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중(尊重) > - 금강일보 2019년 6월 5일 18시 17분 승인
< 존중(尊重) >
씨 뿌려야 열매 맺게 되는데
인정해야 인정 받게 되는데
사랑하면 존중하게 되는데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는데
뿌린대로 열매 맺는 자연의 섭리
거역한 인간의 오만한 성정(性情)
인정 받고싶고 존경도 받고싶어
자기 의(義) 드러내며 바벨탑을 쌓고 있네
번거로운 생각이 탐심(貪心)을 만들고
외식(外飾)하는 마음은 진리를 거부하네
천하 보다 귀한 생명
존중하고 바라보면 가치가 보이네
천하 보다 귀한 생명이기에
내가 먼저 존중하고 내가 먼저 사랑하네
바라보는데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코람 데오’라는 말은 라틴어 ‘코람’과 ‘데우스’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코람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라는 의미이고, 데오는 하나님을 뜻하는 데우스의 탈격 명사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코람 데오’가 되었다. “하나님이 앞에서”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라는 경건한 삶을 뜻하는 코람 데오는 기독교의 신학적 용어이다.
한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보일 시(示)자가 들어있는 한자는 모두 신(神)과 관계가 있다. 회의문자인 신(神)자는 ‘귀신’이나 ‘신령’, ‘정신’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귀신 신(神)자는보일 시(示)자와 펼 신(申)자의 합성어이다. 신(申)자는 번개가 내리치는 모습을 그린 뜻 글자이다. 옛사람들은 번개를 신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하늘의 신으로 신(申)자를 ‘사용했다. 후에 신(申)자에 ‘펴다’라는 뜻이 가차(假借)되면서 여기에 보일 시(示)자를 합성하여 ‘신’이나 ‘신령’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예의나 예절을 뜻하는 ‘예도 예(禮)자“도 보일 시(示)자가 들어 있다. 예(禮)란 인간이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서 비롯되었다. 귀신을 부르는 제사상은 늘 풍성해야 했다. 굿을 하는 무당들은 귀신은 배가 불러야 감응을 하는 법이니 진설한 음식이 풍성해야 한다며 백성들을 속이지만 ’보여주는 것‘ 보다는 ’보시기에 좋은 것‘이 진정한 제사이다. 이 때문에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가르치고 있다. 처지나 형편에 격식을 차리는 것이 올바는 예이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고 했다. 과공이 때로는 오만하거나 비굴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인정하는 것’은 지식의 결과물이 아니다. 절대자 앞에서 자신을 성찰할 때 깨닫게 되는 지혜는 존재의 부정이 아닌 존재의 인정이다. 사람들은 듣는 훈련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싶은 것 만 보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훈련이 부족하고 성급히 판단을 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소란은 상대방의 입장을 인정하지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듣지않으면 인정할 수 없고, 존중은 더욱 할 수가 없게 된다. 인정하는 믿음이 존중을 잉태한다. 서로간의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주장만 하고 상대편의 말은 들지 않을려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라는 뜻의 사자성어 무신불립(無信不立)에 대한 이야기는 《논어》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자공(子貢)이 정치(政治)에 관해 묻자,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라고 대답하였다. 자공이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며,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대답했다.
자신들의 붕당(朋黨)만을 위한 정치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도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상대방을 인정하지않기 때문에 정책 대결이 사라지고, 스캔들을 만들어 매장시키려는 정략이 난무하는 작금의 정치 현실이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증오가 기득찬 사회, 오직 나라 만을, 오직 백성 만을 바라보는 정치 지도자가 그리운 새벽넠이다
씨 뿌려야 열매 맺게 되는데
인정해야 인정 받게 되는데
사랑하면 존중하게 되는데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는데
뿌린대로 열매 맺는 자연의 섭리
거역한 인간의 오만한 성정(性情)
인정 받고싶고 존경도 받고싶어
자기 의(義) 드러내며 바벨탑을 쌓고 있네
번거로운 생각이 탐심(貪心)을 만들고
외식(外飾)하는 마음은 진리를 거부하네
천하 보다 귀한 생명
존중하고 바라보면 가치가 보이네
천하 보다 귀한 생명이기에
내가 먼저 존중하고 내가 먼저 사랑하네
바라보는데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코람 데오’라는 말은 라틴어 ‘코람’과 ‘데우스’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코람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라는 의미이고, 데오는 하나님을 뜻하는 데우스의 탈격 명사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코람 데오’가 되었다. “하나님이 앞에서”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라는 경건한 삶을 뜻하는 코람 데오는 기독교의 신학적 용어이다.
한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보일 시(示)자가 들어있는 한자는 모두 신(神)과 관계가 있다. 회의문자인 신(神)자는 ‘귀신’이나 ‘신령’, ‘정신’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귀신 신(神)자는보일 시(示)자와 펼 신(申)자의 합성어이다. 신(申)자는 번개가 내리치는 모습을 그린 뜻 글자이다. 옛사람들은 번개를 신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하늘의 신으로 신(申)자를 ‘사용했다. 후에 신(申)자에 ‘펴다’라는 뜻이 가차(假借)되면서 여기에 보일 시(示)자를 합성하여 ‘신’이나 ‘신령’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예의나 예절을 뜻하는 ‘예도 예(禮)자“도 보일 시(示)자가 들어 있다. 예(禮)란 인간이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서 비롯되었다. 귀신을 부르는 제사상은 늘 풍성해야 했다. 굿을 하는 무당들은 귀신은 배가 불러야 감응을 하는 법이니 진설한 음식이 풍성해야 한다며 백성들을 속이지만 ’보여주는 것‘ 보다는 ’보시기에 좋은 것‘이 진정한 제사이다. 이 때문에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가르치고 있다. 처지나 형편에 격식을 차리는 것이 올바는 예이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고 했다. 과공이 때로는 오만하거나 비굴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인정하는 것’은 지식의 결과물이 아니다. 절대자 앞에서 자신을 성찰할 때 깨닫게 되는 지혜는 존재의 부정이 아닌 존재의 인정이다. 사람들은 듣는 훈련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싶은 것 만 보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훈련이 부족하고 성급히 판단을 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소란은 상대방의 입장을 인정하지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듣지않으면 인정할 수 없고, 존중은 더욱 할 수가 없게 된다. 인정하는 믿음이 존중을 잉태한다. 서로간의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주장만 하고 상대편의 말은 들지 않을려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라는 뜻의 사자성어 무신불립(無信不立)에 대한 이야기는 《논어》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자공(子貢)이 정치(政治)에 관해 묻자,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라고 대답하였다. 자공이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며,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대답했다.
자신들의 붕당(朋黨)만을 위한 정치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도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상대방을 인정하지않기 때문에 정책 대결이 사라지고, 스캔들을 만들어 매장시키려는 정략이 난무하는 작금의 정치 현실이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증오가 기득찬 사회, 오직 나라 만을, 오직 백성 만을 바라보는 정치 지도자가 그리운 새벽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