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여! 나의 때여 동학의 세상이여!> 2회 -장편서사시 연재- 국보문학 10월호
제1부 때여! 때여! 나의 때여! (제2회)
(4)
시대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명사와 도인을 찾아
공맹孔孟의 도道와 불도佛道를 만났으나
해답을 찾을 수 없었네.
스스로 답을 찾고자 결심한 최제선
서른한 살[1854년 10월]에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에 집을 신축하고
하늘 뜻을 구하는 공부를 시작했네.
“아서라 이세상은
요순지치라도 부족이요,
공맹의 덕이라도 부족언이라”<몽중노소문답가>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언가,
태평성쇠 다시 정해
국태안민 할 것이니” <안심가>
“팔도구경 다 던지고
고향에나 돌아가서
백가시서 외워보세”
을류년[乙卯,1855년] 봄
금강산에서 한 이승이 찾아왔네.
뜻한 바 있어서
백일치성을 드렸다는 스님은
치성을 끝내는 날
탑 위에 놓인 한권의 신서神書를 발견하고
해석할 사람을 찾아
두루 돌아다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네.
신서神書의 해석을 부탁한 스님이
사흘 뒤에 찾아왔네
책의 내용을 설명하자
“부디 자중하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선 스님 간 곳이 없고 신서神書 또한 사라졌네.
최제선은 사색을 통한
구도求道의 길을 버리고
기도를 통한 수행방법을 선택했네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했네. (1856년)
천성산은 원효대사가
당승唐僧 1천 명에게 화엄경을 가르쳐
모두 성인이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천성千聖의 산이네.
47일 째 되는 날
갑자기 숙부叔父가 돌아가셨다 예감이 들었네.
기도를 중단하고 경주로 돌아오니
예감한 그 시각에 운명한
숙부叔父의 장례준비가 한창이었네
최제선을 앞날을 내다보는
신통한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네
이듬해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기도를 마친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집과 논을 저당 잡혀
철점[용광업]을 개업했으나
2년 만에 도산倒産하고 구미산 용담정龍潭亭으로 귀향했네.
(5)
1859년 10월 처자식을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와 구도의 결의를 다짐하며
자신의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우濟愚로 바꾸고
최치원의 호 고운孤雲에서 운雲자를 차용하여
자신의 호를 수운水雲이라 개명했네.
1860년 음력 4월 5일은
최제우崔濟愚가 태어나기 전에 입양한
적자嫡子 최제환의 아들 명윤의 생일이었네
산에서 두문불출하고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최제우에게
갓과 옷가지를 보내온 최제환이
조카의 생일에 그를 초대했네.
생일잔치에 참석하여
인사를 나누던 최제우는
심한 한기로 쓰러질 것 같아
사람들의 도움으로 거처로 돌아왔네.
몸과 마음이 심히 떨렸네.
홀연히 한 소리가 들렸네.
“두려워 말라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고 하느니라.
내가 이룬 공이 없어[勞而無功]
너를 세상에 보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고자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마라
나에게 영부靈符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형상은 태극太極이요
다른 이름은 궁궁弓弓이니라
이 영부를 받아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고
나에게 주문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 나를 위하면
너 또한 장생할 것이요
덕을 천하에 펼 수 있으리라”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한 상태에서
최제우는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집안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 했네
“몸이 무척 떨리니
밖으로부터는 점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는 강화의 가르침이 있었네.
다시 들으려 하니 들리지 않았네.
괴이한 마음이 들어
수심修心정기正氣하고
어째서 이렇슴니까 하고 물으니
이르기를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니라.”<논학문>
무아지경에 빠져
온 몸을 떨고 있는 그를
실성했다고 믿고
우왕좌왕 혼비백산한 가족들.
부인 박씨는 남편이 실성한 데에
낙담하여 세 번이나 죽으려고 했네.
최제우는 영적인 체험을 통해
동학東學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건해졌네.
아지랑이 속에서 시루 꿈을 꾸었네.
구미산 산중에서 봄을 길러 올렸네.
하늘의 봄을 맞이하기 전에는
산 밖을 나가지 않으리라, 않으리라
반듯이 도道를 발견하여 세상을 열리라
도道의 기운이 내 몸에서 자라니
삿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네
세상 사람이 사사로움을 따르나
나는 그들처럼 살지 않으리라.
<立春詩 = 道氣長存 邪不入 世間衆人 不同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