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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호남의병의 계보와 사상 - 고광순 의병활동의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高 山 芝 2011. 6. 20. 21:48

한말 호남의병의 계보와 사상 

-고광순 의병활동의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 

 

홍 순 권(동아대학교 교수) 

 

1.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발생 원인과 특징 

 

한말의 의병운동은 크게 두 시기에 일어났다. 첫 번째 의병운동은 1895년 일제에 의한 민비 시해와 단발령의 공포가 그 배경이 되었고, 두 번째는 러일전쟁의 발발과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에 이은 일제의 국권침탈이 그 배경이었다. 호남지역에서도 이 두 시기에 의병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첫 번째 시기인 ‘을미의병운동’ 때는 장성의 奇宇萬이 1896년 음력 정월에 먼저 의병을 일으켜 나주와 광주 일대의 의병세력이 호응하였고, 두 번째 시기인 후기 의병운동 당시에는 1906년 6월 최익현이 남원에 내려와 의병을 일으킨 이후 호남 각지에서 의병세력이 일어나 1910년 일제의 강점 때까지 그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특히 1909년 가을 일제가 호남의 의병세력을 말살하기 위하여 이른바 ‘남한대토벌’을 벌이기 전 1908년과 1909년 호남지역은 의병전쟁의 격전장으로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의병세력이 결집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린 곳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말 호남지역은 의병운동의 중심지이면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지역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첫째는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호남지역은 개항 이후 외세의 침탈로 인한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이다. 당시 호남지역은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로서 개항 이후 일본으로 막대한 양의 쌀이 유출되어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 집중되었던 곳이며, 또 일본인들의 토지침탈이 가장 일찍부터 성행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원인이 되어 호남지역은 1894년 농민전쟁의 진원지가 되었고, 그 뒤 10여 년이 지나 다시 대규모의 의병투쟁의 격전장이 되었다. 

두 번째, 호남지역이 의병운동의 중심지가 된 데는 이러한 경제적 요인도 있었지만, 호남지역의 사상 문화적인 특수성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호남지역이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 유학의 일대 사조를 이룬 ‘척사위정사상’의 발원지인 동시에 이를 배경으로 지방의 유림세력이 강력한 지역적 연대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정진에서 기우만으로 이어지는 척사파 유생들이 전・후기 의병운동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향교를 중심으로 강한 지역적 연대망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연대망은 의병운동의 확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세 번째, 호남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전통적으로 반일적 지역정서가 강하였다. 역사적으로 호남지역은 임진왜란의 격전지로서 의병활동 또한 활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반일적 지역정서는 호남지역의 민중들이 의병으로 동원되는 데도 큰 정신적 작용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결합되어 일어난 호남지역의 첫 번째 의병운동은 당시 호남 유생의 지도자격이었던 기우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그러나 1896년에 일어난 이 의병운동은 충청도나 경상도의 의병운동과 비교해 보면 당시 정세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으며, 또 호남 전역으로 확산된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의병진 내부의 한계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1894년의 농민전쟁의 여파가 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호남지역에서 의병운동이 크게 발전한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부터 ‘병합’ 직전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 중에 호남지역에서 의병이 봉기하지 않은 고을이 없었을 정도로 호남 전역이 의병전쟁의 전장터가 되었다. 전쟁 중 목숨을 잃은 의병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일본경찰이 ‘남한대토벌’의 성적이라고 해서 내놓은 전과 기록표를 보면, 사자 420명, 체포 또는 자수자 1,687명, 체포된 주요 ‘수괴’ 26명, 살육한 주요 수괴 수십 명 등이었다. 이는 불과 2개월간의 전황을 경찰만의 집계로 발표한 것이니, 의병전쟁 전 시기동안의 실제 참여자와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의병 참여자의 규모로 보나, 투쟁의 강도와 지속성으로 보나,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대중적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일제가 주장하듯이 ‘정치운동적’ 성격으로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실제 일제가 ‘수괴’로 분류한 의병 지도층 가운데는 유생뿐만 아니라, 농민, 소상인 등 일반 평민들도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또한 호남지역의 유생들이 의병운동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또 다른 특수한 측면이 있다. 

