13 - 조선공산당 朝鮮共産黨 : 1925년 4월 17일 일제하 경성부 황금정 아서원에서 조직된 사회주의운동 단체로 1928년 12월 해체되었다가, 1945년 8월 해방 후 박헌영 등이 재조직하였으나 1946년 11월 남조선로동당(남로당)으로 해소된 정당이다.

 

註釋*14 - 조선민주당 朝鮮民主黨 : 광복 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와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신망이 높던 조만식(曺晩植)이 북한지역의 대표들과 함께 1945년 11월 3일 평양에서 결성, 창당과 동시에 당기관지인 ≪조선민주보≫를 주간으로 발행하였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문제가 제기되자 조선민주당은 회의를 열어, 반탁결의를 하고 당수 조만식은 소련군 당국자의 신탁통치 찬성 요청을 거부하여 연금상태에 놓이게 됨으로써 조선민주당은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변질되었다.

 

註釋*15 - 기독교사회민주당 基督敎社會民主黨 : 1945년 9월 목사 윤하영(尹河英)과 한경직(韓景職) 등이 신의주(新義州)에서 결성한 정당이다.

 

註釋*16 - 신의주반공학생의거 新義州反共學生義擧 : 1945년 11월 16일 평안북도 용암포(龍巖浦)에서 열린 기독교사회당 지방대회에서, 평북자치대 용암포 대표는 기념사를 통해 폐교조치된 수산기술학교 복구를 촉구하고, 공산당 용암포 대장 이종흡(李宗洽)의 만행을 규탄하자 이를 지지하고 나선 학생들이 만세를 외치며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이에 소련군과 공산당측은 이들을 공격하였고, 평안교회의 장로를 현장에서 사살하고, 12명의 학생 및 시민 또한 중상을 입었다. 이 소식은 신의주시 평안북도 학생자치대 본부에 전해졌고, 격분한 신의주시의 6개 남녀중학생들은 11월 23일 상오 9시 학교 강당에 집합하여 ‘공산당타도’를 결의한 뒤 가두행진에 나섰다. 이 사건으로 피살된 학생은 23명, 중경상자 700여 명이었고, 사건 이후 검거·투옥된 학생과 시민은 무려 2,000여 명에 달하였다

 

註釋*20 - 임정봉대론臨政奉戴論 : 해방 직후 중경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한다는 논리로, 한민당계 및 임정계열 인사들이 추진한 운동이다. 해방 직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를 제의받자 송진우는 총독부가 연합군에게 정권을 인도하기를 기다리면서, 재중경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환영 추대할 것이라며 거절했다. 송진우는 1945년 9월 1일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정봉대를 주장했다.

 

註釋*21 - 독립촉성중앙협의회 the Independent Central Council : 1945년 10월 23일 좌·우익을 망라한 민족통일기관 형성을 위해 조직된 정치단체이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는 1945년 10월 23일 조선호텔에서 각 정당 대표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탁치정국 하인 1946년 1월 15일 독촉은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임정 세력 중심의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한다고 발표했다. 독촉을 주축으로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해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이었다. 1946년 1월 18일 독촉은 비상국민회의로 개칭하고 이승만에게 최고위원 선출권을 일임했다. 반탁투쟁을 반소·반공과 연결시키면서 임정 세력을 흡수하고자 한 것이었다. 독촉은 좌·우익 망라, 임정 포섭 등 처음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최고지도자로서 이승만을 부각시킨다는 프로그램에는 부응했다

 

註釋*22 - 이승만은 왜 공산주의를 싫어했을까? : 이승만은 미국 망명시절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과 외교사를 전공했다. 1910년 6월 14일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이란 제목의 박사학위 청구논문은 1912년에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 공해상의 중립 문제가 당면 과제로 떠오르면서, 그의 논문은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학위를 수여한 우드로 윌슨 총장은 후에 민주당 후보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족자결주의로 유명한 윌슨 대통령이다. 이승만은 하바드, 프린스턴을 거치면서 공산주의 본질을 학문적으로 성찰한 정치가였다. 공산주의에 관한 이승만의 논문과 연설에는 그의 학문적 성찰이 그대로 묻어난다.

