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연자시편 -< 정한론(征韓論) > -한국문학신문 2021년 12월 15일(제526호) – 가야사(伽倻史) 왜곡 위에 설계된 정한론의 실체

高 山 芝 2021. 12. 21. 13:00

< 정한론(征韓論) >

               – 가야사(伽倻史) 왜곡 위에 설계된 정한론의 실체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 Matthew C. Perry제독은

군함 4척을 이끌고 우라가[浦賀]에 나타나 일본의 개국을 요구했네 (1853)

 

군함 7척을 이끌고 다시 찾은 미국의 함대시위에

에도 막부(幕府)는 일·미 화친 조약을 체결하고 (1854)

미국,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네 (1858)

 

칙허(勅許)가 없이 맺은 조약은 반막부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했네

 

700여 년 내려오던 막부정치가 끝난 그 해 (1866)

광둥(廣東)에서 발간되는 중외신문(中外新聞)

하치노해[八戶順叔]기고한 정한론(征韓論)이 게재되었네(186612)

 

일본은 현재 화륜군함(火輪軍艦) 80여 척이 있는데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정토(征討)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조선 국왕은 매 5년마다 반드시 에도[江戶]에 가서

대군(大君)을 배알하고 헌공(獻貢)하는 것을 고례(古例)로 지켰다.

그런데 조선국이 이 같은 고례를 폐지한지 오래 되므로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겠다.......

봄이 오면 비단 프랑스만 군사를 진격시킬 뿐 아니라

일본도 군사를 진격시키려고 할 것이다.”

 

일본에서는 명치유신(明治維新)이 시작됐네 (1867)

 

일본정부는 양국의 국교회복을 청하는 서계(書契)를 대마도주를 통해서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 히구치[樋口鐵四郞]를 파견했네 (1868년 고종 5)

 

조선 정부는 하치노해[八戶順叔]의 정한론(征韓論)에 대한

기사의 해명과 함께 질병 유행을 이유로

히구치 데츠시로[樋口鐵四郞]의 입국을 거절했네

 

아방황제(我邦皇帝)라는 문구와 도서[圖書 符印]

서계의 격식에 어긋나다는 이유를 들어 서계의 수리를 거부했네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대신(大臣) 산조[三條實美]와 이와쿠라[岩倉具視]에게

조선의 정벌은 일본의 국위를 세계에 떨치고 국내의 인심을

국외로 향하게 할 수 있다 면서 강력히 정한론 征韓論을 제기했네 (1869년초)

 

외교 실패에 대한 책임소재를 밝히기 위해 파견한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조선은 불구대천의 적으로 반드시 정벌해야 하며

정벌하지 않으면 황위(皇威)가 서지 않는다.”

는 정한론(征韓論)의 건백서(建白書)를 일본정부에 제출했네 (1870)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입항했으나

왜사(倭使)가 군함을 타고 오다니 상대해 줄 수 없다는

조선 측의 냉대에 수개월 동안 체류하다 그대로 돌아갔네 (1872)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스스로 견한대사(遣韓大使)가 되어

외교적 타결을 시도하다 여의치 않을 시 파병키로 하였으나 (1873)

태정대신[太政大臣 首相] 대행 이와쿠라가 정한론(征韓論) 반대를 결정하자

견한사절(遣韓使節)은 무기 연기 되었네

- 졸시 < 정한론(征韓論) >

 