요컨대, 후기의병에서도 전기의병에서와 마찬가지로 호남지역의 의병투쟁을 촉발시킨 것은 장성의 기우만의 영향하에 있었거나 그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던 인근의 호남 유생들이었다. 그러한 유생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인물로 高光洵과 奇參衍이 있었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호남지역에서의 대규모적인 의병투쟁의 전개는 이들의 선구적인 의병봉기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즉, 뒤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에 이름을 떨친 金容球, 金泰元, 沈南一, 全海山, 李錫庸, 李大克 등의 유생의병장 등이 그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심남일과 전해산은 호남의 중부와 서남부 지역을 무대로 1909년 말까지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2. 호남지역 유생 의병의 학맥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은 무엇이었을까, 즉 어떠한 사상과 이념이 한말의 호남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항일투쟁에 나서게 하였는가? 이 점을 간단히 한 마디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호남의병은 어떠한 특정한 이념적 집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매우 다양한 사회계층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는 유생도 있었고, 동학의 영향을 받았을 농민층도 있었으며, 또 일부 해산군인도 가담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 여러 사회집단 내지 사회계층 가운데 비교적 뚜렷하게 그 이념과 사상을 적출해 볼 수 있는 집단이 바로 유생층이며, 이 유생층이 전 시기에 걸쳐 호남지역 의병운동에 사상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한말의 의병, 특히 유생 의병들에게 절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은 한마디로 ‘척사위정사상’이다. 이 점에서는 호남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척사사상은 18세기 말 이후 동세서점으로 일컬어지는 서양세력의 침투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발생하여 華西 李恒老와 盧沙 奇正鎭에 이르러 이론적 체계가 세워지고, 이후 이들 두 학파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화서와 노사는 주자학에 대한 이해방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서양세력을 ‘正學’에 기초한 조선=화(華)의 기존질서와 가치를 위협하는 침략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유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이론의 현실 적용과 사회적 실천운동에 더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화서의 척사사상은 주로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최익현, 유중교, 김평묵, 유인석 등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에 걸친 학맥을 형성하였던 반면, 노사는 호남의 장성에 근거지를 두고 가학으로 계승되어 손자인 기우만에 이르면서 호남일대에 영향력 있는 학맥을 형성하였다.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에는 이 두 계열의 척사사상이 모두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만, 보다 주류적인 것은 후자였다. 

먼저 1896년 호남의 의병봉기를 보면 기우만의 영향이 뚜렷하였다. 이 때 기우만이 장성에서 거의하자 장성 인근 호남 중부의 유생들이 호응하였고, 이는 또 李鶴相을 중심으로 한 나주의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장성의 기우만 의병진은 봉기 이후 곧 해산하였다. 그러나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호남의 유생들은 이에 적극 호응한 것을 보면, 그의 명망과 호남 유생층 내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보면 또 당시 나주의 유생들을 포함하여 호남의 유생들이 많건 적건 학맥상으로든 지역적 연고로든 노사학파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때 기우만의 의병봉기에 참여한 주요 인물 가운데는 기우만의 족친인 기삼연을 비롯하여 고광진 등이 있었으니, 1905년 이후 일어난 의병봉기의 연원도 한편으로는 1896년 기우만의 의병봉기에 닿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 전후반에 걸쳐 호남지역의 호남의 유림계에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노사학파의 경우는 문도 가운데 출사하여 이름을 얻은 사람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근왕세력과의 연계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 점 또한 화서학파와는 다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노사학파의 의병운동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지역적 연고에 강한 기반을 두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우만은 그의 조부적 명망과 가문의 탓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한말 호남지역 유림계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요컨대 사회적 실천을 그 특징으로 하는 노사의 척사사상은 그의 손자인 기우만으로 계승되어 호남지역의 특수한 사정과 결합하여 한말 의병운동으로 발현되었던 것이다. 

이즈음 고광순도 기우만으로부터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광순 스스로 “松沙(기우만)는 사림의 영수요. 사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이미 상소한 글이 있고 이어서 창의한 바 있으니,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가 그의 지도를 받기를 원하지 않겠는가”([通告列邑文]) 라고 한 것이나, “기우만은 고참판인 臣 정진의 후손으로 가훈을 지키며 학덕을 이루니 선비들의 領袖로서 泰山北斗처럼 우러러 바라보았습니다”([丙申疏]) 라고 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1907년 4월 능주를 공격한 梁會一도 의병봉기를 계획하기에 앞서 송사 기우만을 찾아가 상의한 것을 보면, 호남지역의 많은 유생들이 기우만의 지도력을 인정하는 분위기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뒤에 봉기한 의병들 가운데서는 일찍부터 기우만의 문하이거나 학문적으로 그와 인연을 맺고 있거나 또는 그를 존경하던 유생들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1907년 가을 기삼연의 장성 봉기에 가담했던 인물 가운데는 기우만의 문하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 있었으며, 전해산을 대장으로 하는 호남동의단의 일원이었던 金永曄은 그러한 인물 중 하나였다.  

