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의사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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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렬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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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의사행장(三義士行狀)
녹천공행장(鹿泉公行狀)
고광렬(高光烈) 지음
융희(隆熙) 정미(丁未)년 9월 11일에 족형 녹천 선생이 의병장으로 구례(求禮) 연곡사(燕谷寺)에서 순절(殉節)했다. 그 후 40년이 지난 병술(丙戌)년에 선생의 생가 재종질 재연(在淵)이 종족(宗族)의 명으로 나에게 명하여 행장을 지으라 하니, 내가 비록 병들고 노쇠하였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랴? 삼가 안(按)한다.
부군(府君)의 이름은 광순(光洵)이요, 자는 서백(瑞伯)이요, 녹천(鹿泉)은 그 호(號)다. 고씨의 상계는 탐라(耽羅-濟州)에서 나왔는데, 장택군(長澤君)을 봉한 분이 있어 검교(檢校) 복림(福林)으로부터 비로소 장흥 고씨가 되었다. 3대를 전하여 협(愜)에 이르러는 고려조에 북부상서(北部尙書)를 지냈는데, 혁명이 되자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또 4대를 전하여 운(雲)에 이르러는 생원(生員)·진사(進士)·문과(文科)로 형조좌랑(刑曺佐郎)을 지냈고, 예조참판(禮曺叅判)으로 증직(贈職)되었으며 호는 하천(霞川)인데, 조정암(趙靜庵) 등 여러 어진이와 도의로써 사귀다가 북문(北門)의 화가 일어나매 배척되어 시골로 돌아왔다. 맹영(孟英)은 진사·문과·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으로 증직되었으며 호는 하헌(霞軒)이요, 경명(敬命)은 제봉(霽峰) 선생인데 생원·진사·문과·호당(湖堂)으로 공조참의(工曺叅議)를 지내고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임진(壬辰)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나라 일에 근념하다가 금산(錦山)에서 순절하니,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되고 충렬(忠烈)의 시호를 내리고 사우(祠宇)를 세워 포충(褒忠)이라 액호(額號)를 내리고 특별히 부조(不祧)를 명했으며, 인후(因厚)는 진사·문과로 학유(學諭)를 지내고, 금산 싸움에 충렬공을 모시고 함께 순절하니 영의정(領議政)으로 증직되고 의열공(毅烈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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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를 내리고 포충사에 배향하고 특별히 부조(不祧)를 명했다. 이 분이 바로 학봉(鶴峰) 선생이요, 부군은 그 봉사손이다.
부림(傅霖) 무공랑(武公郎) 두흥(斗興), 현령(縣令) 세혁(世爀), 응문(應文) 목사(牧使) 만룡(萬龍), 언겸(彦謙), 시우(時遇), 참봉(叅奉) 정진(鼎鎭), 제인(濟寅), 경주(慶柱)인데, 경주는 아들이 없어 성명(成命)으로써 족형 정상(鼎相)의 아들을 데려다 계후하니 바로 부군이었다.
부군의 생가 어머니 김씨가 임신한 지 13개월 만인 헌종(憲宗) 무신(戊申) 2월에 유천리(柳川里) 본집에서 부군을 낳았는데, 특이한 자질을 지녀 두각이 빼어나고 살결이 희고 윤택하며 성음은 큰 쇠북처럼 울리고 기안은 산악 같이 솟았다. 그리고 나이 어릴적부터 발걸음은 반드시 무겁게 하고, 말하고 웃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아니하며, 여러 아이와 더불어 놀 적에도 때려서 울리거나 희롱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점잖게 독립하여 있으니, 여러 아이들도 역시 감히 경홀히 여기거나 허물없이 덤비지 못하고 모두 꺼리며 두려워했다.
나이 비로소 글을 배울 수 있게 되자, 생가 외조부 황주(黃洲) 김공에게 배우는데, 재주가 매우 영특하고 성질이 또한 침착하여 겨우 글자만 읽으면 문득 음과 새김을 알게 되고, 음과 새김을 알게 되면 문득 심오한 뜻을 연구하니 황주가 매우 중하게 여겼다.
하루는 황주를 모시고, 대청에 앉았는데 마침 밖에서 엽전을 반입해 들였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들은 바야흐로 엽전의 수를 헤이려고 하는데 부군은 단정히 앉아서 못 본 척하니 황주는 웃으며,
“너는 어찌 돈을 계산하지 않느냐?”
부군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진작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읍니까? 돈을 몰라야 선비가 된다고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돈을 헤이라 하시니 앞뒤가 맞지 않은 교훈이라 감히 받들어 이행하지 못하겠읍니다.”
황주는 크게 기특히 여겼다. 나중에 종가로 계후해 나가게 되자 황주는 탄식하며 ‘외손 4명 중에 제일 뽑이를 빼앗겼다.’ 하였으니, 그 외조에게 무겁게 보인 것이 마치 저 황뇌(黃輅)가 주자(朱子)에게 무겁게 보인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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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면 외가에서 배우고 들어오면 마을 서숙에서 읽되 훈계와 권면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착실하고 부지런하며 한갖 입으로 읽고 귀로 듣는 것만을 일삼지 아니하고 미사여구(美辭麗句)를 필요로 하지 아니하고 내면의 진리를 탐구하며, 진실로 일호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오뚝이 앉아서 깊이 생각하되 잠자고 밥먹는 것까지도 잊어버리며, 반드시 명확하게 안 연후에야 그치며 다만 몸소 행하고 실지로 체험하는 것으로 최후의 법을 삼았다.
초당 앞에 감나무가 있어 서리맞은 감이 빨갛게 무르익으니 학동(學童)들이 다투어 나무에 올라 따오는데 부군은 홀로 글만 읽으며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므로 어른들이 물었다.
“너는 왜 감을 따러 가지 않느냐?”
부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감이 아직도 많이 남았으니 정히 먹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종 아무개를 시켜 따오라 하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원숭이의 재주는 구태어 익힐 필요가 없읍니다.”
어른들은 모두 이 말을 듣고 칭찬하며 원대한 뜻이 있는 인물임을 알았다. 차츰 장성하자 상월정(上月亭)에 올라가 10년 동안 문을 닫고 심력을 다하여 육경(六經)을 전공하여 은미한 사연과 심오한 뜻을 조목조목 분석하되 경의(經義)에 심히 밝아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부와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도를 항상 스스로 강명했다. 이 때문에 잡지(雜誌) 쇠록(鎻錄) 등 제가(諸家)의 소작은 절대로 눈을 거치지 아니하며,
“이것은 족히 마음에 해가 될 따름이라. 하필이면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취하느냐?”
하였다. 이로 보면 그 의념이 확고하여 옛날 군자의 지위로써 목표를 삼은 것이 여실히 나타난다.