1] 이승만의 논문 : 공산당(共産黨)의 당부당(當不當)

원문 - (가)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이라. 모든 사람의 재산을 토지, 건축 등 모든 부동산까지 다 합해다가 평균히 나누어 차지하게 하자 함이니, 이것을 가난한 사람은 물론 환영하겠지마는, 토지를 평균히 나누어 맡긴 후에 게으른 사람들이 농사를 아니 하든지, 일을 하니 하든지 하야 토지를 다 버리게 되면 어찌 하겠느뇨? 부지런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야 게으른 가난뱅이를 먹이어야 될 것이오, 이 가난장이는 차차 수효가 늘어서, 장차는 저마다 일 아니하고 얻어먹으려는 자가 국중(國中)에 가득할 것이며, 원문 - (나) 자본가(資本家)를 없이하자 함이라. 모든 부자의 돈을 합해다가 공동히 나누어 가지고 살게 하면 부자의 양반 노릇하는 폐단은 막히려니와, 재정가(財政家)들의 경쟁이 없어지면상업과 공업이 발달도기 어려우니,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미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모든 물건이 다 진보되지 못하며, 물직적 개명(開明)이 중지될지라, 자본을 철폐하기는 어려우리니, 새 법률로 제정하야 노동과 평등세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나을 터이며, 원문 - (다)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이니, 모든 인민의 보통 상식 정도를 높여서 지금에 학식으로 양반 노릇하는 사람들과 비등하게 되자 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은 불가능하며, 원문 - (라)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이라. 자고로 종교단체가 공고히 조직되어 그 안에 인류계급도 있고, 토지소유권도 많으며, 이 속에서 인민 압제의 학대를 많이 했나니, 모든 구교 숭배하던 나라에서는 이 폐해를 다 알지라. 그러나 지금 새 교회의 제도는 이런 폐단도 없고 겸하야 평등 자유의 사상이 본래 열교확장(裂敎擴張)되는 중에서 발전된 것이라. 교회 조직을 없이하는 날은 인류덕의(人類德義)상 손해가 다대할 것이며, 원문 - (마)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 사상도 다 없이한다 함이라. 이에 대하야는 공산당 속에서도 이론이 많을뿐더러 지금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아라사(러시아)로만 보아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다 아는 바라, 더 설명을 요구치 않거니와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하야 셋P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하고 총과 창을 녹여서 호미와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한인(韓人)은 일편 단심으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야 세계에 당당한 자유국을 만들어 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 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2천만이 모두 다 밀리어네어(백만장자)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 지라. 우리 한민족(韓民族)에게 제일 급(急)하고, 제일 긴(緊)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를 도울 수 있으면 우리는 다 공산당이 되기를 지체치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이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

2] 이승만의 연설문 :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1945년 12월 19일 저녁 7시 30분 이승만은 서울중앙방송국(KBS)을 통해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건국 지도자에 의해 이뤄진, 제2차세계대전 이후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일 것이다. “(공산당 극렬분자들은) ‘제 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 자’로,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권을 없이하야, 나라와 동족을 팔아 사리와 영광을 위해 부언낭설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徒黨)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군기(軍器)를 사용하야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名詞)를 조작하야 국민 전체의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렀더니, 요즈음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奸計)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족주의자’라고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나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읁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희 사욕(私慾)을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으로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싶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대로 만들어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 사람의 형용(形容)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가, 저희 조국에 갖다 바치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결심이다.” “먼저 그 사람들을 회 해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용을 모르고 따라다니는 무리를 권유해, 돌아서게만 되면 함께 나아갈 것이요,...” “ 교정이 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은 ‘친부형(親父兄)’ 친자질(親子姪)이라도 원수로 대우해야 한다. 대의를 위해서는 애증(愛憎)과 친소(親疏)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이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는 협동이 못되는 법이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갖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된다.”.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절분(切分)으로 나뉘어져서 동족상잔의 화를 면치못하고, 따라서 우리가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 노릇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애족하는 동포의 합심 합력으로 단순한 민주정체하에 국가를 건설하야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 <손세일의 ‘이승만과 김구평전’ 발췌>

 

註釋*23 - 모스코바 3상회의 결정서 3항의 한국관계 전문 : 코리아 (1) 코리아를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또한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의 창출을 위하여, 그리고 장기간의 일본의 지배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가능한 빨리 제거하기 위하여, 코리아의 산업과 운수 및 농업 그리고 코리아인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임시적인 코리아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임시적인 코리아 정부의 구성을 돕기 위하여, 남부 코리아의 미군사령부와 북부 코리아의 소련군사령부의 대표들로써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립할 것이다. 공동위원회는 그 제안들을 준비함에 있어서 코리아의 민주적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할 것이다. 공동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에 대표권을 가진 양국 정부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소.중,영,미정부들의 심의를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3) 임시적 코리아 민주정부와 코리아 민주단체들의 참여 아래, 코리아인의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와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발전 및 코리아의 민족적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협력, 원조(신탁통치)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코리아 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친 후에, 최고 5년에 걸치는 코리아 4개국의 신탁에 관한 협정의 체결을 위한 미,소,영,중의 공동심의에 회부될 것이다. (4) 남부 및 북부 코리아 모두에 영향을 미칠긴급한 문제들을 심의하기 위하여, 그리고 행정,경제적 문제들에 있어서의 남북 양,사령부간의 영구적인 협력을 가능케 할 방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코리아에 있는 미국 사령부와 소련 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된 회의를 2주일 내로 소집할 것이다

