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수필 - 앙코르왓 여행기

프롤로그 - 캄보디아의 역사

高 山 芝 2013. 12. 2. 13:24

 

 왕국 이전 시대

 

풍성한 메콩 강이 휘감아 도는 덕분에 물이 많고 드넓은 평지를 가져 인류 정착은 대단히 이른, 기원전 4000년 경으로 짐작한다. 인도와 중국의 사이라는 지형적 여건 때문에 무역 루트 상에 들어 있어 양국의 영향을 고루 받았다. 전반적으로는 종교, 언어, 생활 관습의 대부분을 지역적으로 가까운 인도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농경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푸 난 왕국(Fu Nan, 扶南) 시대

 

기원후 1세경 이 땅에 최초로 왕권 통치가 이뤄진다. 푸난 왕국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인도의 브라만(카스트 4계급 중 가장 높은 승려급) 계급의 남자가 바다를 통해 이 땅에 도착, 현지인인 크메르 족 여인과 결혼했으며 그 아들에 의해 푸난 왕국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정치 제도도 인도의 것을 받아 들인 것은 물론 당시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語)가 토착 언어와 융합되어 크메르(Kmer) 어를 탄생시켰고 또 힌두교를 신봉하여 전형적인 힌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푸난 왕국은 바다와 강의 유용성을 일찍이 간파하여 중국과 인도 간의 해상 무역을 통해 크게 번창하였다.

 첸라(Chen La, 眞臘) 왕국 시대

 

6세기 중반. 푸난 북쪽의, 메콩 강 중류 지방에서 같은 크메르 족이 발흥한 작은 왕국이다. 줄곧 푸난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푸난의 쇠퇴에 따라 상대적으로 첸라의 힘이 커졌고 7세기 드디어 통치자였던 푸난을 멸망시켰다. 이후 100여 년 간 부흥을 누리다가 내륙(상)과 바다쪽(하)의, 두 개의 첸라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으나  하 첸라는 곧 멸망하고 상 첸라만 왕국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국력이 쇠진하여 주변국가들의 침범에 시달렸으며 인도네시아에서 세력을 뻗어 온 쟈바 왕국의 대군에게 첸라의 왕은 시해 당하고 충성 맹세를 위해 왕자 한 명(훗날 자야바르만 2세)을 볼모로 잡아 데려갔으며 첸라는 치욕적인 시절을 보내야 했다.   

 

 

 

 앙코르(Angkor) 왕국 시대

     

굴욕의 시절을 보낸 왕자는 795년 귀국하여 쟈바를 쳐 부실 전략을 수립, 성공을 거둬 쟈바 세력을 완전 평정하고 첸라의 모든 땅을 석권한 다음 802년 왕국을 건국, 스스로 왕위에 올라 자야바르만 2세라 칭했다. 이후 600여 년에 걸쳐 인근 국가들을 흡수하여 방대한 영토를 가졌으며 미려한 종교 건축물들을 속속 건립했다. 오늘날 '킬링 필드'라는 수치스런 단어로 장식된 캄보디아가 가장 자랑스런 것을 들라면 바로 그의 후세들이 남긴 앙코르의 종교 예술이라 자부한다.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부강하고 찬란한 예술을 꽃피웠던 앙코르 왕국의 600년.
그 자긍심이 있기에 오랜 외세 통치와 수백만명의 대학살이란 애닳픈 시기를 굳건히 견뎌올 수 있지 않았을까?
앙코르 와트의 신비를 이루기까지 왕대기(王代記)를 조명코자 하지만
앙코르 왕국은 사기(史記) 기록에는 무관심했던 듯
전해오는 기록은 대개 사원에 새겨진 부조나 인근 국가의 사기를 참조한다는 점이 아쉽다.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

802∼850년

자야바르만2 세는원래 하(下) 첸라국의 푸스카락 왕자(Puskarak)로서 쟈바 왕국(인도네시아)의 침공에 패하여 볼모로 잡혀갔다. 굴육의 세월을 보낸뒤 서기 800년에 귀국, 인드라푸라(Indrapura)에 수도를 둔 앙코르 왕국을 건립한 시조이다. 서기 802년, 그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절대적 왕권 수립을 위해 수도를 마헨드라 산(Mahendra Mt., 현재 시엠림 인근의 프놈 꿀렌 산)으로 재천도하면서 쟈바나 챰(베트남) 왕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 왕국의 왕으로 선서하면서 스스로 쉬바 신의 화신(化身)임을 공포하며 천상천하를 다스리는 데바라쟈(Devaraja, 神王)라 칭했다. 이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통치 기반으로 신성통치를 통해 종정일체(宗政一體)를 단시간에 활성화 시킬 수 있었다. 동시에 신격화된 왕의 숭배를 쉬바 신을 모시는 것과 동일시하여 곳곳에 쉬바 신전을 건립했다. 아직 왕국의 기반을 제대로 다지지 못했을 때, 그는 원활한 식량 조달을 위해 세 번에서 다섯 번 정도의 천도(遷都)를 한 것으로 추정하며 마지막으로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 즉 오늘날의 롤루오스(Roluos)로 천도했다. 이곳은 메콩강 지류가 흐르고 드넓은 평야를 갖고 있어 양식 조달에 유익했기 때문인데 그의 결정은 600년 앙코르 왕국의 부를 가져다 주는 반석이 되었다. 그는 이곳을 무척 사랑하였고 훌륭한 왕으로서 업적을 남긴 채 사망했다.