선비(先妣) 허(許)씨는 천성이 몹시 엄하므로 부군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며, 정성을 다해 뜻을 받들어 진실로 효도에 독실했다. 그러나 선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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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성이 나면 매질도 하고 꾸짖기도 하며 조금도 용서를 않는데, 부군은 다만 공경하고 조심하여 자기 허물로 돌리고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으므로써 마침내 기쁘게 만드니, 선비는 매양 종족(宗族)에게 말하기를,
“우리 아의 효성은 옛날 민자건(閔子騫)에게 견주어도 부족할 것 없다. 나는 노망해서 무단히 성을 내는데 우리 아의 효성이 아니면 뉘가 받아 주겠는가?”
하였다.
선비는 부모를 여읜 외손자 하나를 데려다 기르면서 그에게 재산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본가의 재산을 소모하는 것이 적지 않은데, 부군은 전혀 협의롭게 보지 아니하고 도리어 더 보태어 유효하게 사용되기를 바라니 선비는 매우 감탄했다. 그리고 선비가 혹시 병이 나면 약을 올리고 미음을 올리되 남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반드시 몸소 가지고 가서 먼저 맛보고 올리며, 잠 잘 적에도 허리띠를 끄르지 아니하며 감히 활발히 걷지도 않았다.
선비는 마침내 명대로 살다 돌아가니 부군은 몸부림치고 통곡하여 거의 목숨이 끊어질 뻔하다 깨났으며, 치상(治喪)하는 절차는 한결같이 주자(朱子) 가례(家禮)에 의거하였다. 그리고 죽과 소찬을 먹으면서 3년을 하루같이 하니 호남 인사들이 다투어 흠모했다.
10대를 내린 종가 살림이 점차 모손되어 가지만 매양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심력을 다하여 제수를 장만하고 목욕재개하여 엄숙하고 공경하게 제사를 받들었다. 일찌기 말하기를,
“신의 흠향은 제물이 풍비한데 있는 것이 아니오, 정성 여하에 달린 것이니 제물이 풍성하고 정성이 박할진대 차라리 정성이 지극하고 제물이 박한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항상 집안사람을 훈계하며, 과일·채소·육포·젓 등속으로 제수에 충당할 만한 것을 정하게 마련해서 미리 다 저장하여 1년 동안 쓸 계산을 하게하며 임시에 궁핍된 적은 1번도 없었다.
부군은 지조가 고상하고 언행이 진중하여 위력에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이욕에도 유혹되지 아니하며 힘만 믿고 자행자지하는 자를 보면 반드시 억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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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것을 좋아하고 궁한 것을 견디는 자를 보면 반드시 구제하니 이서(吏胥)들은 그 덕에 굴복하고 노복들은 그 은혜에 감격하고 향당(鄕黨)은 그 풍토를 우러르고 종족들은 그 의를 높이 보았다. 또한 일에 임하고 이치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정의와 사욕을 분명히 구별하여 확고부동한 자세를 가지므로, 비록 옛날 진(晋)·초(楚)의 부력과 맹분(孟賁)·하육(夏育)의 용맹으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대개 뜻을 높이 세우고 의리를 명확히 본 것이 이와 같으니 말세의 어느 사람이 그 한계를 엿볼 수 있으랴?
일찌기 과거를 보기 위하여 서울에 들어가니 이 때에 민응식(閔應植)이 집권하면서 인격과 문벌이 모두 높은 자 한 사람을 얻어 장원급제를 시켜 민심을 수습할 계획을 하고 있다가 마침 부군이 도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어 청해 보고서 수석으로 뽑히게 하여 준다 하므로 부군은 응락했는데, 관서(關西) 사람이 돈 1백만 냥을 바치겠다고 해서 중간에 변경되어 낙방이 되었다. 부군은 시험장에서 나와 바로 민응식의 자리로 들어가니 좌상에 손님이 가득한지라 손가락으로 응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대감이 돈 1백만 냥으로 국사(國士)를 희롱하니 참으로 1푼 가치도 없다. 고광순이 어찌 세도가의 이용물이 되겠는가? 내가 망령이다.”
하고 옷소매를 떨치고 나와서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서 다시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을미년에 민중전이 화를 당하자 부군은 분을 못 이겨 소장을 올려, 먼저 국사를 그르친 큰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빨리 나라를 망치는 왜놈들을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것을 통렬히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각읍에 격문을 띄워 의사를 모취하며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더불어 서로 연락하여 광주(光州)에 모여 맹서하는데 뭇 사람들이 부군과 송사를 추대하여 호남 남·북의 맹주를 삼았다. 그래서 군사를 한 군데로 합쳐서 나주로 들어가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하는데, 이 때에 조정에서 감사와 선유사(宣諭使)를 명하여 군사를 해산하라 하니 이것이 결코 주상의 본의가 아니고 적신들이 협박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지만, 그러나 왕명을 빙자하는 데는 군사를 해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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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부터 항상 비분강개하여 국치(國恥)를 씻어버릴 것만 생각하고 집안일은 돌아보지 아니하며, 오직 일념이 의병을 일으키는 일뿐이었는데, 국병(國柄)이 적에게 돌아가서 화망(禍網)이 천지에 벌여 있어 마음 놓고 군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므로 다만 스스로 자취를 없애고 숨어 다니며 영남·호남으로 출몰하여 사람을 대하면 격려하고 눈물로 호소하니, 뭇 사람들이 모두 의에 감격하여 분발할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지나는 곳에 혹시 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단 말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혹은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말하고 혹은 비분에 못 이겨 마구 꾸짖으며 흡사 미친 사람과 같으니, 이는 진실로 일편단심이 자기 육체가 있는 것을 모르는 때문이다.
족조(族祖) 제량(濟亮)의 호는 인봉(麟峯)인데, 소시 때부터 마음이 맞고 노선이 같아서 서로 모이고 서로 꾀하여 의병을 규합해서 감고를 같이 했다.
병오년 4월에 면암(勉庵) 최 선생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가자 곧 인봉(麟峯)과 더불어 칼을 짚고 달아가니 면암은 이미 구금되어 갔으므로 또 인봉과 함께 가서 기우만(奇宇萬)·백낙구(白樂九)를 보고 다시 의병을 일으킬 일을 꾀하여 기일을 정하고 돌아갔는데, 이윽고 일이 발설되어 기공·백공이 모두 붙잡혀 갔다. 그러나 부군은 조금도 좌절되지 않고 더욱 분발할 것을 생각하여 오래도록 말지 않았다.