 

註釋*24 - 미소공동위원회 美蘇共同委員會 :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할 목적으로 미소 점령군에 의하여 설치되었던 공동위원회다.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 뒤 개최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에서는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미·영·중·소에 의해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 점령군 사이에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46∼1947년 사이에 1차의 공동회담과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미국과 소련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註釋*25 - 신탁통치 trusteeship : 국제연합 감독하에 시정국(施政國:신탁통치를 행하는 국가)이 일정지역(신탁통치지역)에 대하여 실시하는 특수통치제도이다. 국제연맹이 당시 독일 및 터키에서 분리된 지역에 대하여 '위임통치(委任統治)'를 실시했는데 국제연합은 이를 계승·수정하여 신탁통치제도를 설치하였다. 한국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의로 8·15광복 직후 5년 동안의 신탁통치가 협의되었지만 한국인의 반탁운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註釋*26 - 송진우와 여운형의 암살 : 1945년 12월 30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古下 宋鎭禹 씨를 저격한 진범인을 체포코져 경기도 경찰국에서는 약 2개월 전부터 비밀리에 맹렬한 활동을 거듭하여 한때는 부녀동맹 간부들도 암살 혐의를 받고 취조를 당하는 등 범인 수사의 귀추가 주목되었는데 8일 밤부터 돌연 단서를 잡고 특별 무장대원들이 수사를 개시하여 9일 정오까지 진범인 韓元律(일명 韓賢宇, 29), 劉根培(20), 金義賢(20) 등 3명을 체포하였다. 4월 24일에 경기도 경찰부의 암살범 취조 결과 발표가 있었는데, 관계 기사에서 배경을 설명한 앞부분은 빼고 범행과 직접 관계된 뒷부분만 옮겨놓는다. 한[현우]은 동경 시대로부터 철저한 민족주의자인데 해방 직후 상경하여 각 방면의 정세와 동향을 정시한즉 자주독립촉성을 표방하는 정당이 속출하여 자유 해방이다 하기만 하고 통일이 안 됨을 보고 재 동경 시대의 동무인 李龍鳳의 소개로 8월 하순에 현재 시내 신당정 333의 6 경남 양산 출신 全柏(42)을 방문하고 의견을 교환한 다음 11월 초순경에 이 두 사람은 이론 투쟁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하여 정치적 야심가, 브로커 등을 암살 숙청할 계획을 세우고 무기를 얻는 한편 심복 부하를 물색하여 呂運亨, 朴憲永, 宋鎭禹 씨 등을 매국적 행동자로 규정하고 이상 제씨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첫째로 신탁 문제가 일어나 격분하고 있을 즈음 12월 29일 하오 5시경 부하를 소집하고 명일 미명에 먼저 송진우를 암살할 것을 부하들에게 발표한 다음 劉根培가 30일 상오 6시 10분경 송진우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그리고 한은 전백의 명령을 받고 1월 3일경 서북 지방으로 반탁을 선전하러 갔다가 1월 17일 서울에 돌아왔는데 그 후로 여운형과 박헌영의 거소를 찾고 있었다. 주범들은 공산주의자라고는 인정할 수 없다. - 서울신문 1946년 4월 24일 -

