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시편 - < 고제환(高濟渙)과 장흥민란(長興民亂)> -한국문학신문 2021년 9월 15일
고제환(高濟渙)과 장흥민란(長興民亂)
고 산 지 지음
< 나라의 상앗대가 되어서 >
방패(防牌)보다는 망루(望樓)가 되고 싶었네
나라의 유익한 상앗대가 되고자
34세(1843년)의 나이에 선전관(宣傳官)되어서
여덟 살(1843년)에 왕이 된 헌종을 호위했네
열넷의 나이로 헌종(1849년)이 승하하자
보성군수 임명되어 보성 땅에 부임했네
안동김씨 김문근(철종의 장인)은 젊은 실학자(實學者)
남병철(南秉哲,1837년 登科)을 유난히 총애했네
훈련대장 김병국과, 대제학 김병학, 좌찬성 김병기의 권세
막을 자가 없지만 남병철은 그들의 눈에 가시였네
성별(性別)을 바꾸는 일 외, 못할 일 없다던 김병기
남병철에게 전라감사 감투 주어 외직으로 쫓아냈네
삼정(三政)은 문란하고 매관매직(賣官賣職) 성행하니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 수탈(收奪) 여념 없고
고혈(膏血 )짜는 아전(衙前) 횡포 하늘까지 닿았네
부임(赴任)한 고제환 고을 재정(財政)을 살펴보니
대여(貸與) 양곡(糧穀) 8만석 사라지고 없었네
환곡(還穀) 8만석, 뉘가 착복(着服)하였을까?
군내(郡內) 부호(富豪) 38명, 명륜당(明倫堂)에 소집(召集)하여
환곡(還穀) 8만석 대상(代償)을 강요했네
포탈(逋脫)된 세금징수, 공권력(公權力)을 발휘하자
안동김씨 검은 손이 암암리에 작동(作動)하네
경술복합상소(庚戌伏閤上疏) 빌미삼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전라감사(全羅監司) 남병철(南秉哲), 중추(重推)로 소환되고
부임한지 9개월에 파출(罷黜)된 고제환 삼척부도(三陟府徒)
3년 반에 별세초(別歲抄) 방질(放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네.
가렴주구(苛斂誅求) 세도정치(勢道政治) 삼정(三政)이 무너졌네.
매 20년마다 해야 하는 양전(量田)이 실종(失踪)되니
멀쩡한 정전(正田)이 은결(隱結)로 바뀌었네
은결(隱結)에서 거둔 세금(稅金) 착복(着服)하는 수령방백(守令方伯)
이속(吏屬)과 야합(野合)하여 도결(都結)이 성행(盛行)하니
수령(守令)·이서(吏胥) 횡령환곡(橫領還穀)
수탈(收奪)하는 늑대강징(勒貸强徵)
늑탈(勒奪)하는 세곡작전(稅穀作錢)
인징(隣徵)·족징(族徵)·동징(洞徵)의 가혹한 징포(徵布)제도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 끝이 없는 군정문란(軍政紊亂)
삼정(三政)문란으로 수탈(收奪)이 계속되자
백성(百姓)들이 일어섰네, 민중(民衆)이 일어났네.
영남(嶺南)에서 붙은 불, 삼남(三南)으로 번지었네.
정남진(正南津) 장흥골 풍성한 농수산물로
전세(田稅)와 대동세(大同稅)외 대모갑(玳瑁甲)을 공납했네.
대모갑(玳瑁甲)이 귀해지자 수령(守令)·이서(吏胥) 합작하여
대모갑 대신에 대전납(代錢納)을 권장했네.
불편함을 해결하는 선행으로 알았더니
4-50량 하던 대전납(代錢納) 해마다 늘더니 3,400량이 되었네.
정방현(鄭邦賢)과 임재성(任在星)이 국로(國櫓)를 찾아와서
수령(守令)·이서(吏胥) 횡포(橫暴)에 울분을 토로했네.
임술(壬戌)년 춘궁(春窮)기는 유난히 힘들었네.