아! 의병의 소리가 위에 들리어 주상 전하는 비밀히 애통의 조서를 내려 총리 호남 의병대장으로 명하니, 부군은 조서를 받들고 감격의 눈물이 쏟아지는 듯했다. 그래서 12월 11일에 부군은 인봉과 더불어 저산(猪山) 제각(祭閣)에서 의기(義旗)를 세웠는데 광훈(光薰)·광수(光秀)·광채(光彩), 그리고 윤영기(尹永淇)·박기덕(朴基德) 등이 모두 종사하여 모의에 참여했다.
부군은 남원(南原) 양한규(梁漢奎)와 약속하고 섣달 그믐날 저녁에 거사해서 내외가 서로 호응하여 남원의 적을 무찌르기로 했는데, 이쪽에서 미쳐 당도하기 전에 한규(漢奎)의 계획이 이미 적의 정찰에 발각되었으므로, 드디어 혼자서 당적 할 계획을 하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다. 당도한즉 아무런 동정이 없으므로 곧 군사를 나누어 3부대를 만들어 적의 진영을 육박하여 포를 쏘았는데, 이 때에 날이 이미 밝아 적이 혹은 벽을 등지고 혹은 담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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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어 몸을 숨기고 마구 쏘아 대고 의병은 툭 터진 거리에서 몸을 내놓고 서로 교전하는 판에 실수가 있을까 염려되어 마침내 군사를 몰고 후퇴했다.
5월에 능주(綾州) 적을 습격하였으나 이득을 보지 못했고, 8월에 동복(同福) 적을 쳤으나 역시 승패가 없었다. 그리고 호서(湖西) 의병장 김동신(金東臣)과 더불어 응령(鷹嶺)에서 모여 서로 응원할 것을 약속했다.
부군은 동으로 번쩍 서로 번쩍하며 유격(遊擊)을 벌이니, 적이 심히 근심하여 마침내 녹천(鹿川)의 종가터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니, 이때에 부군의 종형 광윤(光潤)이 후욕을 무릅쓰고 구타를 당하며 혹은 울고 혹은 호소하여 마침내 사당만은 탈없이 보존되었다.
8월 11일에 행군하여 구례(求禮) 연곡사(燕谷寺)에 당도하니 산은 막히고 골짜기는 깊으며 동으로 화개동(花開洞)과 통하여 그 동리에는 산 포수가 많고 북으로 문수암(文殊庵)과 통하여 그 암자는 바로 천험(天險)에 해당하므로 연곡을 웅거하여 중심지로 삼고 장차 문수암을 끌어당기며 화개동을 무마해서 군사를 머무르고 예기를 기를 계획을 했다. 그래서 군기(軍旗)를 세우고 기에는 멀지 않아서 회복한다는 뜻으로 ‘불원복(不遠復)’ 3글자를 썼다.
이 때에 적이 화개동에 들어왔다는 것을 염탐해 알고서 곧 군사를 보내어 새벽을 타서 포위하여 씨가 없이 다 죽일 작정이었는데, 적 2명이 탄환을 맞은 채 새벽 안개를 타고 빠져 나갔으므로 약간의 무기를 노획했을 뿐이었다. 이로 모집에 응하는 자가 날로 많아져서 군의 기세는 더욱 떨쳤다.
9월 18일에 적이 문수암을 불태웠으니, 대개 김동신(金東臣)이 영남(嶺南)의 적을 공격하면서 이 암자에 묵은 까닭이었다. 적이 물러가 화개동에 둔치니 부군은 광수(光秀)에게 1부대 군사를 주어 가서 그 뒤를 치게 하고, 윤영기(尹永淇)에게 1부대 군사를 주어 가서 그 머리를 쳐서 광수와 서로 호응케 하였다. 그리고서 다만 병든 군사 몇 명을 거느리고 인봉과 함께 본진을 지키면서 승첩의 보고만 기다렸다.
이 때에 적은 이미 화개동을 비우고 쌍계사(雙溪寺)로 향하여 역시 연곡(燕谷)을 노리며 영·호남의 적을 소집하여 밤중에 가만히 달리어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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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주위에 육박하여 동정을 살피는데, 마침 밖으로 순 도는 군사가 있어 적이 온 것을 알고 급히 고했다. 적이 바야흐로 포를 터뜨리므로 병든 군사로 하여금 대응하여 포를 쏘게 한즉 적의 포가 일제히 터져 소리가 콩 볶 듯하여 창·벽·처마·개와에 번갯불이 번쩍이니 부군은 일이 급박함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1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기로 벌써부터 작정했으니 공들은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살 길을 찾아가라.”
인봉은 말했다.
“당초에 의를 위해 함께 거사했으니 종말도 의를 위해 함께 죽는 것이 직책이다. 어찌 죽는 마당에 다달아 홀로 모면하려 한단 말이냐?”
부군은 또 광훈(光薰)에게 말했다.
“너는 군인 명부를 없애어 후환을 막으라.”
부군은 곧 담장 밖으로 뛰어 나가니 인봉이 뒤를 따랐다.
이 때에 대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실대고 땅을 뒤덮으니, 부군은 연기와 불꽃을 무릅쓰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네놈들은 나의 국가의 원수요, 사가(私家)의 원수다. 살아서 네 나라를 없애지 못했으니 죽어 귀신이 되어 네놈들을 씨 없이 죽이고 말겠다.”
적이 승리의 기세를 타서 포를 쏘아대니 부군은 인봉과 더불어 일시에 탄환을 맞아 순절했다. 적은 절 안팎을 모두 불질러 버리고 마침내 물러가니 아까 화개동으로 간 한 부대 군사는 이 소식을 들어 알고 역시 모두 흩어졌다. 때마침 동풍이 불길을 도우니 불길이 치성하여 온 땅을 뒤덮으므로 임준홍(林俊洪)이란 사람이 시체가 불에 탈까 저어하여 2시체를 떠메고 중의 채포(菜圃)로 옮겨 솔가지로 덮었다.
그 후 나흘이 지나서 관훈이 상포를 준비하여 초빈하고 상하로 분을 만들었다. 이미 4, 5일이 지났으나 안색이 변하지 않고 성난 눈이 감기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기며 충분이 맺히고 맺혀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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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매천(梅泉) 황현(黃炫)이 와서 곡하고 삯꾼을 사서 흙을 더하여 봉분을 만들었다. 순절하기 수일 전에 절문 앞 고목나무에서 큰 뱀이 떨어져 죽고 여우가 밤중에 절을 돌며 슬피 울고 까마귀 수백 마리가 낮에 날아와서 배회하며 가지 아니하니 뭇 사람이 괴히 여기며 이것이 예보인 줄은 전혀 몰랐다. 이에 앞서 구례(求禮)로부터 하동(河東)에 이르기까지 1백리의 사이에 길가 주막집 여자들은 밤마다 분향하고 승전하기를 빌었는데 패전했다는 기별을 듣자 서로 슬퍼하며 말하기를,
“고 대장이 죽었다니 하늘도 무심하다.”