한현우 등이 재판시 진술에서 '송진우는 미국의 후견을 지지했다'는 주장은 12월 29일 밤 경교장 회의에서 송진우의 발언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송건호는 한현우를 국수적 민족주의 광신자 라고 평가했다. 한현우의 송진우 암살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사무국의 후신인 백의사가 배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초부터 ‘반공’을 강하게 내걸었던 백의사(白衣社)는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그들과 협력하는 정치인들도 제거 대상이었다. 여운형도 그 중 하나였다.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거리에서 여운형을 암살한 사람은 한지근(본명 이필형)이라는 19세 젊은이였다(실제 나이는 25세였다고 함). 한지근의 배후에는 격몽의숙(擊蒙義塾)이라는 극우(極右)조직이 있었다. 격몽의숙의 리더는 송진우(宋鎭禹) 암살 사건의 주범인 한현우(韓賢宇)였다. 송진우 암살 사건으로 한현우가 감옥에 갇힌 뒤에는 그의 추종자인 신동운이 격몽의숙을 이끌면서, 한지근 등 오갈 데 없는 젊은이들을 교육했다. 한현우는 1993년 2월 21일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당시 신탁통치를 했을 경우, 여운형을 주석으로 시키려고 했었다. 여운형을 주석으로 삼았다면 한국은 적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와 김일성을 막기 위해서는 신탁통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감방에 면회 온 동지들에게 여운형을 살해하라는 지령도 내렸다.” 한현우의 지시에 따라 여운형 암살을 모의하던 신동운·김흥성 등을 염동진과 연결시켜 준 사람은 백의사 고문 김영철이었다. 당시 60대 초이던 김영철은 김구의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다는 인물이었다. 염동진은 “여운형은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야심가”라면서 이들에게 45구경 권총을 건네주었다. 여운형 암살범들은 또 다른 극우조직인 혁신탐정사의 양근환(일제시대 친일언론인 민원식을 암살한 독립운동가)으로부터도 일제 99식 권총을 받았다. 여운형의 목숨을 끊은 것은 염동진이 준 미제 45구경 권총이었다.

 

註釋*27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진영이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신탁통치 반대활동을 펼치려는 목적에서 결성한 것이다. 임시정부 측은 모스크바삼상회의(1945년 12월 16일∼27일)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협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45년 12월 28일 긴급국무회의를 열고 이어서 각 정당, 종교단체, 언론기관 대표들을 초청하여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구성을 결의하였다. 1945년 12월 29일 중앙위원회의를 열어서 임시정부의 즉각적 주권 행사를 건의하였다. 12월 31일에는 전국적 총파업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8일 이승만이 지도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지방단위들)와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재편되었다.

 

註釋*28 - 국자(國字) 1호와 2호 포고문 : 국자(國字) 1호 - (1)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케 함. (2) 신탁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3)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금지 함. (4)국민의 최저 생활에 필요한 식량,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5) 불량산인의 폭리 매점등은 취체함. 국자(國字) 2호 - 차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획득할 때 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우리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註釋*29 - 비상정치회의주비회 非常政治會議籌備會 : 비상정치회의주비회는 임시정부가 임정법통론에 입각하여 소집·구성한 예비 입법기구이자 통일전선체였다. 김구는 1946년 1월 4일, 3단계 정부수립 방안과 함께 비상정치회의의 소집을 공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선 임시정부를 확대·강화하고, 곧 구성될 비상정치회의를 통해서 과도정부를 수립(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과도정부 아래 민주정신에 따라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정식 독립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註釋*27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 약칭 ‘전평(全評)’이라고 한다. 1945년 11월 5일 전국 각지로부터 505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는 조선민주청년동맹(朝鮮民主靑年同盟)의 청년조직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양대세력이 되었던 단체였다. 전평은 조선인민공화국 지지, 찬탁운동참여, 9월총파업 등으로 미군정에 대한 적대관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결국 극좌정치운동으로 나아갔다

 

註釋*28 - 비상국민회의 非常國民會議 : 임시정부가 1945년 9월 충칭(重慶)에서 발표한 임시정부 당면정책 제6항에 따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내외 각계각층 대표를 소집, 비상정치회의를 열어 과도정권을 수립한 뒤에 다시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 정식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탁통치를 사실상 배제하자는 것이었다. 1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비상정치회의의 제1차 주비회의(籌備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비상정치회의를 합류시키기로 결정하고, 명칭을 ‘비상국민회의’로 바꾸어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추대하였다.

 

註釋*29 -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 1946년 2월 1일과 2일 임시정부측 주최로 과도정부수립을 목적으로 소집된 비상국민회의가 그 의결로써 28명의 최고정무위원을 선출하였던바, 미군정의 종용을 받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Hodge,J.R.)의 자문기관으로서 과도정부수립을 촉진시키는 사명을 띠고 2월 14일 설치되었다.

