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鄭鑑錄)이 만들어 낸 발칙한 봉기꾼 - (제4회)-< 때여! 나의 때여! 동학의 세상이여! > -국보문학 8월 호 2022.08(통권 168호)
< 때여! 나의 때여! 동학의 세상이여! >
제2부 정감록(鄭鑑錄)이 만들어 낸 발칙한 봉기꾼 - (제4회)
(14)
1970년 진주작변(晉州作變)이 실패하자
태백산으로 피신한 이필제(李弼濟)
1869년 진천작변(鎭川作變) 때
헤어졌던 동지 김낙균(金洛均)을 만났네
이필제(李弼濟)와 김낙균(金洛均)은
동학교도를 이용한 변란(變亂)을 계획하고
수운(水雲)의 신원(伸冤)을 명분으로 내세웠네.
이필제(李弼濟)는 1866년부터 교류가 있던
이인언(李仁彦)과 박사언(朴士憲)을 찾아가
영해(寧海) 지역의 동학교도를 설득했네
동학(東學)에 대한 탄압 등을 앞세워
설득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순교(殉敎)한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과
지배층 부정부패 척결을 목표로 설정했네
영해부사(寧海府使)는 자신의 생일잔치에
사람들을 초치(招致)하여
떡국 한 사발에 30금을 받아
착복을 한 탐관(貪官)이었네
1870년 10월 영월도인 이인언(李仁彦)을
해월(海月)에게 교조신원운동을 이유로
거사(擧事)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네
“소생은 일찍 계해년(癸亥年)
용담장석(龍潭丈席)에서 도(道)를 받고
포덕(布德)에 종사하다가
지목(指目)을 피하여
지리산에 은거하였는데
왕년에 대신사(大神師)께서
대구에서 조난되었다는 말을 듣고
분원(忿怨)을 이기지 못하여
기필코 원(怨)을 풀고자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으니
선생의 지도와 편달을 바랍니다.”
용담문도(龍潭門徒) 중
그런 인물이 생각나지 않자
해월(海月)은 효유(曉喩)하여
이인언(李仁彦)을 돌려보냈네.
11월 다시 찾아 온 이인언(李仁彦)
이필제(李弼濟)의 말이라며
신원(伸寃)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해월(海月)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네.
1871년 1월 영해도인 박사헌(朴士憲)이
이필제(李弼濟)는 대신사(大神師)께서
직접 입도시킨 제자라는 증언을 했네
2월 초 이필제(李弼濟)가
권일원(權一元)을 보내 재차 만남을 청했네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운 해월(海月)은
2월 중순 친히 영해(寧海)로
이필제(李弼濟)를 찾아갔네.
“제가 선생과 비록 친분이 없으나
의가 동문(同門)에 걸린지라
선사(先師)를 위하여 신원의 마음은 일반일 것이요
또한 3월 10일은 선사께서 조난하신 날이라
이날로 기일을 정하여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오니
원컨대 선생은 다시 의심을 품지 마소서.”
“그대가 선사(先師)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고자 함은 실로 감격하되
우리 도(道)는 무위이화(無爲而化)요
또 하늘을 모시고 스승을 받드는 방법에 있어
성(誠), 경(敬), 신(信)과 수심(守心)
정기(正氣)를 종지(宗旨)를 삼나니
만사를 서두르면 이루기 어려운지라,
시기를 기다리고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고 답했네
- 《천도교교회사 초고》 《도원기서》 참고
* 주석 : 무위이화無爲而化 -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하여 잘 이루어짐
(15)
영해(寧海)는 신향(新鄕)과 구향(舊鄕)의
세력 갈등이 유달리 심한 지역이었네
동학을 믿는 교도들의 대부분은 신향이었네
이필제(李弼濟)의 뜻을
해월(海月)에게 전달한 사람은
초대 영해접주 박하선(朴夏善)의 아들
박사헌(朴士憲)이었네
아버지 박하선(朴夏善)이
영해관아에서 목숨을 잃었네
이인언(李仁彦)도 해월(海月)에게
이필제(李弼濟)의 뜻을 전한 사람이었네
전동규(全東奎)는 이필제(李弼濟)와
오래 전부터 거사(擧事)를 준비해왔네
이들은 동학교단의 입장보다는
향권(鄕權)을 둘러싼 구향과의 대립에
동학교도의 힘을 이용하고 싶었네.
영해(寧海)의 동학교도들은 해월(海月)에게
이필제(李弼濟)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교조의 신원(伸冤)을 위해서는
거사(擧事)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네
영해접주(寧海接主) 박사헌(朴士憲) 등이
이필제(李弼濟)의 말에 동의하자
해월(海月)은 각 지역의 접주(接主)에게
수운(水雲)의 순도일(殉道日)에
영해(寧海)의 병풍바위 밑 우정동(雨井洞)
박사헌(朴士憲)의 집으로 모이라는
통문(通文)을 발송했네.
1871년 3월 10일 각지에서
500여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였네.
수운의 추도제사를 드린 후
병풍바위 형제봉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네
천제(天祭)를 드릴 때
정(鄭) 씨로 불리던 이필제(李弼濟)는
자신은 이제발(李濟發)이며
김낙균(金洛均)은 김진균(金震均)이라고 밝혔네.
이들은 도록(都錄)을 작성하고
중군(中軍), 별무사(別武士), 집사(執事) 등의 직책을 정하고
성내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작(細作)을 파견했네.