하며 골목마다 곡성이 연이어 여러 날을 그치지 않았다. 그 순결한 충성과 큰 의리는 진실로 미물도 감응하게 되고 또한 부녀자들도 비통하게 여겼으니, 어찌 물리(物理)와 민심의 본연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무신(戊申) 4월에 부군의 종형 광윤(光潤)과 인봉의 아들 용주(容柱)가 함께 가서 반장했는데, 이것은 종중에서 발의한 것이다. 영구가 연곡에서 출발하여 지나가는 고을마다 관중이 늘어서서 탄식하고 애석히 여기며 서로 눈물을 뿌려 옷이 다 젖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만장과 제문이 밀려들어 곳마다 정상(停喪)하게 되니 상행(喪行)이 거의 기일을 늦추게 될 뻔했다.
고향에 당도하자 여러 고을에서 많이 와 관중이 둘러서서 절하고 곡하며 문득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니, 이는 평소의 덕행이 사람을 감명시킨 것만이 아니라 실로 필생의 충의가 세상을 격동케 한 때문이다. 의열공(毅烈公) 묘소 바른 편 기슭 정좌(丁坐)의 벌에 부장했다.
배위(配位)는 금성오씨(錦城吳氏)로 혁규(赫圭)의 따님이요, 명곡(明谷) 희도(希道)의 후손인데, 부군이 순절한 뒤 1년 후에 작고해서 부군의 묘소 왼편에 부장했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재환(在桓)은 병으로 벙어리가 되고, 둘째 아들 재홍(在洪)은 장가들기 전에 죽었다. 그리고 딸은 행주(幸州) 기산도(奇山度)에게로 시집갔다. 집안에서 종가집 일이 의탁할 곳이 없게 됨을 근심하여 부군의 생가 조카 재춘(在春)에게 제사를 맡기기로 의논을 정했는데 곧 광훈의 아들이다. 이 때에 광훈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며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 패전하여 잡히게 되어 해도(海島)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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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가 있으므로, 곧 편지를 보내어 대일통(大一統)의 정의를 명확히 제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종손으로 세웠다. 재춘은 일찍 죽고 그 아들 두석(斗錫)도 역시 일찍 죽어 아들조차 없으며, 재환도 역시 진작 병으로 죽었다. 옛 ‘사람도 현철(賢哲)의 뒤가 침체하기 쉽다’.고 탄식하였거니와 부군같은 정기와 정의로 이같이 말살스럽게 되니 하느님의 뜻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아 ! 부군은 신장이 빼어나고 살결이 희어 험집이 없으며, 기상이 장중하여 마치 산악이 우뚝 솟은 것 같고 언어가 명랑하고 쾌활하여 화창한 봄날과 같으며, 이욕을 멀리하고 의리를 앞세우며, 강한 자는 억제하고 약한 자는 부축하며, 더우기 경지(經旨)에 밝아 정의와 사욕을 정밀히 분석하여 독실히 실천하는 것만을 필요로 삼았다. 일찌기 말하기를,
“대의를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큰 종기에 침 한 번 맞은 것과 같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욕을 보고 몸을 잊어버리는 것은 곧 담장 밑을 뚫는 정도나 한 가지다.”
하였다. 그리고 효성이 극진하여 홀로 계신 어머니를 끝끝내 기쁘게 해 드렸고, 우애가 진지하여 여러 종족들로 하여금 환심을 갖게 하며, 병든 자에게는 약을 주고 굶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며, 착한 자를 좋아하되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만난 듯이, 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되 궂은 냄새와 같이 하며, 남의 급한 것을 급하게 여기고, 남의 근심을 근심하며 추호도 사정이 없어 얼음같이 맑고 옥같이 투명하니 진실로 덕을 좋아하는 군자라 하였다.
더우기 경경한 일념이 오직 나라를 근심하고 집안을 잊으며, 으뜸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전후로 전장에 나가는 동안에 일이 잘 못되어 싸움에 실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조금도 좌절된 감이 없이 동으로 번쩍이고 서로 공격하며, 아침저녁으로 변장하고 밤낮으로 진지를 바꾸어 모였다. 흩어지기를 구름같이 하고 빠르기는 번개와 같이 하여 적들도 혼을 날렸으니 진실로 철석(鐵石) 같은 심장이었다.
하물며 위엄과 무력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죽고 삶에도 변하지 아니하여 영·호남에 전전하면서 여러 번 패하기도 하고 여러 번 떨치기도 하니 적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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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충을 알아주어 반드시 고충신(高忠臣)이라 불렀음에랴. 연곡의 싸움에 적이 미비한 틈을 타서 철통같이 에워싸니, 부군은 급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조용히 아우와 좌우들을 설득시키고, 마침내 타는 불길 속에 서서 큰 소리로 적을 꾸짖는데 말과 기개가 늠름하여 조금도 빗나가는 법이 없었으니 그 한 몸은 도시 충간(忠肝) 의담(義膽)이었다.
더구나 백발의 늙은 서생으로 무사(武事)가 무엇인지 모르고 군사도 역시 오합지졸인데, 다만 충의를 신뢰하고 창을 베개 삼아 10년 동안 노숙(露宿)하기를 하루와 같이 여겼으며,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데도 지주(砥柱)처럼 우뚝 서서 그 본성을 온전히 가졌으니, 만고에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이것이다. 삼강오륜이 힘입어 보존되고 난신(亂臣) 적자(賊子)가 죄를 두려워하게 되었으니 충렬공·효열공·의열공 3선조의 하늘에 계신 영이 반드시 ‘나는 후손이 있어 끼친 열절(烈節)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하였을 것이다.
흥덕(興德) 유생(儒生)이 도동묘(道東廟)를 창견하여 최면암(崔勉庵)과 부군을 제사하고 있으니, 선비란 의(義)를 좋아하는데 어찌 이러하지 아니하랴. 흥덕은 의를 좋아하는 선비가 많다는 것을 이로서 상상하겠다. 삼가 여러 명사가 찬술한 전(傳)·실록·만사·제문 등을 뒤져서 그 실적을 취하고 내가 평소에 듣고 본 것을 참작하여 행장을 만들었으니, 거의 사정에 의한 넘치는 찬사가 없을 것이라 믿는다. 행여 사가(史家)가 이 글을 신빙삼아 저 옛날 양(梁)나라 상동왕(湘東王)이 충효(忠孝) 겸전한 인사를 기록할 때 쓰던 금관(金官)을 뽑아 들 것을 기다리는 바이다.
인봉공행장(麟峰公行狀)
고광렬(高光烈) 지음
옛날 채백개(蔡伯喈)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남의 비명(碑銘)을 많이 지었으되 오직 곽유도(郭有道)의 비에만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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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참으로 재주와 학식이 백개와 같은 이가 있어 이 행장을 짓는다면 부끄러운 빛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부탁 받게 된 것을 스스로 다행하게 여길 것이다.