19세기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84~ 18591027, 29)이 깃발을 든 정한론(征韓論)의 기원은 일본서기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서기9 신공황후 9년 기사, 신라정벌 설화(說話)에서 출발한다.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왕이 있어 천황(天皇)이라고 한다.”는 글귀를 붙잡은 이들은 일본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천손(天孫)이 다스리는 신()의 나라이고, 천황은 성스럽고 절대적인 권위의 근원이라는 황국사관(皇國史觀)을 만들어 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국왕이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살피고는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군영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번국(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는 신공황후의 기사는 19세기 말 일본이 정한론의 기치를 들고 조선을 무력으로 병합하는 과정에서 정당하다는 구실이 된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1880년 황조병사(皇朝兵史), 1882<임나고고(任那稿考)> <임나명고(任那名稿)>를 간행했다. '황조병사''황국(皇國), 황군(皇軍), 황조(皇朝)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고대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군주와 신하의 관계로 기술한 책이다. 1883년 일본군 참모본부는 청()에 파견된 일본 육군 사카와 카게아키(酒匂景信) 중위로 부터 비밀리에 광개토대왕비 묵본을 입수하여 5년간 비밀 연구 끝에 1888년 그 결과를 세상에 공표한다. 일본 군국주의 내각이었던 태정관(太政官)의 편사국(編史局)에 근무하던 스가 마사토모(管政友)는 칠지도(七支刀)의 글자를 위조하여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갖다 바쳤다는 임나고(任那考)를 발표함으로 조선을 정벌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만들었다.

 

일본군 참모본부가 조작한 임나일본부 학설에 정한론자(征韓論者) 나가 미치요(那珂通世)가 가세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세운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역사를 공부한 후 동경제국대학에서 강의를 한 그는 황국사관(皇國史觀)을 가진 대표적인 정한론자 중 한 사람이다.1912년에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임나강역고(加耶疆域考), 1949년에는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가 발표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취조국(取調局)을 설치하여 조선통치에 필요한 참고자료를 명분으로 조선의 역사와 관습 제도를 조사하여 고대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후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만들어 한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19193, 1운동이 일어나자 무단정치(武斷政治)로 조선을 통치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한 조선총독부는 문화정치(文化政治)라는 미명하에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얼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는 시책을 추진했다. 19198월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겉으로는 무단정치를 버리고 조선일보 발간을 허용하는 등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도, 한민족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교활한 교육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고대 역사서를 뒤져내어 없애버리고, 유일한 역사기록으로 남겨놓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첫머리에 나오는 환국(桓國)의 건국사실을 신화로 왜곡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환국(桓國)()’()’자로 변조하여, 환국이란 나라의 존재를 없애고 환인을 신화의 인물로 변조 시켰기 때문이다.(환국(桓國)뿐 아니라 배달국의 환웅(桓雄), 고조선의 단군(檀君)도 모두 신화의 인물로 왜곡했다)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은 조선으로 건너 와 을미의숙(乙未義塾)에서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면서 오사노 텟칸(與謝野鐵幹) 등을 끌어들였다, 오사노 뎃칸은 유명한 가인(歌人) 깡패로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에 직접 가담했다(柴太一郞, ‘明治兄弟’) 일본인들이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것이 밝혀질 경우 국내외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한 일본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에서 일본인의 범죄는 자국에서 처리한다는 조항을 근거삼아 이들을 히로시마 지방검찰청으로 빼돌렸다. 강화도조약은 개항장에서 일본인들이 일으킨 범죄만 일본에서 처리하기로 되어 있었고, 궁궐에 난입해 국모를 살해한 사건은 여기에 적용할 수 없는데도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낭인 깡패들은 자신들은 그때 목포에 있었다.”고 우겼고, 일본 검찰은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러일전쟁 때 공을 세워 훈6등의 훈장을 타고, 1916년에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협의원이 되었다.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일본 제국주의가 군국주의로 치닫던 1931년부터 1938년까지 경성에서 잡고(雜攷)’라는 잡지를 간행했다, 1937년에 발표한 일본서기 조선관계 지명 고()’를 통해 .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을 자의적으로 해석, 신공 49(369)에 야마토 왜가 충청도와 전라도, 제주도를 백제에게 주었다고 왜곡 기술했다. 이에 대해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은 1963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분국설이라는 논문을 써서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가야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분국(分國)이자 소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학자들의 지명 비정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와 같은 일본학자들의 비정은 억지를 면치 못한다. 당시의 야마또 군대가 경상, 전라 두 도를 무인지경으로 돌아쳤다고 전제하고 그 일대 고지명에 비슷한 글자가 여러 글자 중에서 하나라도 있으면 주어 맞춘 것이 불과하다.

