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 고산지(시인 및 칼럼니스트) 여행문화 2021. 여름호

高 山 芝 2021. 6. 5. 13:37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  고산지(시인 및 칼럼니스트)

 

전남 장흥군 장흥읍 억불산(億佛山) 입구에 위치한 상선약수 마을은 억불산 봉수대(烽燧臺)를 관리하고 지키던 병정들이 상주하면서 성촌(成村)된 마을이다. 고려 말 왜구토벌에 공을 세운 신경원(申敬源)이 조정으로부터 하사 받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사전(賜田)인 화속지(化蜀地)로 그의 손자 신원수(申元壽)가 이곳에 정착, 평산신씨(平山申氏)의 화속지(化蜀地)에서 평산의 ()’ 자과 화속지의 ()’자를 차용해 평화마을로 불렀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5 대손 고응수(高應壽)는 창평에서 장흥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손자 진해현감 고석겸(高碩嗛)이 영조 때 국지사 이계현(李啓鉉)의 권유로 1770, 다선일여(茶禪一如)를 구현했던 정화사(淨化寺)라는 암자를 구입하여 정화사(淨化舍)를 신축한 후 평화마을은 장흥고씨(長興高氏)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1941년 평화리(平化里)를 내평(內平)과 외평(外平)으로 구분하여 내평(內平)을 평화1구라 하였는데 현재는 상선약수(上善藥水)마을로 불리고 있다.

 

()는 물의 정신(精神)이요 / 물은 차()를 닮은 몸이니 / 참물(眞水)이 아니면 / 차의 정 신이 나타나지 않고 / 참다(精茶,眞水)가 아니면 차()의 몸 또한 제대로 볼 수 없네 // 무 릇 참물이란 / 가볍고(), 맑고(), 시원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 맛있고(), 냄새가 없으며(無臭), 비위에 맞아(調適) / 마시면 탈이 없어야 하나니(無患) / 8(八德)을 가진 여 덟 개의 샘이 / 옛적부터 평화마을 지키고 있었네. // 억불산 자락의 동사천(東寺泉)과 서당 샘 / 마을 안에 자리 잡은 윗샘(上泉), 아랫샘(下泉), 담안샘(內泉) / 가운데 골의 중곡천(中 谷泉과 차뜽의 선정천(山亭泉) / 우복동(牛腹洞)의 우복천(牛腹泉)/ 정화다소(丁火茶所) 의 명물이었네 // 8(八德)을 가진 여덟 개의 샘과 / 주위에 산재한 야생의 차나무로 / 선 다일여(禪茶一如) 구현했던 / 정화다소(丁火茶所) 정화사(淨化寺) / 지금은 정화사(淨化舍)로 형체만 남았네. // 강산이 바뀌기 수십 번 하는 동안 / 우복동(牛腹洞) 우복천(牛腹泉)은 저 수지로 변하고 / 선정천(山亭泉) 자리에는 공덕비가 서있네 / 푸른 이끼 무성한 윗샘과 아랫 샘 / 서당샘과 동사천(東寺泉)만 제 몫을 하고 있네 // 풍파(風波)에 마모되어 / 평등(平等) 으로 화()한 동네 / 자미수(紫微數) 꽃 이파리 송백정(松柏井)에 흩날리네 / 세상을 이롭게 하며 다투지는 말라면서 / 물처럼 살라며 물이 된 상선약수(上善藥水) / 정화사(淨化舍) 앞 을 지나 평화 뜰로 흘러가네.” - 졸시 <상선약수(上善藥水) 마을>

 

절터위에 세운 무계고택은 1988316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정화사(淨化寺)를 상징하는 듯 정화사(淨化舍)라는 현판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불교에서는 차 마시는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으로 인식한다.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차를 마시는 일련의 수행을 통하여 다선일여의 경지를 구현하던 정화사(淨化寺). 지금은 정화사(淨化舍)라는 현판을 달고 무계고택(霧溪古宅=高永完古宅)이 되었다.

 

아침이슬 같은 / 영롱(玲瓏)한 싱그러움 / 일렁이는 찻잔을 들고 / 정화사(淨化舍) 마루에 앉았네 / () 한 모금 / 혀끝으로 삼키니 / 껄껄한 목젖에 가득한 청향(淸香)/ 비린 오장육부(五臟六腑) 씻어내고 / 흔들리는 달빛 따라 / 신묘(神妙)한 충만(充滿)이 정화사(淨 化舍)를 채우네.” - 졸시 <정화사(淨化舍)에서>

 

상선약수마을 중심에는 배롱나무 군락지 송백정(松柏井)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배롱나무는 백일동안 꽃이 핀다 하여 백일홍, 꽃이 지고나면 벼가 익는다 하여 올벼꽃나무, 건들면 나무 가지 가 파르르 떤다 하여 간지럼나무 또는 부끄럼나무를 의미하는 파양수(怕癢樹) 등으로 불리운다. 중국에서는 배롱나무를 자미화(紫薇花)라고 한다, 양귀비를 사랑했던 당나라의 현종은 36부의 하나인 중서성(中書省)에 자미화(紫微花)를 심고 자미성(紫微省)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식물의 품격을 1품에서 9품으로 나누고 있는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강희안(姜希顏)은 배롱나무를 매화 소나무와 함께 1품으로 등재했다. 송백정(松柏井)50평 남짓의 작은 연못을 독립 운동가이자 제2, 5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영완씨가 1934, 크게 확장하면서 배롱나무를 구해 심었다. 섬 가운데 서있는 소나무와 동백나무는 고영완의 고조부 고언주(高彦柱)씨가 심은 것으로 배롱나무와 어우러져 옛 정원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배롱나무 꽃 이파리 / 버무러진 송백정(松柏井) / 하얀 나비 붉은 나비 / 너풀너풀 춤을 추 네. / 유치찬란한 꽃들의 향연(饗宴)/ 연못의 수초들 / 넋을 잃고 말았네 / 모듬지에 걸 린 하늘 / 물풀 사이 끼어들자 / 일렁이는 송백정(松柏井) / 온갖 색깔 일어나서 / 햇살따 라 둥실 둥실 춤을 추기 시작하네” - 졸시 <송백정(松柏井)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