공의 휘(諱)는 제량(濟亮)이요, 자는 성필(聖弼)이요, 인봉(隣峰)은 그 별호다. 고씨의 상계는 탐라(眈羅 : 濟州)에서 나왔는데, 장택군(長澤君)으로 봉한 분이 있어, 검교(檢校) 휘(諱) 복림(福林)으로부터 비로소 장흥 고씨가 되었다.
3대를 전하여 휘 협(愜)에 이르러는 고려조(高廲朝)의 북부상서(北部尙書)로, 혁명이 되자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고 은둔생활을 했으며, 또 4대를 전하여 휘 운(雲)에 이르러는 생원(生員)·진사(進士)·문과(文科)로 형조좌랑(刑曺佐郞)을 지내고 별호는 하천(霞川)인데, 조정암(趙靜庵) 이하 여러 어진 이와 도의(通義)로써 사귀다가 북문(北門)의 화가 일어나매 배척을 받고 향리로 돌아왔다. 그 후에 예조참판(禮曺叅判)으로 증직(贈職)이 내렸다.
휘맹영(孟英)은 진사·문과로 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으로 증직이 내리고 별호는 하헌(霞軒)이다. 휘경명(敬命)은 제봉(霽峯)선생인데 생원·진사·문과·호당(湖堂)으로 공조 참의(工曺叅議)를 지내고, 임진(壬辰) 왜란에 창의하여 나라 일에 근념하다가 금산(錦山)에서 순절(殉節)하니,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이 내리고 시호는 충렬(忠烈)이요, 사우(祠宇)를 세워 포충(褒忠)이라 액호(額號)를 내리고 특별히 부조(不祧)를 명했다. 휘인후(因厚)는 진사문과로 학유(學諭)를 지냈으며, 금산 싸움에 충렬공을 모시고 함께 순절하니 영의정(領議政)으로 증직이 내리고 시호는 의열(毅烈)이요 특별히 부조(不祧)를 명했다. 그리고 포충사(褒忠祠)에 배향되었으니 바로 학봉(鶴峰) 선생이다.
휘부천(傅川)은 진사·문과로 필선(弼善)을 지내고 폐모(廢母)의 발의를 배척하다가 뭇 소인의 빈축을 받아 용납되지 못했다. 그 후 정사(靖社) 진무(振武) 공신으로 녹훈(錄勳)되었으며, 인조(仁祖) 대왕께서 임금이 되기 전에 유천(柳川)으로 3번이나 찾은 일이 있어 세상에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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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게 되었다. 도장사(道莊祠)에 배향되었으니 이 분이 바로 월봉(月峰) 선생이다.
휘두강(斗綱)은 승의랑(承議郎)인데 자질은 얼음과 옥같이 맑고 학문은 천(天)과 인(人)을 궁구하니 당시 여러 군자들이 모두 완성되었을 때의 이연평(李延平)과 미숙할 때의 주염계(周濂溪)로 칭도하였다. 도장사에 배향되었으니 이 분이 바로 회과당(悔過堂) 처사(處士)다.
휘세화(世和)는 남묘당(南畝堂)이요, 휘응린(應麟), 휘만유(萬維), 휘대겸(大謙), 휘시정(時正)은 공의 조고(祖考) 이상인데 대대로 가훈(家訓)을 이어받아 시례(詩禮)를 서로 지키고 모두 벼슬은 하지 아니하였다.
부친의 휘는 휘진(輝鎭)인데 의표가 괘걸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이르고,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제주양씨(濟州梁氏)인데 석호(錫灝)의 따님이요, 소쇄처사(瀟灑處士) 산보(山甫)의 후예인데 진작 작고했고, 모친은 숙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인데 운(沄)의 따님이요, 익성공(翼成公) 희(喜)의 후예다. 헌종(憲宗) 기유(己酉) 11월 1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풍채가 준수하고 정신이 기발하며 도량이 활달하여, 어릴 적에 여러 아이들과 유희(遊戱)하면서도 엄연히 주장이 되어, 병졸을 지휘하여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진(陣)을 벌이는 형상과 같았으며, 바깥 스승에게 글을 배우면서 ≪사기(史記)≫를 읽다가 ‘범맹박(范孟博)이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면 개연히 천하를 밝힐 생각을 가졌다’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문득 장책을 두들기고 탄식하며,
“이야말로 대장부가 하필 종신토록 글만 읽어 썩은 선비가 되려 하겠느냐?”
하니 호군공(護軍公)은 이 말을 듣고 비록 훈계를 더했으나 오히려 마음속으로는 그 지기가 협소하지 않은 것을 기뻐했다.
공은 천성이 효도에 독실하여 부모를 섬기되 여름에는 서늘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여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집이 비록 가난하지만 맛있는 음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며, 혹시 병환이 있게 되면 미음을 올리고 약을 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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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반드시 몸소 하고 남에게 맡기지 아니하며, 밤·낮으로 마음을 쓰되 피로한 줄을 모르고 한결같이 하니 이야말로 천성이 그러했다.
부모의 전·후 상사에는 애통하여 몸부림쳐 거의 마른 나무처럼 되었으나 초빈하고 장사하고 제사하는 것을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준하며, 매양 제사날을 당하면 목욕재개하고서 제기를 깨끗이 닦고 제수를 조촐히 장만하며 항상 집안사람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신도(神道)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니 제수가 풍성만 하고 조촐하지 못할진대 차라리 간소하고 정결한 편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평소에는 기상이 진중하고 언어가 간략하며 신(信)으로써 사람을 사귀고 의(義)로써 세상을 살아가며, 친구가 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구제하고 이웃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와주며 남의 근심을 근심하고 남의 즐거움을 즐겁게 여기어 온 마을에 싸우는 사람이 없는 것은 저 왕렬(王烈)의 마을에 부끄럽지 않았다.
시국 일이 날로 글러만 가서 내흉(內凶)·외적(外賊)이 이미 국사를 그르쳤으므로 드디어 과거 보는 업을 폐하고 화평(花坪)으로 터를 잡아 초가를 지어 유유한 생활을 했다. 그 곳은 산수가 수려하고 송죽(松竹)이 무성하며 성시(城市)의 비린내 나는 티끌이 한 점도 물들지 아니하니 진실로 훌륭한 사람의 수양지였다. 항상 의분을 품고 혹은 술을 많이 마시고서 오래 울곤 하며, 혹은 친구를 붙들고 담화하여 답답한 가슴을 풀기도 했다. 특히 족손(族孫) 의열공(毅烈公) 봉사손 광순(光洵) 별호는 녹천(鹿川)과 가장 심지가 부합되어 서로 간에 내왕하며 심사를 의논하고 의기(意氣)를 서로 허락하였다. 그래서 열흘 동안만 못 보아도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하니 옛사람의 ‘기미(氣味)가 같으면 서로 찾고 소리가 같으면 서로 호응한다.’
