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순절한 사람들 ]

高 山 芝 2011. 5. 25. 18:49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1.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순절한 사람들 - 광주 포충사
입력시간 : 2010. 12.01. 00:00


포충사
왜군을 물리친 주인공은 卒이다

유팽로·안영·고인후, 장군과 마지막 운명

"장군이 후세 기억되는 것은 부하들 때문"

광주시 남구에 있는 포충사를 간다. 포충사는 의병장 고경명을 기리기 위하여 1601년에 건립되고 1603년에 선조임금의 사액을 받은 사당이다.

포충사 사당 앞에 선다. 거기에는 고경명의 영정이 있다. 온후한 모습이다. 영정 아래 중앙에는 고경명의 신위가 있고 동쪽에 고종후(1554∼1593)와 유팽로(1564∼1592), 서쪽에 고인후(1561∼1592)와 안영(1565-1592)의 신위가 있다.

1592년 7월10일, 고경명은 금산전투에서 안영·유팽로와 함께 순절한다. '연려실기술'에서 그 날의 기록을 다시 읽어보자.



고경명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말 타는 데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하게도 싸움에서 패하면 오직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아나기를 청하니, 경명이 말하기를, “내 어찌 구차스럽게 죽음을 모면하려 할 것이냐” 하였다. 부하들이 붙들어 말에 태웠으나 금방 말에서 떨어지고 말이 달아나 버리니 부하인 유생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경명에게 말을 주고 도보로 따라갔다.

왜적이 고경명에게 급하게 달려들었다. 그때 유팽로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 하인에게, “대장이 피하였느냐?”라고 물으니, “아직 못나왔습니다” 하였다. 팽로가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가니, 경명이 팽로를 보고, “나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달려 나가거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남과 군사(軍事)를 도모하다가 군대가 패하면 거기에 죽는 것이 도리입니다” 하였다. 적의 칼이 드디어 다가오니 팽로가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웠다. 경명이 드디어 유팽로·안영등과 함께 죽었다.



순절 당시 고경명은 60세이었고 유팽로는 29세, 안영은 28세이었다. 고경명 순절시 내내 함께 한 사람은 안영이고 유팽로는 다시 돌아와서 순절을 맞았다. 안방준이 쓴 '은봉전서'의 호남의록을 보면 유팽로가 고경명을 구하려 다시 적진으로 갈 때에 하인이 말을 끌어당기며 가지 말라고 읍소하였다 한다. 그때 유팽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하인의 손목을 베니 하인은 부득이 말고삐를 놓고 뒤따랐다. 참, 드라마틱한 이야기이다.
영정


다섯 분의 신위 앞에서 묵념을 하였다. 요즘처럼 나라가 어려울 때 일수록 국난을 극복한 의로운 분들이 더욱 생각난다.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분은 고종후를 제외한 고경명 등 네 분이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는 1593년 6월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그러면 유팽로와 안영 그리고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에 대하여 알아보자.

유팽로는 옥과(지금의 곡성군 옥과면) 사람으로 성균관 학유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와 담양에서 이종 간인 남원출신 양대박과 함께 고경명을 만나 창의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는 피난민 5백여 명과 하인들 1백 명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여 고경명의 막좌가 되었다.

그는 고경명에게 제갈량과 같은 책사이었으나 눈이 애꾸인데다가 용모도 볼품이 없어 주변의 장수들이 그를 업신여기었다. 안방준은 '은봉전서'에서 유팽로가 금산 전투에 임하면서 “금산의 왜적은 그 무리가 수 만 명이니 우리의 군사로는 대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여러 군사들이 힘을 합쳐 험난한 요새를 점거하고, 적이 교만에 빠져 태만해지기를 기다려 정예병을 선발하여 사방에서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간언을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신위는 금산군 종용사에도 있고, 곡성군 옥과면에는 정렬각이 세워져 있다.

안영은 남원 사람으로 기묘명현 안처순의 증손자이고 청백리 이후백의 외손자이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공부는 주로 백부 안창국이 가르쳤다. 그는 스무 살에 고암 양자징의 딸과 결혼하였다. 양자징은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아들이고 김인후의 사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는 서울의 친정에 있었다. 안영은 모친을 찾아 서울로 가려는 데 난리 통에 길이 막히어 버렸다. 그는 유팽로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고경명을 찾아가 고경명의 종사관이 되었다. 안영은 고경명을 시종 모시면서 죽음도 그와 함께 하였다. 금산 전투 후에 왜적들이 물러나자 그의 백부가 의승군의 조력으로 안영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가 찼던 칼의 칼집에는 성(姓)이 전자로 새겨져 있었고 허리 사이의 비단 주머니에는 충효 두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비단 주머니 글씨는 부인 양씨가 수놓은 것이었다. 그의 신위는 금산 종용사와 전북 남원시 주생면 의 정충사에 모시어져 있다.

