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스크랩] 고경명 선생비각 (충남 금산군)

高 山 芝 2011. 6. 20. 14:18

일제에 의해 파괴된 비각을 모아 보존하고 있다.
위    치 : 충남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산 70 
홈페이지 : 금산군청   www.geumsan.go.kr 
연 락 처 : 금산군청 문화공보관광과 041-750-2391
개    요 : (문화재자료 제28호)
           임진왜란 때 금산에 주둔한 왜적을 유인하여 금성면 파초리 눈벌싸움에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제봉 고경명 선생의 순절비이다.  전라도 출신의 의병장인 고경명의 순절비가 여기
           에 세워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40년 일본경찰의 만행으로 비가 파괴된 것을 한식비각안에 정리하여 2002년에 복원하였고 1962년 후손들이 여필문의 비문을 다시 새겨 그 비를 1962년에 새워진 석조비각안에 보존하였다.> 본래 고경명선생은 고향인 장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더욱이 임금인 선조가 파천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격분함을 참지 못한 선생은, 큰 아들 종후와 여주인 김천일, 담양부학유 유팽 노 등을 찾아 상의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금산의 왜적을 향하여 적정을 수색하는 한 편, 충청 의병장 조헌에게 서신을 보내서 같이 평강을 건너 금산의 왜적을 칠 것을 약속하 였다.
후손들이 비각의 비문을 다시 새겨 보존하고 있다.
이 때 진산에 이르자, 왜병이 전주로 진군 하려고 진산에 오는것을 맞아 접전끝에 왜 적을 물리쳤다.이에 왜군은 서서히 후퇴하 여 금산성으로 돌아가 수세를 취하였다. 임진년 7월 9일 새벽에 작전계획을 세우고 곽영의 군은 북문을 담당하여 공격하고 고 경명 군은 서문을 담당하여 공격하였다.북 문에서 승리한 왜군이 후방에서 고경명 군 을 공격하니, 앞 뒤로 적을 대항해 싸우게 된 고경명군은 후방의 왜군을 쫓아 눈벌에 서 왜군에 포위당하고, 전군이 순절하였다. 고경명 군의 거병 보고를들은 선조는 공조 참의라는 관직을 하사하고 초토사라는 겸 관을 전지하였으며,순절한 소식을 듣고 애 통하게 생각하여 사우를 광주에 세워 액호 를m 포충사라 하고 배향케 한 다음 금산의 종용사에도 배향케하여 그 충의를 기억하 도록했다. 조선 17대 효종 27년에 당시 군수 여필관 이 순절비를 세운 것을 일제 때 없애 버렸 으나,해방후 후손들이 다시 세우고 1964년 비각을 건립했다. 교통안내 : (자 가 용) + 경부고속도로 -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금산IC + 호남고속도로 - 대전 남부순환 고속국도 - 대전-통영간 고속국도 - 금산IC (대중교통) + 서울강남터미널 - 금산(06:30∼18:30, 1시간 30분간격, 2시간 40분 소요) + 대전 - 금산(06:00∼22:00, 수시운행, 동부터미널에서 50분 소요) 현지교통 : 금산에서 금성 방면 시내버스 수시운행 현지숙박 : 먹을거리 : 금성면 주변에 한우고기, 삼계탕, 인삼한정식 특 산 품 : 인삼, 약초 정보제공자 : 금산군청 문화공보관광과 (041-750-2419, matthewechae@hanmir.com)
 작성기준일   2006년 06월21 일

   * 현지사정에 따라 정보가 변경될 수 있으므로 필요한 사항을 사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1952년에 일제에의해 훼손된 것을 군민의 성금을 모아 복원된 종용사

 

출처 : 창평 유천사랑
글쓴이 : 고거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