 ▣자야바르만 3세(Jayavarman III)

850∼877년

자야바르만 2세의 아들로서 부왕이 닦아둔 반석 위에 왕국의 명운을 잇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수도는 여전히 하리하랄라야이며 상(上) 첸라국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으며 왕국을 보호했다.

 ▣인드라바르만 1세(Indravarman I)

877∼899년

자야바르만 3세는 후계자가 없어 그의 외가쪽 친척 중 당시 출중한 인물에 용감무쌍하기로 유명했던 인드라바르만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상 첸라국을 제외한, 인근의 영토를 속속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농경을 주 산업으로 하는 그들에게 치수(治水)는 숙원의 사업이었다. 인드라바르만 1세는 치밀한 계획 하에 롤루오스 강물을 끌어들여 인공적으로, 최초의 거대한 저수지
인드라타타카(Indratataka)를 지어 관개수로를 연결, 연중 안심하고 다모작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백성들로부터 진정한 쉬바 신의 화신인 데바라쟈(神王)로 추앙 받았다.
그는 예술적 재능도 겸비하여 제대로된 건축물로서 왕국의 위엄을 갖추었다. 왕가의 장례전을 겸한 쉬바 신전 프레아 꼬(879년)와 바콩(881년)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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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소바르만 1세(Yasovarman I)

899∼910년

인드라바르만 1세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야소바르만 1세는 어릴 적부터 왕위계승자로서 철저한 교육을 받았으며 용맹하고 머리가 좋아 전략전술의 귀재로 알려진다. 또한 그는 대단히 파워풀한 결단력의 소유자로서 평지에선 적의 방어에 어려움이 있음을 통감하고 공격에도 끄득 없는 산 위(현재의 프놈 바켕 산)에 과감히 방어 성채 형상의 새수도 야소다라푸라(Yasodharapura)를 지어 천도했다. 덕분에 겨우 11년간 재위에 있었지만 막강한 챰(베트남) 왕국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했고 현재의 라오스 남쪽과 태국 쪽 그리고 버어마 지역에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기염을 토했고 왕국에는 보석, 코끼리, 황금, 황소 등 공물로 넘쳐났다고 전해온다. 

그는 왕국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으며 밖으로는 적과 투쟁하면서 안으로는 백성들을 위해, 부왕이 그러했던 것 처럼, 수도 야소다라푸라(프놈 바켕) 동편에 거대한 인공 저수지 야소다라타타카(Yasodaratataka, 현재의 동 바라이)를 지어 백성들이 연중 고루 물 걱정 없이 농사에 전념토록 배려했다. 저수지의 크기가 2km x 7km 이니 대단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또 수도에서 저수지까지 도로를 닦아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는 건축에도 주력했는데 새수도가 있는 바켕 산위에 프놈 바켕 사원을 건립했으며, 비록 자신이 버린 수도지만 선왕대인 롤루오스 시대의 왕으로 기록되길 기원하며 부왕이 축조한 인드라타타카 저수지 내에 롤레이 사원(Lolei)을 건립했다.

건축 얘기에 앞서 특기할 것은, 선왕조는 쉬바신 신봉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지만 야소바르만 1세는 비쉬누, 브라흐마 신은 물론 부처까지도 믿어 그의 건축물은 더 이상 쉬바 신전으로만 존속하지 않았다.  프놈 바켕 신전에는 쉬바 이외에도 33인의 신들을 새겼으며 프놈 끄롬 신전에는 비쉬누, 쉬바, 브라흐만을 동시에 모셨고, 프놈 복산의 신전에는 브라흐마를 모셨다. 소위 종교개혁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치세에 100여군데의 수도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하르샤바르만 1세(Hashavarman I)

910∼923년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
  

야소바르만 1세의 아들로서 정상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921년 그의 숙부가 왕에게 대항하여 코 케르(Koh Ker)에서 새 왕국을 건설, 대립했다. 이런 내분이 있은 뒤 일년 후에 야소바르만 1세는 사망했다. 그의 치세에 박세이 챰끄롱 사원이 준공되었다. 

 ▣이사나바르만 2세(Isanavarman II)

923∼928년

하르샤바르만 1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의 치세에 어느 귀족에 의해 프라삿 크라반 사원이 건립되었다. 