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이름이다.
공은 일찌기 녹천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저 왜놈이 나라를 먹으려고 하는데 그대 같은 유술(儒術)을 장차 어디다 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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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은 웃고 대답했다.
“서생의 가슴 속에는 저절로 갑병(甲兵)이 들어 있는 법이니 공과 같은 호기(豪氣)는 다만 한 모퉁이를 담당할 뿐입니다.”
이야말로 서로 알고 서로 허락함이 너무도 깊어서 농담으로써 진담을 토한 것이다.
병신(丙申)년에 국모(國母)를 시해한 변고가 생기자 녹천(鹿川)은 남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기우만(奇宇萬)은 북쪽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주(光州)에서 회맹(會盟)을 갖고 군사를 한데 모아 나주(羅州)로 향하여 장차 서울로 올라갈 계획을 하는데, 이 때에 감사(監司)와 사신(使臣)이 모두 왕의 명을 받들고 선유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해산하게 되였다.
이 해에 공은 오래도록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어 의병에 참여하기는 어렵게 되자 녹천은 심히 민망히 여겨 자주 병세를 물었고, 출발에 임하여는,
“잘 병을 조리하여 병이 나은 그날로 싸움터에 와서 서로 만나게 하라.”
고 부탁을 하니, 공은 눈물을 뿌리고 전송하며 의분이 격동하여 병이 더욱 더해서 반년이 지나서야 겨우 차도가 있었다. 그런데 녹천은 이미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갔다.
공은 이 후로 항상 근심을 품고 집안 일은 돌아보지 아니하며 강개하고 격분하여 오직 술만으로 생명을 삼았다. 을사(乙已) 5조약이 체결됨에 미쳐서는 원흉이 나라를 팔아서 당당한 국권이 하루 아침에 없어지니, 공은 녹천과 더불어 또 의병을 일으켜 원수 갚을 것을 의논하고 동지를 규합하며 용사를 모집하는데, 이 때를 당하여 국권이 적에게 돌아감으로써 정찰의 그물이 천지에 벌여 있으니 그런 일은 항상 숨어 다니며 해야 되므로 뜻대로 되기는 어려웠다.
병오(丙午)년 4월에 최면암(崔勉庵)이 순창(淳昌)으로 들어와 의사의 모임을 가지니 공은 녹천과 더불어 달음질쳐서 가 본즉, 면암은 이미 잡혀가고 없었다. 또 기우만(奇宇萬)·백낙구(白樂九)가 다시 거사하자고 권하는 것을 보고서 서로 맹서하고 돌아왔는데, 기공·백공도 역시 잡혀 갔다. 공은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고 갈수록 더욱 분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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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에 공은 의기(義旗)를 저산(猪山) 제각에서 세우고 녹천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를 삼고, 공은 차석이 되고, 광훈(光薰)·광수(光秀)·광채(光彩)·박기덕(朴基德)·윤영기(尹永淇) 등이 모두 종사가 되어 모의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초계(草溪) 양한규(梁漢奎)와 더불어 섣달 그믐날 저녁에 내외가 상응하여 남원(南原)의 적을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한규도 역시 산 포수를 부르고 용사를 모취하여 기회를 기다렸다. 그런데 일이 발설되어 한규는 마침내 혼자 당적할 계획을 하다가 이미 패전해서 죽었다.
공은 약속한 날짜를 대 갔는데 전혀 동정이 없으므로 역시 늦추다가는 일이 잘못될까 싶어서 경쾌한 군사로써 3길을 나누어 곧장 드리댔는데, 비록 쾌히 이기지는 못했으나 적도 역시 낙담하였다. 이로부터 적의 사찰이 더욱 더 기민하니 공은 기정(奇正)과 허실(虛實)의 술법을 써 조석으로 변장하고 밤낮으로 진지를 바꾸어 영·호남에 드나들며 구름과 같이 모였다 흩어지고, 번개와 같이 빠르고 속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았다.
이 해 5월에 능주(綾州)의 적을 습격하고, 8월에 동복(同福)의 적을 드리쳤으나 모두 이기고 진 것이 없었다. 동월 11일에 행군하여 구례(求禮) 연곡사(燕谷寺)에 당도하니, 대개 그쪽 지형은 산이 막히고 골짜기가 넓어 영·호남의 인후(咽喉)의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머무르고 예기를 기를 양으로 드디어 ‘멀지 않아 회복한다’는 ‘불원복(不遠復)’의 군기(軍旗)를 세웠다. 그리고 염탐하여 적이 화개동(花開洞)으로 들어간 것을 알자 드디어 군사를 보내어 새벽을 타서 포위하고 장차 씨 없이 포살하려 하는데, 2적 이 탄환을 맞고 달아났으므로 무기 약간을 노획했을 뿐이었다.
이 때에 호서(湖西) 의병장 김동신(金東臣)이 영남의 적을 치기 위하여 문수암(文殊庵)에서 자고 갔는데, 적이 알고서 문수암을 불지르고 물러나 화개동으로 들었다. 공은 녹천과 상의하고 고광수(高光秀)와 김선행(金善行) 2사람으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2부대를 편성하여 앞뒤로 적을 치게 하고, 자기는 다만 병든 군사만을 거느리고 본진을 지키며 승첩의 보고를 기다렸다. 때마침 적도 역시 연곡(燕谷)을 노리어 가만히 영·호남의 적을 합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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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타고 샛길을 나와 산을 오르며 사방으로 모여 들어 철통같이 포위하니 공은 말하기를,
“항아리 속에 든 자라 모양으로 화가 이미 급박했으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대장부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하였다.
적이 발포할 때마다 병든 군사를 시켜 포를 응하게 했는데, 갑자기 적의 세력이 바람 일듯 비 퍼붓 듯하여 창·벽·처마·개와에 번갯불이 번쩍이니 녹천은 여러 장령들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기로 내 마음이 본래 정해졌으니 공들은 행여 나를 생각하지 말고 각기 살 길을 찾으라.”
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에 의(義)로써 함께 거사했으니 나중에도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이 직책이라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모면하려 하면 되겠는가?”
마침내 녹천과 함께 담장 아래 서서 연기와 불길을 무릅쓰고 크게 소리쳐 적을 꾸짖으니 적의 탄환이 비오 듯하여 같은 때에 같이 순절했다. 바로 정미(丁未) 9월 11일이다. 그 시체는 임준홍(林俊洪)이란 사람이 떠메다 중의 포전으로 옮기어 솔가지로 덮어서 불에 타는 것을 모면했다.