 

註釋*30 - 철의 장막 iron curtain :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영국총리가 1946년 3월 5일에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주리주의 풀턴에서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의 배석 하에 이루어진 연설에서 사용한 소련에 의한 동유럽 지배의 비유, 또는 소련 진영의 국가들의 폐쇄성을 풍자한 말. 이 연설에서 처칠은 발트해에 면한 수데텐란트에서 남으로 내려와 아드리아해에 면한 트리에스테까지의 선상(線上)에 ‘철의 장막’이 쳐져 있다고 하여 소련에 의한 동유럽 지배를 비판하였다. 원래 동유럽 국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군에게 점령되거나 그 동맹국이 되었지만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의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한 이래 독일군의 철수와 함께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또한 1945년 2월의 알타회담에서 합의된 ‘해방 유럽에 관한 선언’에 따라 전후의 동유럽에는 공산당뿐만 아니라 다른 반(反)파시즘 정당을 포함한 연합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이 소련에 의한 동유럽 지배라고 비판한 배경에는 소련의 위협적인 강요로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영국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미소 냉전의 예고적인 연설이 되었다.

 

註釋*31 - 한국민주당 韓國民主黨 : 약칭 한민당이라고 한다. 1945년 9월 16일 서울 천도교기념관에서 발기인 1,600여 명이 모여 창당대회를 가졌다. 이에 참석한 정당·단체는 고려민주당·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국민대회준비회·충칭(重慶)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위원회 등이었다. 이들 정당·단체를 대표하는 민족지도자들은 1945년 9월 4일 서울 종로국민학교에서 대표 82명이 모여 신당발기총회를 가지고 당명을 ‘한국민주당’으로 결정하였으며, 9월 8일에는 한국민주당 발기인 1,000여 명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 타도성명서를 발표하고 충칭임시정부 절대지지태도를 밝혔다.

 

註釋*32 - 코뮤니케 제5호 :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됨에 따라 모스크바결정에 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해오던 우익 및 민족진영은 처지가 미묘하게 되었다. 이에 민주의원의 의장인 이승만은 사의를 표명하였다. 민주의원의 만류로 유보되었으나 민주의원의 활동을 부진상태에 빠저들었다. 4월 17일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이 되려면 모스크바협정을 지지하는 선언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는 이른바 미소공동위원회 ‘코뮤니케 제5호’가 발표되었다. 반탁진영에서는 즉각 거부의 뜻을 비추었으나 미 군정청의 하지 중장의 강력한 설득과 종용으로 5월 1일 일제히 선언서를 제출하였다. 반탁진영의 주장은, 선언서 제출이 신탁통치를 수락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반탁 민족진영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통일정부 수립에 참가함으로써 신탁통치를 실질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었다.

 

註釋*33 - 정읍발언 井邑發言 :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보도되었다. 좌익 중심의 찬탁운동과 우익 중심의 반탁운동의 대결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1946년 6월 3일,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이승만은 정읍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는 정치적 발언을 했다. 이 발언 이후,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그해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미국에 건너가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촉구하는 외교활동을 벌이고 돌아왔다. 그러나 소련붕괴 이후 공개된 소련정부의 기록, 특히 스탈린의 북한에 대한 지시자료를 검토한 일부 학자들은 스탈린의 북한 단독정부수립 계획은 이승만의 발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註釋*34 - 조선정판사위폐사건 朝鮮精版社僞幣事件 : 1945년 8·15광복 이후 여러 정치세력들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은 일제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近澤)빌딩을 접수하여 조선정판사로 개칭하고, 이를 위조지폐 발행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재정난으로 인하여 당 활동자금 조달방책을 모색하고 있던 중 조선정판사에 지폐원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원인 박낙종 사장에게 그들의 계획을 알렸다. 박낙종은 같은 곳에서 근무하던 공산당원 김창선(金昌善)에게 당 재정부장 이관술(李觀述)과 당 중앙집행위원이며 해방일보사 사장인 권오직(權五稷)의 지령을 전하였다. 1945년 10월 20일서울시 소공동 74번지에 있는 근택빌딩 내 조선정판사 사장실에서 사장 박낙종, 서무과장 송언필(宋彦弼), 재무과장 박정상(朴鼎相), 기술과장 김창선, 평판기술공 정명환(鄭明煥), 창고계주임 박창근(朴昌根) 등이 비밀리에 모여 위조지폐를 인쇄, 공산당에 제공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 7시 공장종업원들이 퇴근한 뒤 김창선이 평판과장으로 있을 때 절취, 보관하고 있던 100원권 원판(징크판) 등으로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위조지폐 1,200만 원을 위조하여 이관술에게 제공, 공산당의 활동비로 사용하게 하였다. 출처 불명의 위조지폐가 나돌아 경제를 혼란시키자 경찰은 수사에 착수하여 김창선이 지폐원판 1매를 서울오프셋인쇄소 윤석현(尹奭鉉)에게 보관시킨 것을 탐지하고 범인체포에 나서 1946년 5월 4일과 5일 중부경찰서(당시 本町경찰서) 형사대가 이재원 등 일당 7명을 체포하였다. 이어 그들의 자백에 의하여 5월 7일 공산당원 16명 중 간부 3명을 제외한 14명을 체포하였