 ▣자야바르만 4세(Jayavarman IV)

928∼944년

하르샤바르만 1세와 이사나바르만 2세의 숙부로서 왕정에 반기를 들어 코 케르(Koh Ker)를 수도로 삼아 새 왕조를 열었다. 그의 사후 아들 하르샤바르만 2세가 즉위했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 (Rajendravarman II)

944∼968년

하르샤바르만 2세 사후 자야바르만 4세의 조카인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즉위하여 치열한 왕권 쟁탈전을 거쳐 중앙 왕국까지 통일하여 명실상부한 단일왕통치체제롤 재확립한다. 그는 초강력 통치력을 자랑하는 왕으로 코 케르를 버리고 중앙왕국의 수도인 야소다라푸라(프놈 바켕)로 천도한 뒤 내부 분열을 말끔히 정비하고 강력한 왕권 중심 통치를 구현했으며 동시에 외국으로 눈을 돌려 태국, 라오스, 베트남까지 정벌, 부강한 크메르 왕국의 기초를 다졌고 선조대에서부터 그토록 괴롭혀오던 상(上) 첸라국까지 통일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절대적인 데바르자(神王)로 군림하면서 사원을 건립, 신들에게 바쳤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 오늘날까지 앙코르 예술의 창시자라 불리울 정도로 아름다운 사원들을 많이 남겼다. 그의 치세에 확립된 앙코르 건축사상과 조각상에 대한 기본적인 구도는 앙코르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을 정도로 정점에 달한 예술혼을 보여주는데 동 메본(East Mebon), 프레아 룹(Preah Rup), 뱃춤(Bat Chum) 그리고 부조예술의 정점이라 칭송받는 반티아이 스레이(Banteay Srei)가 브라만 승려인 야즈나바라하에 의해 건립되었고 왕실 전용 휴양지 및 농업용수 공급의 목적으로 스라 스랭(Srah Sreng)도 축조했다.       
         
▼앙코르 예술의 보석이라 칭송받는, 반띠아이 쓰레이, 정교한 부조가 일품이다.
 

 ▣자야바르만 5세 (Jayavaman Ⅴ)

968∼1001년

라젠드라바르만 2세의 아들로서 어린 나이에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왕이 닦아둔 기반을 활용하여 왕권을 잘 유지했다. 그의 치세에 타 케오(Ta Keo) 사원이 건립되었다.

 ▣우다야디트야바르만 1세((Udayadityavarman I)

1001∼1002년

자야바르만 5세 사후 그의 친척이었던 우다야디트야바르만 1세가 등극하지만 1년이 채 못되어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 그가 죽었는지 아님 속세를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며 어떤 기록도 남아 있다 않다. 갑작스런 왕의 증발로 정국은 혼돈의 극치로 치닫았으며 여기저기서 스스로 왕이라 자처하며 새 왕국 건립을 선포했다. 숱한 왕들 가운데 가장 막강한 파워를 유지하던 두 왕만 소개한다.

 ▣자야비라바르만(Jayaviravarman)

1002~1011

여러 왕국으로 분열

우다야디트야바르만 1세의 증발 후 권좌를 잡아 중앙 왕국을 이어나간다

 ▣수르야바르만 1세(Suryavarman I)

1002∼1050년

어머니가 인드라바르만 1세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코랏(Korat)을 수도로 삼고 수르야바르만 1세라는 왕도 등극한다. 그는 크메르 동북부 지역(현재의 태국)을 다스리던 영주로서 전쟁 때마다 뛰어난 전략으로 승리, 통솔력을 인정받던 참이었다. 이렇게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왕들 가운데 판도는 어느정도 윤곽을 드러내며 이 두 왕이 자웅을 겨누게 된다. 1006년 두 왕은 크게 격돌하여 수르야바르만 1세가 중앙 왕국의 수도 야소다라푸라를 빼앗는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자야비라바르만은 4년을 넘게 버티며 대항했지만 결국 완전히 손을 들 게 되고 이 나라에서 왕이라 자처하는 자를 모두 처단한 뒤 지역 간의 분열ㄹ 재정비하고 범국가적 단합을 주도했으며 앙코르 왕국 최대의 인공저수지 서 바라이(West Baray, 8km x 2.2km)를 지어 백성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케 하여 신임을 얻었다. 샴(태국)의 피가 섞였다고도 전해지는 그는 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샴을 정벌하는 등 그의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확보했다. 이렇게 강력한 통치력으로 국내외적으로 안정을 도모하고 부국부강의 기반을 다졌다. 주목할 것은 그는 샴의 영향을 받아 불교도이란 점이다. 오랫동안 힌두 신화와 융합된 데바르자(神王)으로서의 지위 변동에 따른 소요와 불안감을 교묘히 해소하여 비쉬누 신의 화신인 붓다(부처)와의 조화를 꾀해 크메르 왕국에 불교를 자연스레 유입시켰다. 덕분에 훗날 앙코르와트에는 힌두교와 불교가 융합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치세에 건립된 사원으로는 남쪽 끌리앙이 있으며 서메본은 완공을 보지 못했다.