고인후는 158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급제의 정도로 보아 홍문관이나 한림원에 배치하여야 하는 데 당시에 고경명이 미움을 받던 터라 성균관 학유로 근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와 형님과 함께 최전선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금산 전투 때에도 그는 왜적의 총탄을 무릅쓰고 군사들을 재정비하여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은 단지 유팽로, 안영, 고인후 뿐만 아니다. '호남절의록'에는 고경명과 함께 순절한 20여명의 의병들 명단이 적혀있다. 즉 김덕홍, 이억수, 최응룡·최영수 부자, 김신문, 채희연, 최후립·최홍립 형제, 박광조·박광종 형제, 양정연, 김봉학, 정귀세, 강염, 고훈, 박언신, 이인우, 조효원, 신건, 박응주, 고몽룡, 하정, 전용관, 김세근이다.

그러면 이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김덕홍은 의병장 김덕령의 형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 덕령, 덕보와 함께 광주에서 살았다. 임진왜란 때에 동생 덕령과 함께 고경명 휘하에 의병으로 참여하였는데, 전주에 이르러 전세가 위급하여지자 덕홍은 덕령에게 말하기를 “이 적을 없애지 못하면 나는 살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늙으신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데 형제가 함께 죽을 수는 없으니 너는 돌아가 노모를 봉양하여라.”하였다. 마침내 혼자서 싸워 순절하였다.

이억수는 남원사람으로서 1588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을 지냈다. 금산 전투에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순절하였는데 그 때 나이 29세였다. 최응룡은 남평 사람으로서 아들 최영수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순절하였다. 김신문은 정읍 출신으로 하인들과 함께 참전하였다. 그는 고경명이 아직 적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 적진에 들어갔다가 순절하였다. 채희연은 남원 사람으로서 파란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적진을 누비었다. 그는 왜적 수 십 명을 베었으나 순절하고 말았다.

최후립은 남평, 최홍립은 광주 사람으로서 형제간 이었다. 최후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유서를 써서 주었다. 그 유서에는 “임금께서 피난하시었는데 나는 대대로 녹훈을 받은 신하의 후예로서 어찌 국난에 나서지 않을 것인가. 오직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최홍립도 형 후립과 함께 적 여러 명을 베었으나 힘이 다하여 순절하였다.

무안 사람 박광조는 아우 박광종과 함께 의병을 모아 고경명 군에 합류하여 함께 전사하였다.

양정언은 남원 사람으로 양덕현감을 지냈는데 항상 사졸의 선두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순창 출신 김봉학은 나이 78세에 의병으로 나서서 적진에서 죽었다.

정귀세는 광주 출신으로 훈련원 봉사로서 고경명을 따라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순절하였다.

장성 출신 강염은 의병 70명을 모아 참여하였고 조방장을 맡았다. 전투에서 적을 무수히 죽이었으나 그 또한 죽었다.

고훈은 능주 출신으로 최일선에서 적을 많이 죽였으나 총탄에 맞아 죽었다.

광주 출신 박언신, 영광 사람 이인우, 창평 출신 조효원도 참전하여 순절하였다.

신건은 광주 사람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첨사를 지냈으며 여러 의병들을 독려하다가 총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함평 출신 박응주, 해남출신 고몽룡, 광주사람 하정도 힘껏 싸웠으나 힘이 다하여 적의 칼에 죽었다.

전용관은 옥구 사람으로 태인에서 고경명 군과 합류하였는데 순절하였다. 김세근은 광주 사람으로 서구 서창동 백마산 수련곡에서 훈련시킨 장정 3백 여 명을 이끌고 의병으로 참전하여 순절하였다.

그런데 포충사 사당 안을 둘러보아도 이 분들의 신위를 찾아 볼 수 없다. 충남 금산 종용사에는 막좌와 사졸의 신위가 있었는데. 사당 경내를 둘러보아도 막좌와 사졸에 대한 추모비를 찾아 볼 수 없다. 이 점이 너무 아쉽다. 역사에서 우리는 장군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 장군이 기억되는 것은 그와 함께 싸운 부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막좌·사졸들도 추모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22. 고종후, 아버지 고경명 시신 수습 후 복수의병장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