 

註釋*35 - 신전술 新戰術 : 조선공산당은 해방 이후 미군정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이나 적대 행위를 자제했던 자세에서 벗어나, 1946년 7월 이후 적극적인 투쟁과 물리적 저항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채택한 전술이 ‘신전술’이다. 이것은 미군정과 남한의 우익을 차별해 대응하는 ‘이중전술’을 핵심으로 한다.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해서는 ‘공세적 압박전술’을 사용하고, 남한 내의 우익세력에 대해서는 ‘정당방위의 자위전술’이라는 성격으로 전술을 구체화했다. 공세적 압박과 정당방위의 자위전술은 이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등으로 이어졌고, 이는 신전술의 정책 방향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전술은 대중들의 불만과 요구의 해결책으로 제기되는 민주개혁의 과제가 북한에서는 이미 시행되고 있음을 선전함으로써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의 지지를 회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군정에 대한 공세적 압박을 통해 미소공위를 재개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註釋*36 - 영구차 행렬로 위장한 박헌영의 월북 :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당시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로 들어간 상태(1946년 5월 8일)에서, 미군정이 좌익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탄압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1946년 9월 6일,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간부 이강국, 이주하가 체포령을 발부되었다. 같은 날 미군정청은 3대 좌익신문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현대일보를 폐간시키고 신문사의 간부들을 체포했다. 이때 박헌영은 지하로 잠입했다가 북한으로 탈출했다. 박헌영의 월북 시기에 관한 여러 엇갈린 견해들이 있다. 하나는, 「미군정의 체포령이 떨어지기 전날인 1946년 9월 5일 오전 8시, 관 속에 들어가 장례차로 위장하여 의정부 포천 위쪽 양문리 근처 38선에서 이동수 외 5명 청년들의 경호를 받으면서 이북 해주로 탈출했다.」는 견해이다. 박갑동 씨는 그의 저서 「박헌영」167-168쪽에서 「박헌영은 1946년 9월 6일 체포령 전에 극적으로 서울에서 극비리에 탈출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의 탈출 행각에 대해서, 「박헌영은 이날 한 평 반 남짓한 영구차 속, 자기 키보다 조금 큰 검은 관 속에 반듯이 누워 시체를 가장해서 월북했다. 38선 접경에 이를 때까지 혹시나 경찰의 검문을 염려해서 가족으로 분장한 남녀당원 몇몇이 흡사 경기도 일원의 어느 선산에 매장이나 하러가는 듯한 장례차림을 꾸민 것이다. ... 이 행렬에 뽑힌 5명의 호위원은 공산당 내에서 엄선된 일당백의 행동대원들이었다.」라고 자세히 기록하였다.

 

註釋*37 - 좌우합작위원회 左右合作委員會 : 1946년 5월경 국내 정치세력은 미군정의 분류 기준에 따르자면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하는 극우세력, 김규식·원세훈 등의 중도 우파세력,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좌파세력,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하는 극좌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좌익 탄압과 함께 우익 세력 강화를 도모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으로 선택된 미국의 정책

 

註釋*38 - 10월항쟁 十月抗爭 : 1946년 10월 2일 대구에서 발생한 경찰과 시민들 간의 대규모 유혈충돌. 10월 1일 파업에 대한 군·경·테러단의 폭행에 항의하는 군중집회에 경찰이 발포, 사망자가 발생하자, 다음날 노동자·시민·학생이 합세하여 경찰관서를 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에 대구지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미군정과 경찰에 대향하는 격렬한 시위는 성주·고령·영천·경산 등지로 번져 나갔으며, 경남·전남·전북·강원 등 전국으로 퍼졌다. 초기의 총파업은 전평의 지휘하에 이루어졌으나, 이후 전국각지에서 발생한 민중들의 항쟁은 이미 공산당의 통제를 떠나 민중들의 쌓인 불만이 격렬하게 터져 나온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각지의 경찰서·파출소·면사무소가 파괴되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의 결과, 공산당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잔존하던 지방의 인민위원회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註釋*39 - 남조선노동당 南朝鮮勞動黨 : 약칭 남로당(南勞黨) : 좌익세력을 총집결하기 위하여 여운형(呂運亨)이 당수로 있던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 및 백남운(白南雲)이 당수로 있던 남조선신민당(南朝鮮新民黨)과의 3당 합당공작에 착수하였다. 1946년 9월 4일에는 3당 합동준비위원회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합당결정서와 선언 및 강령이 채택되었으며,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46년 11월 23일 박헌영과 그의 지지파는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였다,