 ▣우다야디트야바르만 2세(Udayadityavarman II)

1050∼1066년

차기 왕재로 교육을 받아 왔으나 10대의 어린 나이에 부왕의 서거로 왕좌에 올랐다.  때문에 어린 왕을 얕보며 1051년과 1055년에 두 번 도합 세 번이나 반역이 일어났지만 명장 상 크레암(Sang Krearm)에 의해 격퇴되어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 신흥 세력들이 다투어 분열하면서 크고 작은 왕국을 건설하는 바람에 중앙왕권이 도전을 받는 혼란기를 오래 감내해야했다. 그런 와중에도 부왕의 업을 이어 영토 확장에 주력하여 부왕의 치세보다 더 큰 영토를 확보했다. 또 신에 대한 헌신과 왕권의 신성화를 위한 사원 건립에 주력하여 부왕대에 시작한 서 바라이와 서 메본(West Mebon)을 완공시키고 현재 앙코르 톰 내에 있는 바푸온(Bapuon)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하르샤바르만 3세(Harshavarman III)  

1066∼1090년

 

우다야디트야바르만 2세는 후사를 두지 못한채 사망하여 그의 동생 하르샤바르만 3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의 통치 시절 업적은, 그동안 내외란을 겪으면서 파괴되었던 사원들을 죄다 복구했다는 점이다. 그의 치세에는 비교적 안정을 되찾았고 대단히 부유한 시절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신분제도를 확립하여, 브라만승려급, 왕족급, 상인급, 그리고 일반 서민의 4계급 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는 안정을 추구했으나 1074년에 챰 족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나라가 황폐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의 위기를 맞았다가 훗날 평화조약을 맺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곧 중국의 협공 요청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되어 민심이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왕족 출신의 지방 호족 한사람이 스스로 왕임을 자청하며 왕국을 세우니 그가 자야바르만 6세이다. 왕국은 다시한번 내분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같은 시기 하르샤바르만 3세는 느립틴드라바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만다.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

▣느립틴드라바르만(Nribtindravarman)

 1080~1113년

전쟁 중의 혼란을 틈타 하르샤바르만 3세를 치고 권좌를 빼았았다.

▣자야바르만 6세(Jayavarman VI)

1090∼1108년

전쟁으로 민심이 소란스런 틈을 타서 왕족 출신인 마헤타푸라 지방의 호족이 새 왕국을 열고 자야바르만 6세라 칭한다. 그는 반역으로 왕위에 오른 느립틴드라바르만을 치기 위해 군대를 끌고 진격, 대립한다. 그는 중앙 왕국을 포위한 채 나름대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나 중앙 왕국의 힘도 만만찮아 그가 사망할 때까지도 점령하지 못한 채 이런 상황을 지속해야했다. 그러나 중앙왕국의 수도에서 멀지 않은 쁘레아 비헤이(Phrea Vihae)까지 영토를 확보하여 비헤이에 성채를 지어 중앙 왕국을 계속 압박하니 중앙왕국으로서는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다라닌드라바르만 1세(Dharanindravarman I)  

1108∼1113년  

자야바르만 6세의 사후 그의 형인 다라닌드라바르만 1세(Dharanindravarman I)가 왕위에 오르고 중앙왕국에선 느립틴드라바르만의 조카가 훌륭한 장수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두 왕국은 첨예한 대립을 보이면서 공방전을 펼치다가 1113년, 운명의 대격전을 펼치게 된다. 이 전투에서 다라닌드라바르만 1세는 용맹스런 느립틴드라바르만의 조카에게 패해 목숨이 끊어진다. 그가 바로 앙코르와트를 건립한, 앙코르 왕국의 번성기를 추구했던 수르야바르만 2세이다.

 ▣수르야바르만 2세(Suryavarman II)

1113∼1150년

전쟁 승리후 수르야바르만 2세는 새로운 사명감을 띄고 느립틴드라바르만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새 왕국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분열된 땅을 모두 정벌, 앙코르의 중앙 왕국으로 거듭 태어난다. 통솔력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웠던 그는 대단히 강력한 중앙통치권을 발동하여  국내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후 베트남, 태국, 라오스는 물론 멀리 말레이시아 반도 끝까지 정벌하여 부강을 과시했다. 또 기존의 불교 사상을 버리고 다시 힌두교로 귀의했으며 영웅적인 자신의 치세를 빛낼 신전 건립에 몰두했는데 바로 오늘날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앙코르와트의 건설이 그것이다. 비쉬누 신에게 바친 이 신전은 실제로는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한 최대의 걸작물로서 신전 건립에 재정을 지나치게 낭비하여 국가 재정의 결핍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외 건축물로는 챠우샤이 테보다(Chau Say Tevoda), 톰마논(Tommanon)이 있으며 반테이 삼레(Banteay Samre)는 준공만 한채 사망했다.

  ▣다라닌드라바르만 2세(Dharanindravarman II)

1150∼1160년???

 내분, 왕위쟁탈전 
 1177년 챰(Cham)
 의 대침공.