이들과는 달리 의병장 이석용은 당시 전주의 유학자 艮齋 田愚의 강론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우 자신은 의병운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호남지역 의병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최익현을 또 빼놓을 수 없는데, 그는 호남지역에서 거의 하기 이전에 이미 조정의 대신으로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여러 각도에서 호남의 유생들에게 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최익현이 1906년 호남으로 내려와 거의를 계획하자 호남의 많은 유생들이 이에 호응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때 최익현의 거의에 직접 참여한 호남 유림의 주요 인물로는 이른바 ‘淳昌 12義士’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사승관계가 비교적 분명한 인물은 <<勉庵先生倡義顚未>>을 쓴 崔濟學과 高石鎭 등이고, 나머지 인물은 의병봉기를 통해 최익현과 인연이 맺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때 최익현의 거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전북 유생들과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실제 의병 규합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任炳瓚이었다.  

임병찬은 이족 출신이었으며, 그 역시 최익현과의 관계는 의병봉기를 통해서 처음 맺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그가 ‘호남 거의’ 이전에 호남의 유생들과 어떠한 관계를 지니고 있어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드는 바가 있다. 

이외에 梁允淑이 유생 출신으로서 최익현 봉기 실패에 직접 영향을 받고 의병을 일으켰다. 참고로 최익현 등이 거의를 준비하면서 작성한 [동맹록]에는 기우만도 등재되어 있으나 그가 봉기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익산의 전 중추원 의관 李琪榮의 장남인 李圭弘은 최익현의 거의 준비소식을 듣고 이에 가담하기 위해 태인으로 가 최익현과 임병찬을 방문하였고, 임병찬과는 사제의 의를 맺었다고 한다. 이석용도 최익현의 거의 준비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 방문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거의에는 참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편 보성의 유생 李白來 등도 최익현의 거의에 호응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거의를 준비하였으나, 임병찬과의 알력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 이백래는 유생 梁會一과 함께 1907년 4월에 거의하였는데, 그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臨戰日錄>>에는 이백래의 거의에 참여한 유생 대부분이 면암 최익현 또는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면암의 문인 가운데는 이백래, 양회일, 白景寅, 李光彦(居 河東), 盧鉉在 등이 있었고, 또 李敎文, 梁烈黙 등은 노사의 문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기삼연 의병진을 이어 1908~1909년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핵심적 역량이었던 심남일, 전해산, 安贊在, 林昌模 등에 대해서는 참여사실만 있고, 학연관계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대체로 의병운동에 가담했던 호남의 유생들 가운데 최익현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주로 1907년 가을 기삼연의 의병봉기가 있기 이전의 인물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실제의 사제관계나 동문으로서 학문적 교류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로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최익현의 오른팔로 끝까지 최익현을 보좌했던 임병찬조차도 거의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최익현과 사제관계를 맺었을 뿐이다. 최익현은 호남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전국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그를 따르는 인물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그 점이 그가 호남지역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호남으로 내려와 봉기할 수 있었던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3. 호남의병의 사상적 배경과 고광순의 의병사상 

 

호남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던 정신적 바탕에는 ‘倭洋一體’라는 당시의 국제정세 인식과 ‘소중한 의식’으로 표현되는 민족적 자존의식이 있었다. 이는 한말 척사위정사상에 공통된 내용으로, 주자학적 세계관을 그 절대적 정신가치로 인정하면서, 이에 어긋나는 그 어떤 사상도 용납하지 않은 이른바 ‘正學’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다. 명의 멸망 이후 조선의 유생들은 청의 정통성을 부정하면서 조선이 곧 명을 대신할 작은 중화라는 인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인식은 자신들이 정학을 계승한 진정한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문화적 자존의식에서 싹튼 것이기도 하다. 19세기 들어와 조선 연안에 이양선이 출몰하고 서양의 중국 침략으로 위기의식이 높아지면, 소중화(小中華) 의식은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과 결합되어, ‘이단세력인 서양을 물리친다’는 척사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개항 이후에는 이러한 이단세력으로 일본이 추가되었고, 그것은 곧 왜양일체사상으로 발전하여, 반일의병투쟁의 명분이 되었다. 