이로부터 나흘이 지나서 광훈은 상포를 준비하여 포전에 초빈을 만들어 상하로 봉해 두었는데, 그 후 매천(梅泉) 황현(黃炫)이 와서 곡하고 삯꾼을 사서 흙을 얹어 봉분을 만들었다. 이듬 해 4월에 공의 아들 용주(容柱)와 녹천의 종형 광윤(光潤)이 동시에 반장하였으니, 종중의 의논에 따른 것이다.
2상여가 길을 떠나자 만사·제문이 구름같이 모이고 노제(路祭)가 줄대어 거행되며 가는 곳마다 관중이 길거리를 메우니 충의가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이 진실로 거짓말이 아니다. 화순(和順) 이서면(二西面) 인계리(仁溪里) 자좌(子坐)의 벌에 장사하였다.
배(配)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기두(箕斗)의 따님이요, 문경공(文景公) 직(稷)의 후예인데 무신(戊申)년 3월 6일에 작고했다. 무덤은 보성(寶城)복내면(福內面) 봉계리(鳳溪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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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갑좌(甲坐)의 벌에 있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남은 용주(容柱)·일주(馹柱)·학주(鶴柱)요, 여는 경주(慶州) 이봉우(李鳳雨)에게 시집갔는데, 이 봉우는 익재(益齊)·제현(齊賢)의 후손이다. 용주는 성주이씨(星州李氏) 백용(伯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으니, 남은 광하(光夏)·광봉(光鳳)·광채(光彩)요, 장녀는 진원(珍原) 박태규(朴泰奎)에게, 차녀는 초계(草溪) 정호택(鄭鎬宅)에게, 계녀는 남원(南原) 양태섭(楊泰燮)에게 시집갔다. 일주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장환(章煥)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으니, 남은 광식(光植)·광면(光勉)·광우(光愚)요, 학주는 진주정씨(晋州鄭氏) 참봉(叅奉) 기식(箕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으니, 남은 광택(光鐸)·광회(光會)다. 증손·현손은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생각컨대 공은 인품이 괴결하고 외표가 헌앙하여 남의 급한 사정을 급하게 여기고 남의 근심을 근심하며 용잔하고 세쇠한 일을 하지 아니하고, 신의는 온 고을에 믿음을 주고 효제는 사람을 감동시키며 후중하여 꾸밈새가 없고 마음이 순박하여 확고 불발하는 기개가 있었다. 더구나 의병을 일으켜 영·호남을 드나들며 혹은 기습하고 혹은 유격하여 적과 더불어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결심하고 승패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오직 의(義)만을 주장하여 10년을 고생하면서 여러 번 위태한 고비를 겪었지만 일찌기 조금도 그 기운을 좌절시키지 않았다.
마침내 연곡의 한 싸움에 탄환을 맞아 순절했으니, 대개 국은(國恩)을 입지 못하여 몸에는 관직의 책임이 없고 무사에 익숙하지 못하여 군사마저 오합지졸들인데, 다만 충간(忠肝) 의담(義膽)으로써 취사선택을 정하여 죽음을 보기를 집에 돌아가는 것같이 여겼으니, 빛나고 빛난 일편단심은 신명(神明)에게 질문할 만하고 늠름한 외로운 절개는 삼강오륜이 힘입어 보존되었던 것이다.
공의 손자 광하가 이산(尼山) 내 집으로 찾아와서 행장 짓는 책임을 지우니, 대개 공을 깊이 알고 공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 나와 같은 이가 없기 때문에 이 부탁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여러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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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록과 내가 본래부터 자상히 아는 바를 아울러 참고하여 그 시종의 행사를 써서 행장을 만들어, 다른 날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증빙하고 채택하여 영원토록 전하게 해 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의병장(義兵將) 이대극전(李大克傳)
고광렬(高光烈) 지음
이 대극의 이름은 순식(淳植)이요, 자는 영화(英華)인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 이름을 불러 주지 아니하고 대극으로 부른다. 알고 보면 그 위엄과 용맹이 능히 싸움에 다다르면 크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함이다. 그래서 이 대극도 이로써 자처한 것이다.
그 선대는 함평(咸平) 사람인데, 을사(乙已)년 일로 완인(完人)이란 말을 들은 죽음(竹陰)으로부터 대대로 유업(儒業)을 가져 유명한 씨족이 되었다. 어머니가 일찌기 꿈에 붉은 용이 품속에 나와 문득 공중으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는 것을 보고 태기가 있어, 고종(高宗) 을해(乙亥)년에 영광(靈光) 남산(南山)에서 낳았다.
나면서부터 비범하여 두각이 우뚝하고 성음이 웅장하니 지감있는 사람들이 이미 원대한 인물로 허락했다. 점점 장성하매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담략이 보통이 아니며, 사람됨이 의기를 좋아하여 산업(産業)을 일삼지 아니하고 활쏘기·말 달리기와 진치고 대오를 편성하는 일만 익히고, 강개하여 큰 뜻을 지니며 무기가 있고 문식은 적으나, 오히려 편지나 문부로 날마다 쓰이는 것에 있어서는 능히 술술 입으로 불러내려가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감히 더불어 항쟁하지 못했다.
갑오(甲午)년 동학(東學) 난리에 고을 사람들이 대극을 추대하여 수성장(守城將)으로 삼으니, 대극은 사양하지 않고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웅거하여 기율은 엄숙하고 대오는 정연할 뿐더러, 왕왕이 기병(奇兵)을 내어 소탕하니 온 고을이 힘입어 편안하여 절대로 침해당하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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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가 평정된 후. 이내 벼슬길에 나가 참봉(叅奉)이 되었는데, 세상 일이 날로 그릇됨을 보고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항시 답답한 기분으로 지냈다.
병오(丙午)년 봄에 국권이 적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분히 여겨 이에 의병을 일으켜 영광의 적을 선뜻이 쳐부수고 바야흐로 기세를 떨치는데, 마침 기성재(奇省齋)가 장성(長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바로 가서 보고 여러 가지를 의논한 끝에 지기가 서로 합하여 마침내 군사를 합하기로 허락했다. 그래서 휘하 군사 수백 명과 군량·무기를 가지고 문수사(文殊寺)로 달음질쳐 가서 성재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대극은 차석이 되었다. 그리고 또 도포장(都砲將)으로 군기감(軍器監)까지 겸직하여 온 진중이 그를 힘입어 무겁게 보였다.