 

찬란한 위업을 이루었지만 자식이 없었던 수르야바르만 2세 사후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라닌드라바르만 2세가 즉위했다.

 ▣야소바르만 2세(Yashovarman II)

1160????~1165년

이 왕의 통치 시절 롤루오스 지역 내의 사원들이 복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트루부바나디트야바르만의 반역으로 명이 끊어졌다.

 ▣트루부바나디트야바르만(Trubuvanadityavarman)

1165∼1177년

권좌를 차지했지만 1177년 챰족(현재의 베트남)이 침범,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패하여 피살 당하므로서 국가는 큰 혼돈으로 빠져든다.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81∼1219년

자야바르만 7세. 바로 혼돈의 시기가 창조해낸 영웅이다.

수르야바르만 2세의 사촌이자 지방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자야바르만 7세는 1177년 메콩 강을 통해 침입한 챰 족의 대대적인 제2차 공격에 맞서 태국과 협공하여 수전(水戰)에서 크게 승리, 오히려 챰 국까지 역공하여 1181년 챰의 수도 비자야(Vijaya)까지 함락하고 챰 왕을 사로잡아 구국영웅으로 칭송 받는 틈을 타 비어있는 중앙왕국의 왕으로 즉위한다.

그는 더 이상의 외란을 방지코자 식민지 관리에 철저를 기하며 조공을 받았는데 당시 식민지로는 태국, 라오스, 베트남을 비롯 인도네시아의 발리에 본거지를 둔 쟈바 왕국까지이고 중국의 원나라에서 온 사신 주달관의 당시 기록을 봐도 그 광활한 영토와 부는 역사에 길이 기록된다.

앙코르 톰 내 프라삿 수오르 쁘랏의 열두 개 탑 아래 놓였을 조공품들을 상상할 수 있다면 왕국의 부가 어느 정도였을런지 짐작 가능하다.  

안으로는 천재지변에 무관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관개수로를 정비하여 그 길이가 수백킬로미터에 달했으며 높은 제방으로 둘러싸인 저수지(Jayatataka)를 만들어 물을 가둬 연중 활용케 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수많은 병원을 지어 국민의 편의에 기여하는 등 국가 안정에 주력했다.

◁앙코르 톰 내의 신상. 바위를 쌓아 얼굴을 그려내는 기술이 뛰어나다. 수많은 얼굴은 모두 그 모습이 다르다. 실제로는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고 한다.

또 전쟁으로 파괴된 바푸온(Bapuon) 사원 보수를 비롯, 타 프롬(Ta Prom), 반테이 크데이(Banteay Kdei), 닉 핀(Neak Pean), 스라 스랑(Srah Srang), 프레아 칸(Preah Khan), 바욘(Bayon), 크롤 코(Krol Ko), 프라삿 수오르 프랏(Prasat Suor Prat), 앙코르 톰의 코끼리 테라스와 문둥이왕 테라스 등 수많은 사원과 부속 시설들을 보수, 건립했다.

특기할 것은 그는 대승불교 신도여서 국교를 불교로 개종, 스스로를 기존의 힌두신의 화신이 아닌 관음보살의 화신(化身)으로 비유하는 등 불교적으로 장식했다. 자야바르만 7세 시대가 앙코르 아니 캄보디아 역사를 통털어 최대 번영기라고 할 수 있지만 연이은 숱한 신전 건립과 1200년 앙코르 톰(Angkor Thom)으로의 천도(遷都) 비용을 감당치 못해 국가 재정이 결핍되어 급속도로 멸국의 길로 치닫는다.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둥병(으로 추정되는)에 걸려 사망하는데 그의 걸작품 바이욘 신전 내 부조에 죽어가는 왕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인드라바르만 2세(Indravarman II)

1219∼1243년

 ▣자야바르만 8세(Jayavarman VIII)

1243∼1295년

 ▣인드라바르만 3세(Indravarman III)

1295∼1307년

사양길에 접어든 앙코르 왕국 건너 태국에선 아윳디야에 수도를 둔 샴 국의 기운이 뻗어가고 있어다. 샴은 지속적으로 앙코르 왕국을 위협한다.

 ▣인드라자야바르만(Indrajayavarman)

1308∼1327년

 ▣자야바르만 프라메스바라(Jayavarman  Pramesvara)

1327년

앙코르 왕국은 샴국의 압박에 못이겨 결국 앙코르를 버리고 톤레삽 호수 너머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긴다. 왕국을 짓고 사원을 건립하는 등 새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지만 결국 샴의 지배를 받게됨으로서 앙코르 왕국은 두 번다시 재기하지 못하였다..