註釋*40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南朝鮮過渡立法議院 : 1946년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미군정 당국은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 온건한 좌우파의 지도자들에게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알선하는 한편, 이들을 중심으로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였다. 1946년 6월 29일 군정장관 러치(Lerche,A.L.)는 조선 인민이 요구하는 법령을 조선 인민의 손으로 제정하는 입법기관의 창설을 미군사령관 하지(Hodge,J.R.)에게 건의하여 그 해 7월 9일 하지의 동의를 얻어 8월 24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을 발표하게 하였다. 입법의원은 모스크바삼상회의협정에 의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 초안을 작성하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

 

註釋*41 - 트루먼독트린 Truman Doctrine : 1947년 3월 미국 대통령 H.S.트루먼이 의회에서 선언한 미국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이다. 그 요지는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자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당시 공산세력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反共) 정부에 대하여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원조가 제공되었다. 이 원칙은 그후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으며, 유럽부흥계획과 북대서양조약으로써 구체화되어 갔다

 

註釋*42 - 격몽의숙 : 평안북도 영변출신인 한지근은 서울로 내려왔지만 번번한 벌이가 없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같은 영변출신으로 먼저 월남한 중학동창 김훈을 찾아가자 그는 숙식이 가능한 집을 소개해주었다. 집은 ‘격몽의숙’이라고 자칭했고 집주인은 송진우 암살범으로 극우테러 조직을 이끌던 한현우였다. 감옥에 있는 한현우를 대신해 백의사를 유지하며 집에 기거하던 인물은 신동운이었다. 신동운은 송진우의 경호원이었다. 신동운은 파시즘 내용이 다분한 한현우의 옥중수기를 한지근에게 읽도록 권유하며 민족의 분열을 유도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논리를 주입시켰다. 신동운은 한현우의 결심공판에 한지근을 데려가는 등 테러요원으로 양성했다. 한지근은 신동운이 지어준 가명이었다. 여운형 암살은 한지근의 단독범행이라고 발표되었다. 하지만 1974년 김흥성, 김영성, 김훈, 유용호 4명이 자신들이 배후라고 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소시효가 지난 탓에 이들에 대한 조사와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註釋*43 - 백의사 白衣社 : 백의사는 염응택의 주도로 1945년 11월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북한지역과 남한지역에서 공히 활동한 극우반공테러공작단이다. 백의사(白衣社)라는 명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반공지하공작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한 것이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평안남도 도위원장 현준혁을 암살한 것으로 알려진 대동단이 백의사의 전신이고 염응택, 박고봉, 백관옥, 선우봉, 박진양 등이 대동단의 주요 인물들이다. 백의사는 현준혁 암살사건 직후 대동단의 관련자들이 월남하여 개칭·정비한 동일 성격의 단체이다. 백의사는 반공·반탁·반북을 기치로 한 대북 테러·암살·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첩보원들을 훈련시켜 북한지역에 파견하였고 파견된 요원들은 토지개혁 반대선동, 신탁통치 반대활동, 주요 지도자 및 조직·단체에 대한 정보수집, 임시정부 지지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내무상 신익희가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협력하여 김일성 암살 시도(1946년 3월 1일), 최용건 자택 습격(1946년 3월 5일, 7일) 김책 자택 습격(1946년 3월 9일), 강양욱 자택 습격(1946년 3월 12일) 등을 감행하였다. 백의사는 남한 지역에서도 동일한 반공활동을 폈는데, 특히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경찰과 국방경비대, 노동총연맹 등에 구성원들을 가입시켜 활동하도록 하였다. 백의사는 미군 방첩대(CIC)의 지원을 받아 대북 첩보·정보활동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지속되었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백의사의 성원 상당수가 미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LO: Korea Liaison Office) 부대로 흡수되었다.