동헌(東軒) 앞에 모여든 천여 명의 백성들
관아(官衙)를 습격하자 목청을 높이었네.
국로(國櫓)가 나서서 백성들을 설득했네.
방백 없는 동헌 습격, 의미가 없다면서
이방 주찬우 등 오리(汚吏)부터 찾으라네
하리(下吏) 주신우 집 파괴(破壞)되어 불에 타자
전라감사 정헌교(鄭獻敎), 고제환을 나포(拿捕)하여
반란의 괴수로 의금부로 송치(送致)했네
국로(國櫓)가 체포되자, 흥분한 백성들
관아를 습격하여 공해(公廨)를 불태웠네.
전라감사가 민란을 진압하자 향리(鄕吏) 이향유
수백 명을 동원하여 국로(國櫓) 거처 파괴했네.
잡초 무성한 빈터 스산한 솔바람소리
그날의 기억, 찾을 길 없고 사랑채 흔적만 남았네
상앗대의 꿈을 꿨던 목민관(牧民官) 고제환
두 번의 유배(流配)에도 꺾이지 않았네
65세 늙은 나이, 무산도호부사 명을 받고
80세 장수하여 내금위장(內禁衛將) 발령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었네.
[1] 세도정치의 배경과 장흥민란(임술민란)의 원인
영조 이후 조선역사의 중심은 사도세자思悼世子였다. 정조, 순조, 헌종은 사도세자의 적손嫡孫이었으나, 철종哲宗은 사도세자의 서손庶孫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고종高宗은 1815년 은언군恩彦君의 동생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의 양자로 입적한 남연군南延君의 손이다. 왕가의 손孫이 귀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등극한 왕이나, 입적하여 왕이 된 이들의 친족親族과 외척外戚의 세도정치 피해는 오롯이 백성의 몫이었고, 이는 임술민란(壬戌民亂=三南民亂)의 원인이 되었다.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할 때, 11살의 나이로 울면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정조는 사도세자 사후, 영조의 큰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어 24살에 왕위를 이어받았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외척제거와 남인南人 채제공蔡濟恭을 등용하여 탕평책을 폈다. 노론 벽파(僻派=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연하다고 주장)정권이 들어서자, 사도세자의 죽음을 억울한 죽음으로 규정하되 관련자들은 처단하지는 않겠다는 오회연교五晦筵敎를 반포했으나 정조가 갑작스레 사망을 했다. 1800년 11살의 순조純祖가 왕위를 이어받고 정순왕후(定順王后. 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1804년부터 순조가 직접 국정을 관장하면서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시작된 세도정치 여파로 삼정三政이 문란紊亂하게 되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헌종憲宗은 순조의 손자로, 아버지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순조의 뒤를 이어 1834년(순조 34)에 8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았고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의 비.안동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순조는 죽기 전에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영趙寅永에게 헌종을 부탁했다. 헌종이 14세가 되던 1840년(헌종 6)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2] 고제환高濟渙의 생애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인 고제환高濟渙의 고조부 고만거高萬擧는 종.형제가 과거에 함께 급제하자 스스로를 경계하라는 연자시戀子詩 5언절구 70수를 남겠다. 고제환의 증조부 고석겸高碩謙은 무과에 급제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1770년[영조] 평화리에 입향한 장흥고씨 평화파의 입향조이다. 연자시를 가슴에 품고 스스로를 경계했던 증조부처럼 고제환도 연자시戀子詩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 국로[國櫓 나라의 방패, 나라의 노]라는 호를 가진 고제환高濟渙은 의금부義禁府에 두 번이나 송치된 특이한 인물이다. 1843년 12월 26일[헌종 9년] 34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그는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16세의 헌종憲宗을 호위護衛했다. 1849년 6월 6일, 23살의 나이로 헌종憲宗이 승하하자, 조정은 6년 넘게 헌종憲宗을 모셨던 고제환을 7월 25일자로 보성군수에 임명했다. 보성군수 재직 9개월 만에 발생한 고재환의 1차 옥사獄事는 전라관찰사 남병철의 기를 꺾기 위한 김문기[안동 김씨]의 덫이었다. 1850년 5월 9일[철종 1년] 보성군의 경술복합상소를 근거로 김문기는 관찰사 남병철과 보성군수 고재환 그리고 능주목사 김진화를 의금부로 송치했다. 1853년 10월 10일[철종 4년] 사면되어 고향 장흥에 은거한지 10년 후 고제환은 세도정치의 폐단 삼정문란이 원인이 된 임술민란 때 장흥민란의 괴수로 지목되어 1862년 5월 25일[철종 13년] 2차 옥사獄事를 겪는다. 두 번의 귀양살이 끝에 순종純宗이 태어난 해, 1874년 12월 17일[고종 11년] 65세의 나이로 무산부사茂山府使가 된다. 무산부사가 된 후의 고제환에 대한 기록은 1889년 1월 2일[승정원일기 고종 26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조선 시대에,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관원들의 품계를 올리는 일, 조관(朝官)으로서 나이 80세가 된 사람에게 법전에 따라 가자하였다] 한 후 1889년 1월 27일 내금위장[內禁衛將 무관 종2품]과 동지[同知 중추부 종2품]에 단부單付된다. 이상은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고제환의 이력이다.