 

 

 

 샴(태국) 통치 시대

 

자야바르만 7세 때의 부국의 정점은 급속도로 하향 길에 접어들어 이후 200여년 동안 샴(태국), 베트남 등 주변 국가들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으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국력이 쇠약해지자 예속국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지만 무기력한 앙코르 왕조는 회복할 능력은커녕 국내적으로도 피폐해진 경기를 부활시키지 못하고 외세의 침범은 잦아져 사면초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1431년 태국 아윳디야(Ayudhya) 왕조의 공격을 받아 회생불능의 상태로 치달아 급기야 수도를 앙코르에서 바산(Basan)으로 옮겼으나 태국군이 톤네샵까지 쳐들어오자 1434년 서둘러 다시 프놈펜(Phnom Penh)으로 옮기고 크메르라 개명한다. 때문에 인구 100만명을 자랑하던 번화한 수도 앙코르와 화려한 유적들은 버려지고 폐허로 변한 채 울창한 밀림 속에 파묻히고 만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대항하기엔 역부족인 크메르는 이후 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혼돈의 시대

 

왕은 존재하되 왕권은 유명무실해진 상태에서 크메르는 인도챠이나 반도에서 자웅을 다투는 국가들에 의해 지배를 받는 치욕의 시대를 맞이한다. 자체적으로 독립할 여력이 없음을 통감한 크메르는 당시 동남아로 세력을 뻗어온 스페인에게 의뢰하여 태국을 몰아내었지만 이젠 스페인의 강압적인 지배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1599년 스페인군을 내몰지만 이번에는 베트남의 구엔 왕조가 침범한다. 국토의 대다수를 태국과 베트남에게 빼앗긴 크메르는 프랑스에 지원 요청을 하기까지 수백여 년 동안을 태국과 베트남의 지배를 받아야 했으며 왕권은 현저하게 쇠약하여 이름뿐인 왕정이 유지되었을 뿐이었다. 동시에 소승불교를 국교로 하는 태국은 크메르의 종교 즉 힌두교와 대승불교의 융합 고리를 깨뜨리고 베트남 역시 크메르의 문화를 완전히 개조해버리는 등 크메르는 정치 뿐만 아니라 종교와 문화, 관습 등에 이르기까지 주체성을 상실한 혼돈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프랑스 통치 시대

 

하나의 국가가 어떤 위치로 존립할 수 있는가는 군사력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외침과 지배로 밑바닥까지 추락한 크메르의 국력은 적에 대항할 능력을 완전 상실했지만 왕의 집념은 회생을 향해 몸부림쳤다. 1863년 당시 국왕인 노로돔 수라마리트(Norodom Suramarit)는 태국과 베트남으로부터 벗어나기엔 미약한 국력을 통감하고 대신 그들보다 강한 힘을 끌어들일 계획을 세운다.

당시 유럽에선 동방정책이 활성화되어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아시아에서 식민지 정책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었다. 1859년 프랑스는 베트남 정부가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했다는 점을 핑계 삼아 베트남을 점령, 식민지화했다. 수라마리트 왕의 시선은 이 새로운 강대국 프랑스에 쏠리고 캄보디아의 보호자가 되어 줄 것을 자진해서 부탁했다.

1864년 수라마리트 왕은 프랑스와 보호령 협약을 체결했으나 동상이몽을 가진 이 협약은 또다른 불행의 시작이었다.

왕은 인접국으로부터의 국가 회복과 국민 생활 향상을 기원했지만 프랑스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인도챠이나 반도 내에서의 거점 확보를 위한 발판이며 더 많은 수익을 위한 보호자 가면을 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때문에 왕은 지위만 보장 받았을 뿐 대신 국가와 국민을 프랑스의 식민지 노예로 넘겨주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경제는 프랑스로 넘어가고 중요한 지위나 경제 주체는 프랑스 식민지 국민인 베트남인으로 대거 대체되는 등 캄보디아인의 지위는 더더욱 미약해져 갔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식민지화를 위해 캄보디아를 라오스, 베트남과 함께 인도차이나 반도 연합에 가맹시켜 철저히 통제하는 바람에 급기야는 프랑스에 반발하는 크메르 민족주의 운동을 야기시킨다.

 

   일본 통치 시대

 


왕은 이제 프랑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프랑스는 그런 왕을 못마땅히 여겼고 보다 철저히 식민지 캄보디아를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프랑스에도 우환이 닥쳐왔다. 1939년 9월 1일 유럽에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유럽 재패를 꿈꾸는 독일이 1940년 9월 프랑스를 공격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도 세력의 판도가 급변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급습을 시작으로 뒤늦게 대전에 동참한 일본은 아시아 지역 패권을 노리며 프랑스가 힘을 상실한 틈을 타 인도차이나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소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불바다에서 신음하게 되어 누구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1941년 4월 프랑스 식민지 정부는 자주독립의 의지가 지

나치게 강한 노로돔 수라마리트 왕의 강제 하야시키고 19세의 젊은 왕자 노로돔 시하누크(Nordom Sihanouk)를 왕으로 추대했다. 어린 왕은 훨씬 다루기 쉬우리란 프랑스의 짐작은 혈기왕성하고 미래지향적인 왕의 사고에 가끔씩 부딪혔다. 시하누크 왕은 왕권을 되찾고 부강한 국가 회복을 꿈꾸며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 세력을 떨치던 일본에게 눈을 돌렸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강대국의 위협, 반왕정파와 친왕정파의 반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빈곤에 시달리는 국민들 사이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급속히 스며들었다.