저녁 7시를 지나 이필제의 지시에 따라
각지에서 모인 동학도들은 영해부를 향했네.
비좁고 험악한 10여리의 산길을
횃불을 밝히며 내려왔네.
우정골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죽창을 하나씩 받아들고
20리길을 내달려 영해부에 도착했네.
이필제(李弼濟) 일행 중에는
조총을 들거나 환도(丸都)를 든 자도 있었네.
저녁 9시를 지나 영해부에 도착했네
미리 연락을 취하고 있던 두 명이
성문을 열어주어 영해부 안으로 들어갔네.
이필제(李弼濟) 일행은
머리에 유건(儒巾)을 써서 선비로 위장하고
손에는 죽창과 조총을 들고 대오를 나누어
각 문으로 뛰어 들었네
박기준(朴箕俊)이 먼저 부내의 동정을 살피고
횃불을 밝힌 대오가 앞장섰으며
백기(白旗)를 허리에 꽂은 자들이 뒤를 이어 들어오자
군교와 구실아치들이 달아났네.
군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은 이들은
동헌으로 뛰어들어 동정을 살피러 나오던
영해부사(寧海府使) 이정(李炡)을 살해하고 격문을 내걸었네.
“우리들의 거사는 다만 본관(本官=영해부사)의 탐학이
비할 바 없이 극심하기에 그 죄를 성토하려는 것이고
읍민들을 해칠 마음은 전혀 없다”
영해부성(寧海府城)을 완전히 장악한
이필제(李弼濟)는 이방(吏房)이 보관하고 있던
돈 궤짝을 부수어서 140냥을 꺼내서
100냥을 인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가난한 사람들의 환심을 샀네.
이필제(李弼濟)는 기세를 몰아서
영양관아를 점령하고
영덕·진보·영양 등지를 공격하고
서울로 향하려고 했네.
날이 밝자 단순가담자 대부분 흩어졌네.
이필제(李弼濟)는 남아있는 100여 명을 거느리고
영해부(寧海府)를 떠나 양양을 향했네.
3월 13일 영양을 공격하기 위한 정탐꾼을 보낸 후
이필제(李弼濟)는 주민들을 잡아다가
병사를 삼자는 의견에 반대하며
절대로 주민들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명령했네.
주민의 힘을 얻어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다며
부하들이 민가를 방화하자 처벌까지 했지만
동학교도들과 주민들의 호응은 신통치 않았네.
100여 명의 인원으로 관군과 맞서기는
무리라 판단한 이필제(李弼濟)는
영양 일월산으로 들어가서
유격전을 펼치기로 계획했으나
무기가 넉넉하지 못해 수포로 돌아갔네.
강사원(姜士元), 남두병(南斗柄)
박영관(朴永琯=박하선)은 체포되고
이제발(李濟發=이필제)와 김진균(金震均=김낙균)은 도망쳤네.
(16)
정감록(鄭鑑錄)에 심취된 정몽주의 후손
정기현(鄭岐鉉)은 형 옥현(玉鉉)과 함께 용인에서
단양으로 이사해 살고 있었네
오대산의 승려 초운이 정기현(鄭岐鉉)의 관상을 보고
“300일 동안 기도하면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으며
전장에서 일을 벌여도 한 가지 실수도 없을 것이네
때에는 이르고 늦은 것이 없는지라
온갖 일이 뜻대로 될 테니
거사(擧事)를 걱정하지 말라” - 《우포도청등록》 신미년조
고 한 것을 믿고 있던 정기현(鄭岐鉉)은
정몽주의 후손에 ‘큰 복’이 있을 것이라는
초운의 말을 퍼뜨렸네
체포령이 내려진 것은
이필제(李弼濟)가 아닌 이제발(李濟發)이었네
이필제(李弼濟는 김낙균(金洛均)을 통해
정기현(鄭岐鉉)의 야심을 알고 있었고
정기현(鄭岐鉉)은 김낙균(金洛均)을 통해
이필제(李弼濟)를 알고 있었네
1871년 3월 말경 일월산을 빠져나온
이필제(李弼濟)는 정기현(鄭岐鉉)을 찾아갔네.
자신을 권가(鄭哥)라고 소개한 이필재(李弼濟)는
“서호주인(西湖主人)은
정가(鄭哥)로서 조선(朝鮮)을 경영하고
동산주인(東山主人)은
권가(權哥)로서 남경(南京)을 도모한다”
는 말로 접근해서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네.
다음 날 산내의 최해진(崔海眞)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임덕우, 최응규 등으로부터
정기현(鄭岐鉉)의 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네
임덕우가 그를 진천작변(鎭川作變)의 주모자라고 소개하자
“앞으로 조선을 정공(鄭公)에게 드리고
전횡도(田橫島)를 거쳐 등주, 채주를 정벌, 중원을 취하겠다”
는 자신의 야망을 밝혔네
이필제(李弼濟)는 정기현(鄭岐鉉)의 집과
정옥현(鄭玉鉉)의 집을 오가며
김낙균, 임덕우, 최응규 등과 거사 계획을 세웠네.
영남좌도는 권응일이 담당해 총대장이 되고,
예천은 정기현의 심복인 김원명이 맡고
이필제(李弼濟)는 동산주인
정기현(鄭岐鉉)은 계룡산주인으로 조선의 주인이 되면
이필제(李弼濟)가 정기현(鄭岐鉉)에게 군사를 빌려서
중국을 정벌하여 대륙을 차지한다는 계획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