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성지순례 영상수필

성지순례 영상수필 - 트로이 - 1

高 山 芝 2012. 7. 24. 11:30

트로이 발견 * 브리태니커

슐리만이 발굴을 시작하기 전에도 산발적인 발견이 있기는 했지만, 선사시대 그리스 고고학의 창시자는 슐리만이라 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일컬어져왔다. 프랑스 지질학자 페르디낭 푸케는 1862년 산토린 섬을 발굴하고 8m 두께의 부석층 아래에서 프레스코로 장식된 가옥의 벽과 칠무늬토기[彩色土器]를 발견한 바 있다. 이와 같이 부석이 두껍게 깔린 것은 원래의 산토린 섬을 테라(지금의 티라)와 테라시스(지금의 티라시스)로 나누어버린 화산의 대폭발 때문이었다. 당시의 지질학자들은 산토린 섬의 화산 폭발 시기를 BC 2000년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푸케가 발굴한 유물이 매우 오래된 것이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선사문화가 에게 해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1871년 슐리만은 히사를리크에서 발굴작업을 했던 영국 고고학자 프레더릭 캘버트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 거대한 인공 마운드를 발굴했다. 그는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이 마운드의 가장 아래층에 있다고 믿고 무작정 아래로 파내려갔다. 1873년에는 매우 오래된 어떤 도시의 요새와 유적지에 도달하여 황금 보물을 발견했고 이를 투르크에서 밀반출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도시가 호메로스의 트로이이며, 그 보물은 프리암의 보물이라고 믿었다. 슐리만의 발견과 주장이 처음 제시된 〈고대 트로이 Trojanische Altertümer〉(1874)는 많은 학자의 회의어린 시선을 받았지만, 고전학자이기도 했던 영국의 총리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을 비롯한 학자들과 많은 독자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874년 2월 슐리만은 히사를리크에서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그가 밀반출한 유물, 특히 황금 보물의 분배 문제를 놓고 오스만 정부와 소송이 일어나 약 2년 동안 작업을 계속하지 못했다(1876년 4월이 되어서야 작업 재개를 허가받음). 한편 이 지체기간 중 슐리만은 히사를리크 대신 보이오티아의 오르코메노스에서 미니아의 보물 유적지를 팠지만 아름다운 천장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그는 또 이 기간에 〈트로이와 그 유적 Troja und seine Ruinen〉(1875)을 출간했으며 미케네 발굴도 시작했다. 1876년 8월에는 톨로스 묘의 발굴작업을 시작해 사자문 일대에 이어 성벽 안쪽을 팠다. 이곳에서 그는 이중원형 석렬을 발견했는데, 석렬 내부에는 5개의 구덩식[竪穴式] 무덤이 있었다(6번째 무덤은 그가 이곳을 떠난 직후 발견됨). 이 원형으로 배치된 무덤떼에서 그는 16구의 시신과 금·은·청동·상아로 된 많은 보물을 발견했다. 그는 이것이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의 무덤이기를 기대했고, 또 그렇게 믿었으며 발굴 결과를 〈미케네 Mykenä〉(1878)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색인 : 아트레우스의 보고)

1878년 이타카 발굴이 실패로 끝난 뒤 같은 해 히사를리크 발굴을 다시 시작했다. 1882~83년에는 3차 트로이 발굴, 1888년부터 죽을 때까지 4차 발굴을 실시했다. 1878년의 첫 발굴에서는 슐리만과 아내 소피아만이 참여했으나, 1879년 발굴에서는 고전 고고학자 에밀 뷔르누프와 저명한 독일의 병리학자 루돌프 피르호의 도움을 받았다. 피르호는 '독일인류·민족·선사학회'를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마지막 2년의 발굴에서 슐리만은 경험이 풍부한 건축가로서 독일의 올림피아 발굴에 참여한 적이 있는 빌헬름 되르펠트의 노련한 도움을 받았다. 되르펠트는 그리스에서 작업중이던 독일 고전 고고학자들의 새로운 방식과 효율성을 트로이 발굴작업에 적용해 트로이 유적의 층위를 이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밝혔고 슐리만의 발굴기법에 혁신을 일으켰다. 1884년 슐리만은 되르펠트와 함께 미케네 가까이에 있는 대요새 유적인 티린스를 발굴했다. 만년에는 귓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유럽의 전문의를 찾기도 했지만 이를 고치지 못했다. 그는 심한 괴로움 속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1890년 12월 25일 나폴리의 한 광장을 가로질러가다 쓰러져 다음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