다시 프랑스에 기댄 왕과 일본을 등에 업은 손탄 수상과의 정당 싸움이 반전되는 가운데 제2차 대전은 본격화되어 지구촌이 불바다에 휩쓸려 있을 즈음 일본은 시하누크 왕으로 하여금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길 종용했다. 이에 맞서 프랑스는 국내 세력을 활성화시켜 왕을 반격토록 조종하였지만 당시 상황에선 일본이 승리하는 건 자명한 일. 결국 1945년 3월 9일 일본의 반협조 반강요에 의해 캄보디아는 프랑스 보호협정을 파기,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 시대

 


하지만 제2차 대전 패망을 앞둔 시기에 일본을 등에 업는 건 결코 현명한 일은 아니었다. 그 해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일본이 군대를 철수시키자 그 해 10월 프랑스는 캄보디아에 대한 식민지 보호령을 다시금 회복했고 왕은 프랑스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고서야 왕권을 보장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무리한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강한 반발을 받아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식민지인 베트남 반군과의 교전으로 힘들어하던 프랑스는 당시 캄보디아에서도 일고 있는 과격한 반 프랑스 좌익운동을 우려하여 1949년 11월 한 걸음 물러나 캄보디아로 하여금 절반의 독립을 허용하였고 1953년 11월에는 국가의 자존심인 사법권과 외교권 그리고 군사지

휘권까지 왕에게 이양함으로서 사실상의 독립을 획득하게 되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 군에게 완패 당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식민지 정책을 포기하고 철수, 그 해 제네바에서 개최된 회담에서, 한반도를 그렇게 했듯이, 베트남을 남북으로 자르고 인도차이나 국가들이 명실공히 완전한 독립을 이루도록 강대국들은 합의했다.

그 당시만해도 캄보디아도 국제적인 독립 인정을 보장받음으로서 오랜 세월 꿈꿔왔던 자주독립을 달성한 듯 했지만 희망 찬 미래를 꿈꾸는 캄보디아 앞에 베트남으로 인해 더 이상의 추락이 없을 정도의 최악을 예고하는 공산정권과의 내분이 이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공산주의 시대

 

국가가 국제적 지위를 되찾자 1955년 노르돔 시하누크 왕은 프랑스에 의해 하야(下野) 당했던 부왕 노로돔 수라마리트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본인은 총리에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뛰어든다.

세상은 변했다. 제2차 대전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의 냉전 상태로 돌입, 여기에 1949년에 공산화된 중국이 그 세력을 뻗어 인도차이나 반도는 붉은색으로 물들어간다.

왕도 정부도, 강대국도 믿지못하는 반감이 확산되면서 소위 공산주의 사상이 사람들 사이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여기에 프랑스에서 귀국한 지식층들이 국민의 안위에 눈을 돌리면서 1960년 4월 훗날 엄청난 파란을 몰고올 폴 포트 등 공산주의자들이 회의를 갖고 그 악몽의 주체가 될 크메르 루즈(Khmer Rouge)가 대두된다.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평화의 파수꾼임을 주장하는 미국이란 또 다른 외세가 인도차이나 반도에 발을 들여놓고는 시시콜콜 간섭했다. 이로서 공산 베트남(북)과 미국의 후원을 입은 베트남(남)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막겠다는 명목 하에 미군의 월남 파병이 개시되고 1965년 미군의 하이퐁 폭격을 정점으로 베트남 전이 본격화되었다.

1960년 부왕이 서거하자 다시 왕위에 오른 시하누크는 이 시대의 훌륭한 보호자로서 중국을 주시하며 친밀한 교류를 시작하지만 군부는 미국쪽으로 기울어 친미파인 론놀 장군(Lon Nol)과 친중파인 왕과의 팽팽한 세력 다툼으로 진전된다.

미군과 공산월맹과의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자 친중파인 시하누크 왕은 월맹에게 보급로를 터주는 등 공산군에게 협조하자 미군은 캄보디아에 폭격을 가하고 진노한 시하누크 왕은 1965년 5월 미국과의 단교 조치를 내린다. 캄보디아는 자국내에 월맹군의 보급 및 전투기지 건설을 허용하는 바람에 미군의 폭격이 가중되었는데 특히 1969년 3월에 실시된 미국의 캄보디아 내 베트콩 기지 전멸 작전 때 엄청난 폭격으로 무차별한 희생이 발생했다. 이러한 이웃나라의 월남전 불똥에 맞은 캄보디아에선 무려 80만명이 넘는 애꿎은 인명이 무고하게 희생당했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바쁜 미군과 공산주의를 냉대하는 세계의 시선은 캄보디아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왕은 1969년 11월 미국과의 국교를 재교하여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는 자구책을 써야했다. 