척사사상은 대외적으로는 침략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강조하지만, 내부적으로 유교(정학)적인 가치관과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위정사상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철저한 신분제적 질서를 옹호하면서 개화(근대 개혁)를 반대하는 보수적 봉건이데올로기로서의 한계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척사파 유생들의 사상적 한계는 시기적으로는 을미의병운동 때, 계층적으로 명문의 유생의병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점은 고광순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고광순의 학문세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그는 외조부의 교육을 받고 그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외조부인 黃洲 金京燦은 晴峰 高光秀의 고조부인 高時民의 처조카이며, 따라서 고시민은 김경찬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고광순은 또 과거에 시도하였으나 당시 민비의 심복으로 세력가였던 민응식의 행태에 실망하여 낙향한 후 과거를 포기하였다. 이로써 보면, 학문을 통한 현달보다는 당시의 현실과 정세 변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비판적 지식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실은 “외향에 나가 학문을 닦기도 하시고 마을 글방에서 독서하여 스승의 교훈 없이 스스로 공부에 부지런하였고, 입과 귀를 괴롭게 하여 서책을 열람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아름답게 쓰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행장]) 라고 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고광순 또한 의병운동에 참여한 다른 유생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현실인식은 철저히 척사위정사상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점은 그가 올린 상소에서 “대체적으로 요즈음 고을에는 東匪와 商人들이니 邪正이 이미 판단되고, 조정에는 수구와 개화이니 사정이 스스로 분별되는 것이다.”([병신소]) 라고 한 것이나 그가 쓴 격문에서 “올바른 학문(正學)이 밝지 못하고 사특한 학설(學說)이 날로 성행한 것은 그 근원을 일찍 막지 못한 것이니 그 책임이 어찌 우리 선비들에게 없다고 할 것인가”([檄文 其三]) 라는 데서 알 수 있다. 그 결과 그는 현실의 위기가 “사람이 가히 금수가 되어야 할 것인가.(以人可獸乎)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었으며, 동방예의 조선나라가 오랑캐가 되어야 할 것인가?(華而乎)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몸을 보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최근 우리들의 의복까지 개혁되고 있으니 우리들은 피가 끓어오르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 정세를 되돌아보면 북두성 같은 중신들이 흉적들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으며 궁중에 있는 근신(近臣)들은 외국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으니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은 경각에 달려있고 임금은 헤아릴 수 없는 처지”([附禮安答通])에 이르렀다고 파악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이러한 외부로부터 위기가 곧 내부적 위기인 民生의 위기, 나아가 향촌사회의 위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즉, 그는 상소문에서 “향리에 돌아와 인심을 보니 감당하기 어려운 役은 마치 살을 깎아내고 뼈를 방망이질 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시달리는 백성들의 한탄이 날로 극심하였습니다.”([병신소]) 라고 당시 농촌이 경제적으로 피폐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토로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척사의식이 그만큼 안팎으로 철저하게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광순이 내외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邪說의 근원은 다름 아닌 서양이라는 외세이며, 그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개화세력이었다. 때문에 그는 을미의병의 여파와 아관파천으로 당시 친일개화파 정권이 무너진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관파천도 결국은 또 다른 외세인 러시아와 친러 개화파를 불러들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盧鍾龍이 쓴 [약전]에 “공은 창평향교에 돌아와 상소문을 썼는데 그 내용을 요약한다면 開化二字는 중국을 단절하고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인간으로 하여금 짐승 되자는 것에 불과하다.” 라고 한 것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화에 대한 반대의식은 대단히 철저하여 임금의 綸音에 대해서도 의병을 해산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이 점은 기우만이 고종의 해산 윤음을 받고 곧바로 해산한 것과도 대비된다. 

 

특히 고광순의 척사의식은 그의 가문에 대한 자긍심과 결합하여 더욱 더 실천적인 형태로 전환되어 나타나게 된다. 

호남지역의 대부분 유생의병들도 고광순과 마찬가지로 척사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러나 1907년을 지나면서 호남의 유생의병들에게는 을미의병운동 때나 종전의 척사파 유생들의 경우와는 달리 사상적으로 다소간의 변화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의병진 내의 신분관계에 대해서 보다 유연한 태도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또 서양과 일본을 단순히 동일시하던 사고방식을 벗어나, 서양에 대해서는 보다 온건한 태도를 보이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더욱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적에 대하여 이른바 ‘전략적 선택’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대응이라면 대응이고, 차이라면 차이랄 수 있다. 이밖에도, 여전히 소중화 의식과 충군애국사상에 매여 있으면서도 우리 민족이 단군의 한 자손임을 강조하는 등 민족의식이 강조되는 측면도 보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인민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등 근대적 국가의식도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호남의 유생들 가운데는 고씨 문중의 경우처럼 계몽운동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호남 유생의 주류는 번개화의 척사적 태도를 고수하여 의병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영남지방과는 달리 의병운동에서 계몽운동으로 전환해간 예는 그다지 많이 발전하지는 않는다. 

호남지역의 유생의병은 사상적으로 척사사상에 강한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내면적으로 다소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근본적인 이탈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의 유생들은 의병운동을 유생들의 독자적 역량으로만 발전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다. 1908~1909년 호남의 의병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많은 유생의병들이 평민의병과 결합하여 의병운동을 민중봉기의 형태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또 ‘유생’이냐 ‘평민’이냐를 떠나 전반적으로 의병운동을 고무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적지 않은 평민의병장들이 의병운동의 이니셔티브를 쥐게 되었고, 전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호남지역 유생의병들이 척사적 의식의 한계는 지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말 의병운동 전과정을 놓고 볼 때는 그들이 의병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통해 반일투쟁을 더욱 고양시키고, 더 나아가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 및 호남 유생들의 의병 참여가 지닌 역사적 의의가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