(김석형, ‘초기조일관계사’)”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말하는 가야는 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등 6가야 연맹이다. 임나가야는 한반도 가야 연맹체에 끼어들 자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는 신공황후 49년의 원정군이 점령한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등을 모두 한반도 남부 여기저기에 비정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생경한 지명들을 무리하게 한반도 내 비슷한 지명과 연결시켰다. 일본 규슈의 아리아케해(有明海) 우측 사가현(佐賀縣]에는 다라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 하기하기 위해 한반도의 지명에 집착을 한 것이다. 규슈의 사가현 후지쓰군(藤津郡)에 남아있는 지명, 太良, 多良 등은 다라를 여러 가지로 음차한 흔적이다. 원 지명이 한국 지명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규슈 대학 이토 캠퍼스 인근 산 이름 자체가 가야산이다. 이렇듯 가야와 연관된 지명은 규슈 지역에 흘러넘친다. 규슈에서 찾아야 할 임나관련 지명을 한반도에서 찾아 가야사를 왜곡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는 황국사관을 가진 군국주의자였다.

 

1930년에 조슈번((長州藩=야마구치현) 하기에서 태어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명치유신 핵심 인물들의 스승이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국수주의 미토학파에 영향을 받은 요시다 쇼인은 1854년 저술한 유수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를 제후로 삼고 조선을 다그쳐 옛날처럼 조공을 하게 만들고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에도 말기 미토학파 등 일본의 국학자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를 필수 교재로 가르쳤다. 이 고대 역사서는 하늘에서 강림한 천손이 일본 천황의 뿌리이며 일본은 신성한 나라라는 선민의식을 가르쳤다. 명치유신 전후에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네 곳의 혁명 주도세력들의 출신 번()이 있었다. 큐슈의 히젠번(肥前藩=사가현), 사츠마번(薩摩藩=가고시마현), 조슈번(長州藩=야마구치현)과 도사번(土佐藩=시코쿠의 고치) 등을 서남웅번(西南雄藩)이라 부른다. 이중 사츠마 출신 하급무사 사이고 타가모리(西郷隆盛)는 정한론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다. 조선을 제압하자는 주장이 빨리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만을 품고 낙향한 인물이다.

 

명치유신 직후 일본의 근대화가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봉건 도쿠가와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방행정 조직으로 재편하는 폐번치현(廢蕃置縣)이 단행되었다. 다이묘들의 위용을 과시했던 천수각과 성은 버려지고 중앙에서 파견한 지사들이 행정권을 장악했다. 사무라이들은 칼을 빼앗기고 월급으로 보장된 봉토도 반납했다. 세금 납부 방법을 바꾸는 지조개정(地租改正)과 무사의 특권적 소득원을 해체하는 질록처분(秩祿處分) 과정에서 무사들은 박탈감에 빠졌다. 불만이 쌓인 무사들은 사이고(西郷隆盛) 주변에 모여들었다. 해외로의 정벌이 무사들의 존재감을 살려 줄 출구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조정의 단짝 친구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일본의 국력이 아직 모자라므로 조선 출병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1877년 명치유신의 동지끼리 싸우는 서남전쟁이 일어났다. 난공불락의 요새 구마모토 전투에서 실패한 사이고군(西郷軍)은 결국 가고시마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이들은 정한론의 실행 시기를 놓고 대립했을 뿐이다. 언젠가는 조선을 병합한다는 목표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쿠보(大久保利通)의 우려대로 1895년 청일전쟁에 승리했지만 힘이 모자란 일본은 서양 강국의 압력에 못 이겨 요동반도를 토해내야 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조선의 독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명분으로 전리품을 반환하게 만든 것이다. 일본은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된다. 10년 후 발발한 노일전쟁의 씨앗이 이때 심어졌다. 이후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독점적 영향력 확보를 위해 부국강병에 절치부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부터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를 거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까지 이어진 정한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