 

註釋*44 - 장덕수의 암살 : 1947년 12월 2일 오후 6시 50분경, 우익 민족진영의 최고이론가 설산(雪山) 장덕수가 제기동 자택에서 손님들과 환담을 나누던 중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박광옥과 공범 배희범이 쏜 총탄을 맞고 자택에서 숨졌다. 이때 붙잡힌 배희범, 박광옥 등과 그들의 배후로 지목된 김석황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고, 김석황은 한독당 중앙위원이자 국민회의 동원부장, 임시정부 등에도 관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19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독당 당원이었다.

 

註釋*45 - 한국문제의 UN상정 및 총선거 결의 : 남북한 문제해결을 위한 미 · 소 공동위원회 활동이 무산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한국독립' 문제를 제2차 유엔 정기총회에 안건으로 제출하였다. 이 안건에 대해 유엔총회 운영위원회에서 소련과 폴란드는 반대, 타이완(대만)과 영국 등은 찬성하였다.

 

註釋*46 - UN 한국임시위원단 : UN 총회는 1947년 11월 14일 본회의에서 전국적인 총선거를 통해 한국에 독립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함과 동시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UN 한국임시위원단(The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을 구성했다.

 

註釋*47 - 남북협상의 과정(남북요인회담) : 1948년 2월 중간파 정치세력인 민족자주연맹은 위원장 김규식의 주재로 정치위원 홍명희(洪命憙)·원세훈(元世勳) 등 5명과 안재홍(安在鴻)·여운홍(呂運弘)·최동오(崔東旿)·유석현(劉錫鉉)·이상백(李相佰) 등 상무위원 17명이 김규식의 숙소 삼청장에서 연석회의를 열고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요망하는 서신을 보내기로 결의, 한국독립당 위원장 김구의 승낙을 얻어 김구·김규식 두 사람의 연서로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엄항섭(嚴恒燮)이 기초한 남북요인회담 개최 요망서가 서울 주재 소련군대표부를 통하여 북한에 전달되었다. 국제연합임시위원단의 인도 대표 K.메논과 중국 대표 리우위완[劉馭萬]은 이에 관심을 보이면서 북한측 회답이 오는 대로 국제연합소총회에 반영하려고 하였으나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연합소총회는 미국 대표의 제안에 따라 메논의 제1방안, 즉 총선거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추진한다는 방안이 31:2로 가결됨으로써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 결정은 단독정부수립을 추진하던 한국민주당과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를 비롯한 정당단체대표들에게는 희소식이었으나, 김구 등 통일정부수립을 갈망하던 중도세력에게는 실망을 안겨주었다. 북한은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남한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의 민주주의 독립국가 건설을 이룩하자는 내용의 북한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제26차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평양방송과 서신으로 남한의 17개 정당사회단체 및 김구·김규식 등 15명에게 전달하였다. 이 제의는 김구와 김규식이 보낸 서신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다가 국제연합결의에 의하여 남한단독정부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나온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남한측의 정부수립노선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북한측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방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기대가 컸기 때문에, 김구와 김규식은 그 동안 남북간에 오고간 서신을 공개하면서 두 사람이 남북요인회담을 요청한 이상 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註釋*48 - 련외무성소관문제 - 1948.1.21.

소련대외정책고문서보관소 문서번호 F07,OP.21.P22.D.316

 

註釋*49 - 비신스키, 몰로토프동지에게 비준바람 - 1948.4.19.

소련대외정책고문서보관소-문서번호 NO.88/MA)

 

註釋*50 - 레베데프 비망록 18쪽

 

註釋*51 - 레베데프 비망록 20쪽

 

註釋*52 - 4월17일자 레베데프 비망록

 

註釋*53 - 레베데프 비망록 52쪽

 

註釋*54 - 경향신문 1948년 4월 17일 기사

 

註釋*55 -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 1948년 4월 19일,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본회의가 남북 46개 단체 대표 545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김일성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회의는, 조선의 정치정세 및 남한 단선,단정 반대투쟁 대책을 회의 안건으로 채택했다

 

註釋*56 - 북한의 헌법 제정 : 사회경제개혁과 권력구조의 정비, 민족간부 양성 등을 통해 국가 건설의 기초를 닦은 북한의 사회주의 세력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국가의 기초를 성문화하는 헌법 마련에 나섰다. 1948년 3월에 개최될 예정이었던 임시헌법 채택을 위한 인민회의가 4월로 연기되었다. 북한만의 헌법 논의가 남북협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종료된 뒤인 1948년 4월 29일, 북조선 인민회의 특별회의는 헌법 초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대표자 연석회의에 이어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열리고 있는 도중이었다. 김일성은 이 헌법이 남북한 인민 모두가 찬성을 한 헌법이라고 선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