[3] 고제환의 1차 옥사獄事
헌종이 승하하자 1849년 8월20일[憲宗 15 己酉] 보성군에 부임한 고제환은 고을 재정財政을 살펴보니 대여貸與 양곡糧穀 8만석 사라지고 없었다. 환곡還穀 8만석의 착복着服 여부를 가리기 위해 군내郡內 부호富豪 38명 명륜당明倫堂에 소집召集한 후 환곡還穀 8만석 대상代償을 강요했다. 이 사건은 보성 유림의 경술복합상소庚戌伏閤上疏로 이어졌다.
보성향교지의 경술복합상언운동에 관한 서술은 사실관계의 왜곡으로 시작된다.
“이조 헌종 15년 [己酉:서기1849] 8월20일에 본군 군수로 부임한 고제환은 철종대왕과 이종姨從간이며 당시 전라관찰사 남병철과 남매간이였다.”
고제환은 헌종을 6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모신 외에는 왕실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고제환과 남병철은 남매간이 아닌 사돈관계였다. 고제환의 큰 사위 유기동柳冀東이 남병철의 매형 유영로柳永魯에게 입양되어 사돈이 되었다.
“이에 격분하여 궐기한 송형순 송헌순 박중혁 조욱승 이진항 안령 이일항 조일승 등 8 의사義士는 동년 3월12일에 상경하여 동 16일에 격쟁격고擊錚擊鼓 거화擧火하고 복합伏閤 상주上奏하였다. 이에 경악한 군수는 남병철 관찰사를 통하여 김대비金大妃 전하에게 변무辨誣 상소上疏를 올려, 동년 4월8일에 김대비로부터 일방의 상소를 전신悛信을 할 수 없으니 그의 진상을 지방장관의 책임 하에 탐사探査하라는 비답批答을 받고 포졸을 동원 어명을 참칭僭稱하고 송형순 조욱승 이진항 안령 등 7가家에 망측한 극악의 적몰가학賊沒苛虐을 감행하는 등 공기는 자못 살벌하였다.”