   론놀 정부 시대

 

무고한 국민의 희생을 왕의 실정(失政)으로 탓하며 친미파인 론놀 장군은 시하누크 왕이 프랑스 외유 중인 1970년 3월 28일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 폐지와 함께 그 해 4월 10일 국민이 주축이 되는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을 수립한다.

미국을 등에 업은 론놀은 공산주의 탄압을 시작했으며 왕을 따르는 왕정파마저도 공산주의로 몰아붙혔다. 게다가 프랑스 통치시절 통치부가 캄보디아로 이주시킨 수많은 베트남인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자 힘없는 민심은 자연적으로 정부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즈에게로 쏠렸다. 국민의 지지를 얻은 크메르 루즈는 보다 조직적, 공격적으로 변모하고 여기에 시하누크가 조직한 캄푸치아인민연합전선(NUFK)의 원격지원을 받음으로서 이제 캄보디아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내부 이념전쟁에 돌입한다.   

외세에 의탁하는 것이 결코 현명치 못함을 역사를 통해 배워 왔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캄보디아는 철저하게 외세에 의해 유린 당한다. 1973년 1월 27일의 파리 회담의 결과에 승복한 미국은 아무런 득도 없이 자국민의 희생과 끝없는 물자 손실을 통감하고 1973년 악몽의 월남전을 종결한다. 그해 4월 12일 캄보디아 내에서의 미군 철수가 이뤄지자 공산주의가 득세하는 가운데 크메르 루즈는 1975년 4월 17일 수도 프놈펜을 장악한다. 그리고 이웃나라 베트남에선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이 월남을 전격적으로 공산 합병, 곧이어 미국과의 단교, 캄보디아 공산화 합병 등의 발 빠른 변화에 의해 캄보디아의 운명은 학살의 늪으로 빠르게 향하게 되었다.  

 민주 캄푸치아(크메르 루즈) 시대

 

▲옛 정권의 희생자 가족이 있는 집 앞에는 이렇게 그들을 기억하는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는데.... 너무나 많은 집이 희생을 당해 이제 그 슬픔도 생활의 일부가 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1976년 1월 5일 크메르 루즈의 혁명군 지도자 폴 포트는 공산 캄보디아 정부를 수립, 신임 총리로 취임한다. 민주주의에 대립하는 공산주의자인 그가 개명한 국명은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그는 과거의 잔영을 지우는 소위 숙청 작업에 돌입, 지식인, 부유한 사람, 왕정파, 친미파 할 것없이 갖은 명목을 붙혀 4년 동안 200만명이나 되는 무고한 인명피해를 입혔다. '킬링 필드'..... 시력이 나빠 안경을 꼈다는 이유만으로, 글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 부지를 위해 남편이 아내를 감시하고 자식이 부모를 밀고하여 죽임을 당했으며 국민들은 강제노역에 투입되고 가난과 질병에 속수무책인 채 죽어갔다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시대

 

캄보디아만큼 근대사에 자주 이름을 바꾼 나라도 드물다. 70년대 인도차이나 반도 지도는 자고 나면 바뀌는 국명과 지명으로 혼돈스러웠다. 1978년 12월 공산 베트남군이 침공, 1979년 1월 7일 캄보디아를 함락하자 폴 포트 정권은 도주하고 친베트남계의 공산세력인 훈센(Hun Sen)이 총리로 취임, 국호는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으로 개명되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 내정에 깊게 관여했지만 공산 베트남 역시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국제적 지위는 무인지경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여기에 망명생활 중인 시하누크는 민주 캄푸치아 연립정부라는 망명정부를 수립, 베트남과 크메르 루즈에게 대항했다. 공산 정부는 민심 수습을 위해 공산주의 밀도를 약화시키며 사유재산을 허용하고 민주주의식 투표를 실시하는 등 탈바꿈을 시도했다.

현정부

 

악몽은 끝났는가? 1989년 10월 베트남은 자체적인 무기력함을 이기지 못하고 캄보디아에서 철수, 1991년 10월 23일 파리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이로서 캄보디아는 발 빠른 재탄생을 시도하지만 다시금 공산 정권 수립을 획책하는 크메르 루즈의 저항, 새로운 사상을 가진 정치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정 다툼,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라는 혼돈에 빠진다. 그리고 1992년 3월 근대사에 기록될만한 대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과 세계가 감시하는 가운데 캄보디아의 총선이 실시되어 1993년 9월 23일 캄보디아는 명실공히 헌법에 의해 왕이 존재하는 민주주의적 입헌군주국으로 거듭 태어나고 오랜 망명생활을 끝낸 시하누크 공이 귀국, 왕위에 오른다. 프레룹 밖에서 물건 파는 꼬마. 내대여섯 살 정도의 어린  ▶ 소녀지만 유창한 영어와 능숙한 상술로  손님을 끄는 꼬마의 웃음에서 자유로움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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