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 너는 누구인가 ? > - 한국문학신문 2019년 2월 13일(제389호)

高 山 芝 2019. 2. 18. 17:58


< 너는 누구인가 ? > - 고 산 지

 

돗자리 펴고 앉아

세상을 바라보네

 

자리 위 자리 만들고

자리 아래 자리 만든 사람들

 

세상의 모든 자리

하늘의 소유인데

 

모두가 내 자리라 생떼를 쓰고 있네

 

“우리가 남이 가?”

“먹는 놈이 임자지!”

 

떼지어 무리지어 시끌벅적 요란하네

 

격한 자리 싸움

기둥뿌리 썩는데도

 

하늘이 펴 준 자리

감사할 줄 모르고

 

소견대로 모두들

자기 말만 하고 있네

 

자리를 펴고

자리 위에 앉아서

 

하늘이 펴 준 자리에 앉아서

하늘이 준 자리는 망각하고

 

소견대로 살아가는

너는, 너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사랑의 빚을 갚는 일차적 행위로 영.미권에서는 당신이 내게 베푼 호의를 기억하겠다는 의미에서 "thank you" 라는 감사말을 한다. “thank"의 어원은 ”think(생각하다)“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의 감사말 ”메르시(merci)“에는 호의로 인한 마음의 빚에 대한 자비를 구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포르투칼의 감사말 “오브리가도(obrigado)"의 의미는, ”빚을 졌다“는 부채의식을 나타낸다. 일본의 감사말 ”아리가토“의 어원이 포르투칼어 ”오브리가도“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한자(漢字)의 감사(感謝)는, ‘다 함(咸)’자와 마음 ‘심(心)’자로 이루어진 형성문자 “느낄 감(感)”자와, ‘말씀 언(言)’자와 ‘쏠 사(射’)자를 합한 형성문자 “사례할 사(謝)”가 합하여진 뜻 글자이다. 감사는 배려나 친절을 입은 즉시, 마음을 다해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은혜를 입었거나 친절을 받았을 때 갚아야 하는 채무의식은,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를 절제하게 하고, 예의나 법도라는 관습을 통하여 세상을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에너지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사회야 말로 건강한 사회이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사회이다.

 

인본주의가 발달하자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신의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 이념이 자리잡은 후 평등을 주창하자, 사람들은 감사하는 법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감사(感謝)가 사라저 가는 시대,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저가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책임은 사라지고 권리만 남은, 쉬지않고 남과 비교하면서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갈등을 유발하고, 잘 난 사람을 헐뜯어 마침내는 열등하게 만드는 혼탁한 사회이다. 책임은 지지않고 권리만 내세우는 허상의 사회이다. 책임과 권리는, 자유와 평등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에게 구속됨으로 누릴수 있도록 설정된 하나님의 선물이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6-28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관리를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맡겠다. 증여가 아닌 관리의 책임을 맡긴 것이다.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관리하는 행위는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책임이었다. 인간의 타락은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잘못은 보지않고 남의 탓을 하는 인간의 성정(性情)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原罪)이다. 뱀의 유혹에 빠진 화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함께 먹을 것을 권유했다. 문제는선악과를 따먹고서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말씀을 어긴 사실에 대한 양심의 가책보다는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이 더 부끄러운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치부를 가렸다. 말씀을 어긴 것은 양심에 관한 사안이지만, 벌거벗음은 체면에 관한 사안이다. 양심보다는 체면을 중시한 인간의 죄성이 바로 원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필자는 해본다. 다음은 하나님의 낯이 두려워서 동산의 나무사이에 숨은 아담과 하나님이 나눈 대화이다

 

하나님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 담 : “내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 :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

아 담 :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의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 :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 와 :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체면과 남을 탓하는 인간의 성정은 하나님과 멀어질 때 나타는 현상이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모든 상황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한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보는 관점에 따라 사건의 본질이 바뀌게 된다. 기준이 제각각 다름은 갈등의 원인이 되고 분쟁의 불씨가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거리를 찾는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은 자신에게 미치는 손익계산을 먼저 한다. 그리고 잘못되면 남 탓을 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내로남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