헌종憲宗이 승하하자 김대비[순원왕후,순조의 비, 김조순의 딸]에 의해 순조의 아들로 입양된 철종哲宗이 왕위를 계승했다. 남병철의 어머니는 김조순의 딸로 김대비[순원왕후]는 남병철의 이모였다. 철종과 남병철은 이종 사촌이다. 1851년 당시는 김대비의 수렴청정 시기였다. 전라관찰사 남병철은 김대비에게 변무辨誣 상소上疏를 올려 1851년 4월 8일 진상을 지방장관의 책임하에 探査하라는 비답批答을 받았다. 김대비는 보성군의 국세 8만석 포탈사건의 배후에 김문기가 있는 줄을 몰랐다. 보성향교는 김대비의 비답이 곧 어명인데도 어명참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본 사건은 국세포탈한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법집행이었다. “만약 이속吏屬들이 8만석을 축적蓄積 포탈逋脫했다면, 왜 이속吏屬들에 대한 정죄는 없고, 보성군수 고제환, 전라감사 남병철, 능주목사 김진화 3명만 징벌했을까?” 하는 의문은 불행하게도 보성군이 자랑하고 있는 경술복합상언운동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정략수단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4] 고제환의 2차 옥사 장흥민란長興民亂
부세를 이용한 수탈이 심각해지면서 농민들의 삶은 점차 궁핍해졌다. 관속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횡령한 후 그 횡령분을 농민 부담으로 전가시키려 했는데, 특히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이 주도한 도결都結과 우병사右兵使 백낙신白樂莘이 주도한 통환統還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양곡의 횡령과 취잉[환곡의 이자를 많이 받음], 배호백징[호별로 강제징수하는 세금]과 인징[불법으로 전세를 받는 것]은 진주농민의 봉기로 이어졌다. 1862년 2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뒤늦게 조정에서는 2월 29일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농민의 분노와 항쟁을 자극해서 민란은 진주에서 삼남 전역으로 번졌다.
1862년[철종13] 5월 13일에 일어난 장흥민란長興民亂은 농민들에게 전세田稅, 대동세大同稅를 부과할 때 상당부분을 추가하여 다른 명목으로 징수한 것이 원인이었다. 장흥의 어민들은 지역적 특성상 바다에 인접한 관계로 대모갑[玳瑁甲:바다거북의 껍데기]을 공납貢納했다. 그러나 대모갑을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대모갑 대신 화폐로 징수하는 대납전代納錢이 등장했다. 1853년 귀양에서 풀러난 고제환이 향리로 돌아오자 읍내의 향유들이 찾아와서 자주 문안인사를 드렸다. 처음에는 40∼50냥 하던 대모갑 대납전代納錢이 해마다 늘더니 3.400냥이 되었다. 향유鄕儒 정방현과 임재성은 고제환을 찾아와서 고을 수령守令과 이서吏胥의 횡포橫暴에 울분을 토로했다.
진주민란晋州民亂을 수습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2월 29일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였으나 농민의 분노와 항쟁은 삼남 전역으로 번졌다. 3월에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농민들이 봉기했고, 4월에는 함평, 5월에는 회덕, 공주, 연산, 청주, 여산, 부안, 금구를 거쳐서 장흥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동헌東軒 앞에 모여든 천여 명의 장흥농민들이 관아官衙를 습격하자고 목청을 높였다. 백성들을 위해 나선 고제환은 흥분한 농민들을 말렸다. 방백[方伯:府使]이 없는 동헌 습격보다는 이방 주찬우 등 오리汚吏를 징계해야 한다고 말한 고제환은 아들 학주鶴柱의 소상[小祥:사후 1년째 첫제사]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다. 농민들은 동헌의 습격을 유보한 백성들은 농민수탈에 앞장섰던 자들의 집을 습격 하리下吏 주신우의 집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전라감사 정헌교가 고제환을 체포해 반란의 괴수로 의금부로 송치送致하자 흥분한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여 공해公廨를 불태웠다. 관군을 이끌고 전라감사 정헌교가 민란을 진압하자 향리鄕吏 이향유가 동원한 관병에 의해 고제환의 가옥이 불에 타 소각되었다.
주동자 고제환은 보성군수를 지낸 양반신분이었다. 조선 조정은 군수출신의 양반이 봉기를 주도한 점에 크게 충격을 받아 고제환을 체포하여 의금부로 압송한 후 곤장 30대를 친 후 경흥부[함경북도]로 유배流配했다. 관아를 불태운데 앞장을 선 정방현鄭邦賢, 임재성任在星은 도신[道臣:전라감사]으로 하여금 죽기까지 한정하여 징치懲治를 하게 하였다. 그 외에 농민수탈에 앞장섰던 자들을 처벌하고 장흥민란은 마무리 되었다. 장흥민란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양반에 의해 봉기된 조선시대의 최초의 민란이란 점과 전후를 살핀 중앙정부의 사건처리가 매우 합리적이란 점에서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