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시편 - <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 - 한국문학신문 2022년 1월 26일(제531호)
<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
삼위일체 중 한 분(三一分身)
경교의 세존 메시야(景尊彌施訶)
신의 위엄 숨기고 사람으로 태어났네
천사들 예언대로
대진국(大秦國=로마제국)의 처녀가
성인(聖人)을 출산하자
별을 보고 찾아온 파사인(波斯人)
예물을 바치고 경배를 드렸네
대진국의 선교사 아라본(阿羅本) 일행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 험한 산과 강과 사막을 지나
정관 9년(635년)에 장안에 이르렀네
당 태종(太宗)은 방현령(房玄齡)을 보내
21명의 선교단 일행을 환영한 후
거처를 마련해 주고 경전(經典)을 번역했네
처음에는 파사교(波斯敎)로 불렀으나
로마종교로 알려지자 대진교(大秦敎)라 부르며
정관 12년 칙서를 통해 포교를 허락했네 (638년)
대진국의 대덕(大德=주교) 아라본이
가져온 신묘한 경교의 경전은 근본진리가
완전하고 간결하며, 번거로운 설(說)을 말하지 않고
이치를 얻기가 쉬워 그 방편을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이 도(道)가 만물을 건지며 사람을 이롭게 하므로
온 천하에 퍼지게 하라.
장안의 의령방에 대진사를 세웠네
고종(高宗)은 10도 385주에 경교사원(교회)을 세우고
아라본을 진국대법주(鎮國大法主)로 삼자
법류십도(法流十道)가 전파되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네
측천무후 치세시절 불교의 득세로
경교를 배격하고 헐띁었으나
승수(僧首) 라함(羅含=아브라함)과 대덕 급렬(及烈=가브리엘)이
세속사에 관여하지 않는 물외고승(物外高僧)과 협력하여
경교 교리의 끊어진 줄을 다시 이었네
현종은 대장군 고력사(高力士)를 시켜
다섯 황제의 초상화를 경교사원에 안치했네
숙종 때는 영무등 5군에 경교사원을 건립했네
당 대종은 강탄절(성탄절)마다 향을 피워 하늘에 제를 올렸네
당 덕종은 경교의 도를 광대무변하고 또한 극히 자세하여
능히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이 말하여 큰 비를 세우며
삼위일체의 신의 축복을 송축하였네 (781년)
중국에 전래된 네스토리우스교는 파사교(波斯敎=페르사인의 교), 메시아교(彌施訶敎), 대진교(大秦敎=로마인의 교) 등에서, 현종(玄宗) 때에 ‘태양처럼 빛나는 종교’라는 뜻의 경교(景敎)로 칭하게 되었다. 당나라에서는 경교를 가르치는 교회당에 절 사(寺)를 사용하여 대진사(大秦寺)라 했다. 로마제국은 대진국(大秦國), 신부(목사)는 중 승(僧) 자를, 선교사를 대덕(大德)이라 했다. 경전들을 중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용된 주요 개념들은, “阿羅訶”(여호아), “彌施訶”(메시아), “摩薩吉思”(모세), “賀薩耶”(이사야) 등과 같이 음사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불교의 것을 그대로 차용했다. 하느님을 “천존(天尊)”. 예수를 “세존(世尊)”이라 번역했으며, “중생(衆生)”, “법왕(法王)”, “법당(法堂)”, “공덕(功德)”, “대시주(大施主)”, “승가(僧伽)”, “고계(苦界)”, “색신(色身)”, “광자구중고(廣慈救衆苦)” 등의 불교식 용어는 경교 문헌에 흔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경교비에 십자가와 함께 새겨진 연꽃 문양도 불교의 상징을 경교도들이 차용한 것이다. 비문을 쓴 경정 자신도 “대진사의 승려 경정(大秦寺 僧 景淨)”이라 하였고, 비문 건립을 주관했던 선교사도 “법주인 승려 영서(法主 僧 寧恕)”라 하였으며, 비 옆에 열거된 60여명의 선교사의 이름도 승자로 시작하여 불교의 승려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638년 7월에는 당태종의 칙령에 따라 당의 수도인 장안(長安)에 경교의 예배당인 대진사(大秦寺)가 건립되었다. 781년에는 경교의 중국 포교를 기념하여 대진사 경내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건립되었다. 회창금교(會昌禁敎) 이후 긴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이 비가 1625년,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의 한 회교도의 집에서 예수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높이(碑身)가 1.97m이고 머리까지 합치면 2.77m에 달하고, 폭 0.9m, 두께 0.3m, 무게는 거의 2t에 육박하는 커다란 이 비석은 네스토리우스교, 곧 경교의 중국 전래를 입증하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다. 