하루는 적이 밤중을 이용하여 몰래 와 바야흐로 포위망을 치고 있는데, 대극이 앞장서서 크게 꾸짖으며 군사들을 시켜 좌우로 협공하여 수없이 총살하니 적이 모두 도망갔다. 그 후 수일이 지나서 법성포(法聖浦)의 적을 엄습하고 무장(茂長)의 적을 들이쳐서 연달아 싸워 연달아 이기고, 고창(高敞)에 이르러는 베이고 빼앗은 것이 더욱 많으니, 적도 역시 혼을 날려서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성재는 위로하고 무마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용맹은 나는 장수라 이를 만하다. 풍우같이 몰아치고 번개같이 신속하니 내가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던들 어떻게 필승을 했겠느냐?”
하였다.
그 후 영광의 적을 쳐서 두어 명을 죽이고 장성으로 회군하며 적과 더불어 여러 번 싸움이 어울리는 동안 몸에 창과 화살을 맞았으나,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항상 몸소 앞장서며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베어 죽이기도 하니 적이 위엄과 용맹을 겁내어 모두 몰래 물러가곤 하였다.
대극은 성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군사가 적고 저놈들은 군사가 많으니 형세가 항상 위태한데, 하물며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을 가지고 용감무쌍한 적의 군사를 상대하면서, 더구나 무딘 칼날과 둔한 화승총으로 저놈들의 서릿발 같은 칼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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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같은 포를 맞겨 둔다는 것은 너무도 이를데 없는 짓입니다. 그러하니 모름지기 군사를 휴식하여 싸우지 말고, 먼저 총·칼을 만들어서 만전을 기하는 것이 급무일 듯합니다.”
성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대 말대로 총·칼을 먼저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하루를 휴전하면 적을 10배나 길러 주는 셈이 되니 휴전할 수는 없다. 그대는 우익군(右翼軍)을 거느리고 우도(右道)의 적을 소탕하고, 나는 좌익군을 거느리고 좌도의 적을 무찌르고, 인해 담양(漂陽)에 주둔하면 적이 반드시 앞·뒤를 돌아볼 새 없을 것이다.”
대극은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어등산(魚登山)에 당도하여 적을 쳐서 물리쳤다. 그리고 곧장 석대산(石臺山)으로 들어가서 군사를 휴식시키고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두어 달이 지나서 문득 성재가 담양에서 패전하여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서 곧 김준(金準)에게 서신을 보내어 서로 호응하여 기각(椅角)의 형세가 되기로 약속했다. 급기야 성재는 끝내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고 참살을 당했다는 말을 듣자, 문득 목을 놓아 통곡하며 정신없이 땅에 쓰러져서 살아나지 않기로 하는 것같이 보이니 좌우가 모두 말리며,
“지금 원수 적을 섬멸하지 못했는데 그 놈들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렇게 울기만 하니 우는 것으로써 왜놈을 대항한다는 것인가?”
이렇게 말하고 대극을 추대하여 맹주를 삼으니 대극은 사양하며 말했다.
“나는 하나의 굳굳한 무인(武人)으로 합하고 변하는 병법을 모르고 단지 일편단심만 가지고 항상 앞장서서 군사를 몰고 다녔을 뿐이다. 어찌 감히 이 자리를 담당한단 말이냐?”
뭇 사람들이 모두 고집하고 대극을 추대하니 대극은 개연히 단에 올라 피를 입에 바르고 하느님께 맹서했다.
“국사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바른 직책이다. 무릇 함께 맹서한 우리 사람은 몸뚱이는 달라도 마음은 한 가지 저해(日)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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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증명한다.”
뭇 사람들이 모두 날뛰며 분발하므로 이에 노화삼(魯化三)으로 모사(謀士)를 삼고, 이백겸(李伯謙)으로 선봉장을 삼고, 김남수(金南洙)로 좌익장(左翼將)을 삼고, 김관섭(金寬燮)으로 우익장(右翼將)을 삼고, 유자성(庾子成)으로 포장(砲將)을 삼고, 이화삼(李化三)으로 후군장(後軍將)을 삼고, 봉계칠(奉啓七)·정진옥(鄭珍玉)·주현숙(周賢叔)·주만옥(朱萬玉)을 모두 군사 참모로 삼았다. 이와 같이 소임이 배정되니 온 군중이 감격하여 모두 의(義)를 떨치고 용기를 냈으며 이로부터 향응하고 따라붙는 자도 날 로 더욱 많아서 군의 기세가 자못 성했다.
마침내 무장(茂長)·고산(高山)에 군사를 주둔하고 적을 유혹케 하는 꾀를 써서 적의 기병을 골짜기 속으로 끌어들여 복병으로써 덥쳐 죽였다. 그리고 영광 불갑산(佛甲山) 연실봉(蓮實峰)으로 진지를 옮겼는데, 적이 산을 타고 올라오려 하므로 역시 날랜 군사로 덥쳐서 두어 명을 베이니 적이 황급하여 모두 흩어졌다. 이에 의병의 기세가 크게 떨치니 사방에서 모두 고개를 쳐들고 바라며 기대가 컸었다.
드디어 이백겸(李伯謙)으로 하여금 적을 고창(高敞) 석곡(石谷)에서 공격하여 깨뜨리고 군사를 영광 백수(白峀)로 옮기다가 마침내 백겸은 전사했다. 그래서 강필주(姜弼周)로 선봉장을 삼아 장자산(莊子山)에 이르러 적과 대치하고 총뿌리를 겨누다가 필주가 또 전사하니, 대극은 싸우고 후퇴하곤 하여 군사를 장사산(長沙山)에 주둔했다.
이 때에 적은 일변으로 방(榜)을 써 걸어 현상하고 대극의 수급(首級)을 구하며, 일변으로 간첩을 시켜 돈을 써 가며 대극의 행동을 염탐하니, 대극은 고립된 이 때에 위기일발의 지경에 직면했다. 대극은 미쳐 알지 못하고 밤이 깊어 바야흐로 잠이 들었는데 악독한 손길이 갑자기 뻗쳐 칼을 맞아 시체로 장막 속에 남게 되었으니, 곧 기유(己酉)년 4월 3일이었다. 아! 이제 희망이 끊어졌다.
온 군중이 부르짖고 우는 바람에 청산이 찢어지는 듯하고 물소리가 목 맺치는 듯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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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솔할 사람이 없어서 마침내 모두 흩어지고 말았으니 당시 의병의 소리도 이로써 종식되었다. 하늘이 장군을 내어 용맹이 무리에 뛰어나서 여러 번 적의 세력을 꺾었는데, 불행히 중도에 적의 술책에 빠졌으니 하느님의 뜻 아득만하여 알 수가 없다. 의병을 일으켜 여러 해 동안에 몸소 군사들 앞에 서서 용감하게 싸워 번갯불과 같이 동으로 번쩍이고 서로 번쩍이니 적이 그 위엄에 떨어 감히 정면으로 공격해 오지 못했다. 이 어찌 용이한 일이냐? 그 우뚝한 의기와 늠름한 절개는 천추에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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