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성지순례 영상수필

성지순례 영상수필 - 폼페이 유적지 - 5

高 山 芝 2012. 11. 13. 17:14

폼페이가 유럽 문화에 끼친 영향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와 다른 도시의 발견은 유럽인의 취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발굴 소식은 고대에 대한 열광을 불러일으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755년 나폴리로 첫 여행을 했던 저명한 독일의 고전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찬사와 잠바티스타 피라네시의 에칭들이 발굴을 널리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영국 방문객들의 '대유럽 여행'에서 나폴리·폼페이·헤르쿨라네움은 중요한 체재지가 되었으며, 당시 나폴리 왕실의 대사(1764~1800)로 있던 윌리엄 해밀턴 경은 박식한 아마추어 고고학자 겸 열정적인 안내자로서, 또 그의 2번째 부인인 엠마 해밀턴 여사는 매혹적인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미술가·건축가·도예가, 심지어 가구제조업자들까지 폼페이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동시대의 내부 채색 장식은 발굴된 프레스코에서 착안되었다. 18세기 영국 건축가들인 로버트 애덤과 제임스 애덤은 비슷한 주조(主調)의 회반죽칠을 유행시켰다. 유명한 도예가 조시아 웨지우드는 작품 양식을 바꾸는 한편, 폼페이가 에트루리아인의 도시였던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자신의 도자기 공장을 '에트루리아'라고 이름지었다. 프랑스에서는 폼페이 양식과 결합된 루이 16세 양식으로 퐁텐블로 궁전에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방들이 장식되었고, 이 양식은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와 그의 제자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도 발굴에서 작품을 위한 영감을 얻었다. 실제로 폼페이 발굴이 자극한 신고전주의 양식은 로코코 양식을 대신하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예술 양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