도교(道敎) 신자인 무종(武宗)은 외래 종교가 지나치게 번창하는 것과 나라 경제는 어려운데, 많은 농토와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불교의 사원의 승려들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종교탄압 정책을 칙령으로 내리면서 재산을 몰수하게 된다. 중국에서 경교는 무종 회창(武宗會昌) 5년(845년)에 실시된 회창금교(會昌禁敎) 이전 200여 년 동안 포교활동을 하였으나 황소(黃巢)의 난(878년) 때 경교도 3만여 명이 학살당함으로 중원에서 거의 사라졌고, 잔존 세력은 몽골과 만주 등 변방지역으로 흩어졌다.
당나라에 경교가 활발하게 전파될 당시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초기였다. 김춘추는 당을 수차례 방문했다. 그리고 통일신라는 해마다 학승(學僧)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다. 당시 신라는 친당(親唐)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물과 제도를 수입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해상 무역이 일본이나 중국의 범위를 넘어 서역까지 확대되었던 점과 한국의 불교문화 속에 나타난 경교의 흔적을 근거로 당시 당에서 유행하던 경교가 신라에까지 전래되었다고 확신한 기독교동점사(基督敎東漸史)의 권위자인 영국의 역사학자 고든(Gordon,E.A.) 여사는 중국서 발견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와 동일한 모조비를 1917년에 금강산 장안사 근처에 세웠다. 흑대리석이 아니고 백대리석인 점에서 원래의 비(碑)와 다르지만, 모조비문을 목사 김양선(金良善)이 탁본하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해 놓았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비문은 총주교인 경정(景淨)과 신부(傳敎士)인 아당(亞當: Adam)이 짓고, 태주사 참군(台州司 参軍)을 지낸 려수암(呂秀岩)이 글씨를 썼다. 이 비석에 글씨를 쓴 려수암의 당시 신분은 국가 서기관(朝議郎前行)이자 태주지역 토목공사부의 지휘관(台州司士叅軍)이었다. 노자교도였던 려수암은 나중에 경교신학교 교장으로 경정 아담과 함께 경교발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敎流行中國碑)를 쓴 경교신학교 교장 려수암(呂秀巖)의 후손 려영공 대로(呂領公 大老)의 4형제 중 첫째 려어주(呂禦柱)와 둘째 려어단(呂禦檀)은 황소(黃巢) 난리 통에 살해당했고, 막내 려어춘(呂禦椿)은 라마불교 쪽으로 잠입하고, 셋째 한림학사 려어매(呂禦梅)가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 3년에, 신라로 망명하여 성산 려씨와 함양 려씨의 시조가 되었다. 려어매의 후손들은 성주벽진(星州 碧珍), 함양(咸陽), 서울(漢陽), 금릉(金陵), 영동(永同), 함흥북청(咸興北靑), 송화신천(松禾信川), 포천(抱川), 광주(光州), 광주(廣州)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경교의 신라 전래의 가능성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고고학적 흔적이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이 석제(石製)십자가와 2점의 십자문장식(十字文裝飾), 그리고 마리아소상(塑像)으로 추정되는 고고학적 자료였다. 이런 기독교적 흔적들이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경주에서 발견된 것은 신비롭기만 하다. 7∼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이 4점의 유물은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제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적이어서 그리스형 십자가로 불리는데 중국에서 발견된 형태와 동일하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 장식품으로 추정되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