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작품 ]

연자시편 - < 연오랑(延烏郞)와 세오녀(細烏女) > – 한국문학신문 2022년 1월 12일(제529호)

高 山 芝 2022. 1. 17. 10:22

< 연오랑(延烏郞)와 세오녀(細烏女) >

 

근기국(勤耆國) 근오지(斤烏支)

연오랑(延烏)과 세오녀細烏)

 

일월신(日月神)의 부부 사제(司祭)

도기야(都祈野)에 살았네

 

해맞이 바위에서

해조(海藻)를 채취하던 연오랑

 

움직이는 바위 타고

일본에 건너가 왕이 되었네

 

남편을 찾아 나선 세오녀

연오랑의 신발이 놓인 바위에 올라

바다를 건너가 연오랑을 만났네

 

도기야(都祈野)의 해가

쓰게무라(都祈村)의 해로 변하자

도기야(都祈野)의 일월(日月)이 빛을 잃었네

 

진한(辰韓)의 일월(日月)이 빛을 잃었네

 

일월의 정기(精氣)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어난 괴변이라는 일관(日官)의 말을 듣고

 

사로국(斯盧國) 아달라왕 사신을 보내어

연오랑과 세오녀를 돌아오라 하였네

 

하늘의 뜻으로 바다를 건넌 우리 부부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나이다

대신 왕비(세오녀)가 짠 비단을 보내오니

이 비단을 제단에 바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소서

 

도기야(都祈野) 해달못(日月池)

비단을 바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자

진한의 일월이 빛을 발했네

 

해달못에 귀비고(貴妃庫)를 설치하여

비단을 보관한 아달왕

세오녀의 비단을 국보로 지정했네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는 일본의 도래문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본열도에서 야요이 문화가 태동하던 B.C. 3세기~A.D. 3세기는 만주와 한반도, 일본열도에서는 문명의 파괴와 건설이라는 상반된 문화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다. B.C. 3세기~B.C. 1세기 무렵 요서요동 일대는 단군조선의 와해와 부여(북부여)의 건국, 위만(衛滿)에 의한 위만조선 건국, ()에 의한 위만조선 멸망과 한군현 설치, 부여와 한의 쟁투, 부여의 분열과 고구려·백제의 성립 등의 혼란 국면이 펼쳐졌다. 이러한 혼란을 피하여 많은 유민들이 한반도 방면으로 밀려들었다.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조선유민(朝鮮遺民)이다. 한반도로 밀려든 조선유민들에 의해 한반도 내에 삼한(마한, 변한, 진한)이 세워졌다. 단군조선시대는 요서와 요동 일대가 문화의 중심지였다. 단군조선의 멸망하자 단군조선과 부여계 엘리트 세력이 한반도 방면으로 이주하였다. 고고학적으로 B.C. 3세기~A.D. 3세기, 한반도 남부에서 단군조선과 부여계의 흔적인 금속제 무기와 기마구를 대표로 하는 북방계 기마문화가 발굴되었다.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시작된 큰 흐름은 일본열도까지 변화시켰다. 한반도에서 밀려난 세력들은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문화를 개화시켰다. 일본의 역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일본 고고학에서 3세기 야요이 시대가 끝나는 4세기 무렵 거대한 고분(전방후원분)과 화려한 기마무구를 특징으로 하는 문화가 등장하는 점에 착안, 북방 기마민족의 일파가 한반도로 남하했다가 다시 북큐슈로 상륙했고 이 세력은 다시 기나이(畿內) 지방으로 진출, 4세기말 내지 5세기초 통일국가인 야마토 조정을 건국했다고 보았다.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연오랑과 세오녀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다.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 4년인 정유(서기 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았다. 어느 날 연오(延烏)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가 움직여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사람들은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다.”며 연오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세오(細烏)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바위에 오르자 세오를 태운 바위는 바다를 건넜다. 연오를 만난 세오는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들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가자 진한의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렸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괴이한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왕은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라 했다. 연오가 말하였다. “내가 이 나라에 도착한 것은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오. 그러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 대신 내 왕비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오.” 비단을 가지고 돌아온 사신은 이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사신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이 났다. 아달라 왕은 창고를 설치하여 비단을 보관하고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고 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낸 해달못이 있던 지명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로 불렀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하는데, “()”자가 포함된 연오(延烏)’라는 이름은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전설(暘烏傳說)의 변음으로 본다. ‘세오(細烏)’의 이름에도 ()’자가 포함되므로 이 또한 양오전설(暘烏傳說)에서 해의 형상을 하는 금오가 쇠오로, 쇠오가 세오로 변했다고 소재영은 주장했다. 2세기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에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된 사건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주장한 일본 건국의 기마민족국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포항 일대는 진한 연맹체의 일원인 근기국(勤耆國)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로국(斯盧國=新羅의 전신) 아달라왕이 근기국(勤耆國) 출신의 연오랑과 세오녀를 소환할 정도로 당시의 제천의식을 담당하는 사제(司祭)는 진한 연맹체 전역에 영향을 주고 있있다. 제사(제천)와 정치(군사)가 일치하는 제정일치 사회는 정치권력의 문제가 아닌 제천 중심으로 모든 일이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연오랑과 세오녀에 대한 일본의 흔적은 기나이(畿內) 나라분지에 분명히 남아있다. 이 일대에는 삼국유사의 도기야(都祈野)’에서 파생된 것이 분명한 都祈村(쓰게무라)’, ‘都介野(쓰게노)’라는 지명 등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주석 : 암파문고(岩波文庫)에 판본태랑(坂本太浪) 등의 교주본(校注本)을 보면 투계(鬪鷄-츠게)란 지명에 대해서 이와 같은 주석이 있다. 화명초(和名抄), 대화국(大和國) 산변군(山辺郡) 도개향(都介鄕)에 있다. (), 나라형(奈良縣) 산변군(山辺郡) 도기촌(都祈村)이다. 현희신명식(延喜神名式), 같은 군() 도기수분신사(都祈水分神社)[나라현산도군도기촌우전(奈良縣山辺郡都祈村友田)]에 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영구(霊龜) 원년(元年) 610일 조()에는 "개대왜국도기산지도(開大倭國都祁山之道-대왜국 도기산의 길을 열었다)"등으로 보이는데 대화(大和)의 동록(東綠) 이가(伊賀)로 가는 요지(要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